187.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댔다. 희미하게 날 부르는 듯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으, 뭐야. 졸려 죽겠는데.
“하온아!”
“으, 으응.”
눈이 잘 안 떠져……. 뒤척이면서 졸음 가득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이한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날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이한의 주름진 미간이 곱게 펴졌다. 이내 내 이마에 차가운 체온이 닿았다.
“안 일어나서 걱정했잖아…….”
나는 몽롱하게 잠에 취한 상태에서 지금 몇 시인지 떠듬떠듬 물었다.
“9시 넘었어.”
“……아.”
오늘 스케줄이 뭐더라. 오늘, 오늘……, 은 연습 말고는 없네. 아, 더 자고 싶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하온이 일어났어?”
유찬 형이 우리 방에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깨긴 했는데 졸린가 봐.”
“어디 아픈가. 항상 새벽에 일어나더니…….”
“열은 없어. 안색도 괜찮고.”
유찬 형은 내가 끌어안고 있는 이불을 들춰내더니 억지로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몸을 곧추세울 수 없어 흐느적거리다가, 유찬 형한테 기대듯 앞으로 꼬꾸라졌다.
“왜 이렇게 정신 못 차려? 어제 뭐 했어?”
“……어제?”
어제……. 수면 욕구에 밀려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동시에 퓨즈가 켜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어제…….”
어제 정이한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 말아? 하지만 아직 형들이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신할 길이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으니 조금 돌려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제 이한 형이 안 들어와서 기다리다가…….”
이서호와 게임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정이한은 없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정이한도 형들 방에서 잤을지도 모르고.
“헙.”
정이한이 숨을 들이켰다. 유찬 형은 눈매를 좁힌 채 정이한을 흘겨봤다.
“그러게 내가 빨리 돌아가라고 했지?”
“……윽. 미안, 나 많이 기다렸어?”
“당연하죠.”
나는 눈을 비비면서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정이한은 기쁨과 죄책감이 섞인 오묘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아악! 차가아악!”
방문이 열려 있어서 이서호의 우렁찬 외침이 선명하게 들렸다. 오늘도 아침부터 기운차네.
“서호 형 일어났네요.”
“하온이는 우리 방에서 씻어.”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들고 방을 나갔다. 이서호를 깨운 강현 형은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었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코를 찌르자 허기가 느껴졌다. 무염 버터 주제에 향은 나쁘지 않은 게 신기하단 말이지.
“좋은 아침이에요, 강현 형.”
“웬일이야. 네가 늦잠을 다 자고.”
“아하하…….”
흐암, 나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욕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로 세수하니 점점 머리가 맑아졌다.
연습 끝내고 돌아오면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정이한이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유찬 형이 눈치챈 것 같다는 것도 넌지시 말해보고.
***
“잠깐 쉬자.”
강현 형의 꿀 같은 휴식 선언이었다.
“……으으, 배고파.”
이서호가 바닥에 털푸덕 엎드렸다. 엉덩이만 하늘로 치솟은 모양새는 프로 아이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흉측했다.
“아침 먹었잖아.”
이서호는 연습실 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리면서 꿍얼거렸다.
“다이어트용 샌드위치 반쪽으로 넌 배가 차냐?”
“음료수라도 사다 줄까?”
“우윽. 차는 물렸어……. 종류별로 다 먹은 거 같아…….”
이서호는 탄산이 먹고 싶다고 버둥거렸다. 다들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몸이 탄탄해졌는데도 선뜻 다이어트를 그만두는 멤버는 없었다. 내일 뮤비 촬영에서 상의 탈의를 해야 하는 탓이었다.
“서호야, 내일이면 고기 먹을 수 있어…….”
유찬 형이 흐느적거리면서 대답했다.
“내일이 언제 오는데! 아악! 누가 내 머리 좀 때려줘! 기절시켰다가 아침에 깨워주라!”
나는 발작하는 이서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내 텀블러를 손에 들었다. 이거면 제대로 재워줄 수 있겠지?
“내가 재워줄게. 일어나는 건 알아서 해.”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텀블러를 꽉 쥔 채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내려치는 척을 하자 기겁한 이서호가 데굴데굴 굴러서 몸을 피했다.
“쳇. 그걸 피하네.”
“헉, 진하온 미쳤어? 그거 맞으면 사망이야!”
“죽지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은 했어.”
이서호는 제 양팔을 감싸 안고 바들바들 떨면서 유찬 형 뒤로 숨었다.
“혀엉, 진하온이 나 때리려고 해!”
“그럼 형이 재워줄까? 하온아, 텀블러 좀 던져줘.”
씨익 웃으면서 유찬 형에게 텀블러를 던져줬다. 형이 텀블러를 받아 돌아섰을 때 이서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다들 미워어어어어!”
이서호가 우는 척하면서 연습실을 방방 뛰어다녔다. 하여간 기운도 좋아. 매번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건 전부 관심병 때문이라니까.
“이서호. 힘 그만 빼고 쉴 땐 확실히 쉬어.”
