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다행히 이서호는 우리를 쫓아오지 않고, 좀비들과 함께 유찬 형을 데리고 가버렸다. 덕분에 나와 강현 형은 충분히 휴식하면서 W익스프레스 입구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모노레일 때와 똑같이 검은 양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요원을 보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노트를 건넨 뒤 ‘급행목’의 해석을 말하고, W익스프레스 입구로 들어왔다. 우리는 탑승구까지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길과 높은 계단을 샅샅이 살피면서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네.”
그렇게 탑승구에 도착하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직원이 보였다. 만면에는 상큼한 미소를 띤 채였다.
“모험과 환상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직원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와 강현 형을 탑승석으로 이끌었다. 지정된 자리에는 작은 카메라가 거치되어 있었다. 얼떨결에 탑승석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안전바가 내려왔다.
“어? 이거 움직…….”
W익스프레스가 경사로를 따라 덜컹거리며 올라갔다.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건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손만 흔드는 직원들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와! 강현 형, 경치 좀 봐요!”
밑으로 징그럽게 우글거리는 좀비들이 반짝이는 놀이기구들의 빛을 받아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래에 펼쳐진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어느새 열차가 꼭대기에 도달한 건지 몸이 앞쪽으로 기울었다. 곧, 예고도 없이 열차가 추락했다.
“악!”
몸이 쑥 꺼지는 느낌과 함께 등줄기를 타고 불쾌한 기분이 엄습했다. 레일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나는 처음 타 보는 놀이기구에 정신을 놓고 눈을 감은 채 소리만 질러댔다.
열차는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멍하게 있었더니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온이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네.”
덕분에 살짝 정신이 돌아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그러게요.”
나도 내가 이런 놀이기구 무서워하는 줄 몰랐지. 추락할 때 밑바닥으로 끌어내려지는 것만 같던 공포감은 어마어마했다. 두 번은 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와중 안전바가 서서히 올라갔다.
나는 안전바가 반쯤 들리자마자 쏙 빠져나왔다. 나에 이어 강현 형까지 느릿하게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직원은 우리에게 메모와 펜을 내밀었다.
일단 받아 들긴 했는데…….
“…….”
여기에 뭔가 써야 하는 것 같지? 하지만 내 기억은 경치를 구경했을 때를 마지막으로 뚝 끊겨있었다. 강현 형은 뭔가를 봤으려나?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형을 봤는데…….
“중간에 글자 적힌 건 봤어.”
“와! 그건가 봐요! 적어주세요!”
형에게 메모와 펜을 내밀자, 강현 형은 거침없이 글자를 슥슥 써 내렸다. 하지만 ‘네 마리의’까지 적은 뒤 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이것밖에 못 봤어.”
그럼 나머지 단어는 내 쪽에서 봤어야 하는 건가? 혹시나 해서 직원에게 메모를 내밀어 보았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틀렸습니다. 출구는 이쪽입니다~”
직원이 우리를 쫓아내듯 출구 쪽으로 몰아낸 탓에 강현 형과 나는 떠밀리듯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힌트를 완성하려면 아무래도 한 번 더 타야 할 것 같은데…….
“형…….”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강현 형이 먼저 운을 뗐다.
“일단 다시 올라가자. 하온이 무서워하니까 내가 보고 올게.”
형은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트린 뒤 나를 이끌었다. 다시 한번 탑승구로 올라간 강현 형은 이번에는 혼자서 놀이기구에 올랐다.
“형, 반대쪽에 앉아야 하지 않아요?”
내 쪽에 적힌 걸 보려면 반대쪽에 앉아야 할 텐데, 저기는 아까 형이 앉은 자리와 똑같았다.
“……알아.”
“형 쪽만 봤다면서요?”
“널 보고 있었지.”
“네?”
“……무서워하길래.”
강현 형은 말을 덧붙인 뒤 내게서 시선을 피해버렸다. 뭐, 뭔데.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어쩐지 나까지 부끄러워 귀가 뜨끈해졌다. 괜히 직원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눈만 끔벅거렸다. 잠시 후 놀이기구가 출발한 뒤에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강현 형을 태운 열차는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굉음과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왔다. 체감상으로는 엄청 길게 느껴졌었는데,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형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면서 날 보고 웃었다. 고작 머리 쓸어 넘기는 행동이 저렇게 우아해 보이다니. 역시 프로 아이돌은 다르네.
형은 안전바가 올라가자마자 열차에서 내려 곧바로 메모에 답을 적어 직원에게 내밀었다. 힐끔 들여다보니 [네 마리의 곤충]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정답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마리의 곤충? 이번에도 이 힌트를 풀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나 보네. 네버랜드에 곤충과 관련된 관이 있던가?
“나 알 것 같은데.”
“네? 진짜요? 어딘데요?”
강현 형이 막 운을 떼려던 때였다.
“하온아!”
우렁차게 들리는 정이한의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백팀의 생존자 두 명이 레일 건너편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우리가 훨씬 앞선 줄 알았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형, 일단 가요!”
강현 형의 팔을 일단 쭉 잡아당겨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장소 어딘데요?”
“사파리.”
“……아.”
형의 해석을 듣자마자 사파리가 왜 네 마리의 곤충을 의미하는지가 확 와닿았다. 정답을 확신한 나는 “사파리로 가요!”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머리 위에서 W익스프레스 열차가 웅웅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
우리는 최대한 좀비를 피해 사파리 입구 근처에 도달했다. 하지만 입구에 몰려 있는 좀비의 수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달랐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좀비들이 한곳에 모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들어가지…….”
우리는 가족용 포토존으로 쓰이는 백사자 패널 뒤에 몸을 숨겼다. 동그랗게 뚫린 곳으로 눈만 빼꼼 내놓은 채 사파리 입구를 탐색했다. 와글와글 몰려 있는 좀비 사이에 껴있는 봉재범 선배님, 유찬 형, 이서호가 보였다.
“여기가 최종인 것 같은데요.”
“내가 유인할 테니까 먼저 들어가.”
“형은요?”
“따라갈게.”
“이번에는 제가 유인할게요.”
아까는 강현 형이 고생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해야지.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내 체력이 더 좋을걸?”
“저도 아직 여유로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내 체력을 확인했다. 사실 여유롭다고 뻗댈 수 있는 정도는 아니긴 해. 20% 아래로 내려간 체력을 보니 촬영이 길게 이어지면 ‘죽어도 고’ 스킬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강현 형만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걸.
“아냐, 나 아직 하나도 안 힘들어. 내가 유인할게.”
무심하게 말을 툭 내뱉은 강현 형이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형을 붙잡으려고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배회했다.
“아! 강현 형!”
“빨리 가!”
그새 멀어진 강현 형이 좀비들을 대거 이끌고 달리면서 내게 소리쳤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형이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길이 뚫리기를 기다렸다.
입구의 좀비들이 강현 형을 보고 등을 돌린 순간 얼른 사파리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런 내 앞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강현 형을 좇다가 나를 발견한 이서호 좀비였다. 이서호가 ‘우어어어……!’소리를 내면서 내 앞길을 막아섰다.
“아! 서호 형! 규칙을 지켜야지!”
“우어? 우어어?”
나 왜 저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지. 분명 규칙? 규칙이 뭔데? 하고 되묻는 거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분명해.
“흐억, 흑! 악, 아니, 어억, 어어!”
그런 이서호의 뒤를 유찬 형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저 형은 좀비가 됐는데도 좀비가 무서운가 봐. 유찬 형을 보는 순간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푸흡, 아, 지금 웃을 때가, 흐흑.”
“그륵, 막, 그르륵, 내에에에…….”
이번엔 봉재범 선배님까지 합류했다. 출연진 좀비는 자아가 너무 강해서 못 써먹겠어. 그나저나 봉재범 선배님과 유찬 형은 나랑 같은 팀인데 설마 나를 잡진 않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아무도 믿지 않기로 마음 먹고 나를 따라오는 세 명을 뿌리치기 위해 전력 질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 명의 출연진 좀비들은 나를 착실히 따라오기만 할 뿐, 입구에 미리 가서 기다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는 수월하게 출연진 좀비들을 따돌리고 요원을 향해 냅다 달렸다.
“네 마리의 파리는 사파리입니다!”
나를 쫓아오는 이서호 좀비를 신경 쓰면서 다짜고짜 외쳤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고, 요원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사이 이서호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워어어억!”
그때 유찬 형이 휘청거리더니 이서호의 옷을 쭉 잡아당겼다. 달려오던 이서호가 잡혀서 속도가 늦춰진 사이 봉재범 선배님도 이서호를 잡고 늘어졌다.
어쩐지 이서호랑 내 간격이 조금 벌어진 것 같다 싶더라니, 두 분이 나름대로 나를 엄호해주고 있었구나. 근데 왜 문은 안 열어주지?
“네 마리의 파리는…, 아!”
내가 뭘 실수했는지 깨닫고 황급히 다시 외쳤다.
“네 마리의 곤충은 사파리입니다!”
내가 답을 말하는 동시에 요원이 차단봉의 벨트를 풀어줬고, 나는 안전하게 안쪽으로 골인할 수 있었다.
“아! 좀비끼리 붙잡는 거 반칙 아니에요? 반칙!”
억울해서 한국어가 터진 이서호 좀비를 뒤로하고 서둘러 달렸다. 백팀이 금방 쫓아올 테니까 지금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간당간당한 체력을 예의 주시하면서 꼬불꼬불 길게 이어지는 사파리 버스까지 내달렸다. 마침내 나는 사파리 버스 계단 위에 그토록 찾아다녔던 백신 상자가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찾았다!”
“크허엉!”
“악!”
그때 바로 옆에서 들려온 호랑이의 포효에 깜짝 놀라, 몸을 굳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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