이서호는 강현 형에게 한 소리 들은 뒤에야 폭주를 멈췄다. 아랫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저 먹보가 몸 만든다고 좋아하는 음식을 다 끊은 건 칭찬할 만한 일이긴 했다.
솔직히 다른 형들은 그렇다 쳐도, 이서호는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거든. 매번 힘들다고 우는소리 하면서도 용케 다이어트를 잘 해낸 이서호가 기특하기도 했다. 스트레스 많이 받긴 할 거야. 불쌍하니까 물이라도 줘야지.
“서호 형, 물 마셔. 탈진하면 어떡해.”
“병 주고 약 주냐!”
이서호는 삐죽거리면서도 내 쪽으로 총총 걸어왔다.
“병만 주는 것보단 낫지 않아?”
“……그건 그렇지?”
갸우뚱거리면서 다가온 이서호에게 텀블러를 건네주자 물을 벌컥벌컥 마신 이서호가 “캬하!”하며 아저씨 같은 소리를 냈다.
“하온이도 좀 마셔.”
유찬 형이 내 텀블러를 가지고 돌아와서 나도 목을 축였다. 텀블러 뚜껑을 닫으면서 슬쩍 정이한 쪽을 살폈다. 평소라면 내 옆자리를 꿰차고 있을 정이한이 오늘은 위성처럼 내게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꽤 멀쩡한 것 같더니 아니었나 보네. 나는 텀블러를 손톱으로 긁적이다가 내려놓았다. 일상에서 정이한만 톡 빠져나간 듯한 기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저 정이한이 나와의 거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인데, 무언가 어긋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
우리는 오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부터 2박 3일 동안 남해에서 뮤비 촬영이 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오전 5시에 출발해야 해서 평소보다 일찍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은근슬쩍 형들 방으로 가려는 정이한을 붙잡았다. 무척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왜?”하고 묻는 정이한을 새초롬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정이한이 움찔거리다가 울상을 짓고는 터덜터덜 나를 따라왔다.
정이한을 앞세운 채 방으로 들어가다가 요상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는데, 그 순간 형들의 방문이 닫히는 게 보였다. 지켜보고 있었나? 확실히 뭔가 아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먼저 내 침대에 앉은 뒤 옆자리를 팡팡 두들기면서 정이한을 불렀다.
“여기 앉아봐요.”
“……어.”
정이한은 내 옆이 아닌 침대 끝자락에 살포시 앉았다. 이 정도 거리면 우리 사이에 사람 두 명은 더 앉아도 될 것 같은데?
“거기 말고, 제 옆이요.”
정이한은 내 눈치를 보다가 조금 옆으로 옮겨 앉았다. 너무 조금이라 옮겨 앉은 티가 안 날 만큼이었지만.
“형, 이제 제 옆에 오는 게 싫어요?”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나는 옆에 있고 싶지.”
“그런데 왜 안 와요? 오늘 하루 종일 저 피해 다녔잖아요.”
정이한은 대답하기 곤란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네가 안 오면 내가 가면 되지. 나는 벌떡 일어나서 정이한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도망치듯 일어나려는 정이한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아, 안 돼! 하온아! 위, 위험해…….”
“뭐가요?”
“내, 윽, 내가…….”
정이한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삼킨 정이한이 팔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다시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또 이러네.
짜증이 확 몰려와서 정이한을 쫓아갔다. 정이한은 내가 두 걸음 다가가면 세 걸음 물러났다. 결국 속이 터진 나는 정이한한테 냅다 몸을 날려버렸다. 허리를 붙잡고 늘어지자 정이한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윽, 하, 하온아! 붙지 말라고 했잖아!”
정이한이 큰소리치면서 내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나한테 고함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조금 놀란 상태로 굳어 있었더니 정이한은 한숨 쉬면서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훑었다.
“……소리쳐서 미안. 가까이 오지 말아주라…….”
“왜…….”
그런지 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 지금 충격받았나 봐. 정이한이 날 거부했다는 사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정이한은 내 편이 되어 줄 줄 알았으니까.
오만한 자신감이었나보다.
내가 정이한에게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그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나? 어제 형들이랑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정리한 걸까. 그래서 나와 거리를 지키려 하는 거고. 사과의 의미도…….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거부한 건 나였으니 충격받을 자격도 없었다. 같은 그룹 멤버라는 관계를 생각하면 곤란할 일도 없고 오히려 잘 됐지, 뭐.
하지만…….
하지만 나는 몰랐다. 정이한이 내게 품은 감정을 지워버리면 이렇게까지 멀어질 줄은. 그리고 그게 이렇게 쓸쓸한 일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물 좀 마시고 올게요.”
나는 표정 관리할 자신이 없어서 정이한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 아직은 낯설어서 그래.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적응할 거야.
“하온아!”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정이한이 달려들었다. 등 뒤에서 커다란 팔로 나를 감싸 안고는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왔다. 어이없게도 정이한의 체온에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뭐예요. 저 싫다면서요.”
“내가 언제! 그게 아니라…….”
정이한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가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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