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어떡할까? 더 찾아볼까?”
유찬 형이 날 보면서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못 찾은 새로운 메모가 갑자기 어딘가에서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차라리 차분히 앉아서 추리를 좀 해 보고, 그래도 답이 안 나오면 그때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음. 그러면 좀 더 고민해 보자.”
나는 지도를 꺼내 바닥에 펼쳐 놓았다. 분명 룰 설명을 들었을 때는 모인 힌트가 백신이 있는 장소로 인도해준다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이 알쏭달쏭한 설명은 어떤 ‘장소’에 대한 설명이겠지.
나는 힌트를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지도를 샅샅이 들여다봤다. 각 구역의 명칭을 비롯해 놀이기구 이름까지 하나하나 짚어봤다.
“일단 거꾸로 해도 괜찮은 요일은 ‘일요일’ 같거든?”
유찬 형이 불쑥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日’자는 다른 요일과 다르게 거꾸로 써도 똑같으니까. 그럼 해결해야 하는 건 ‘흑백 일요일’이란 단어인데…….
어? 잠깐만. 이거 혹시?
나는 지도의 한 점을 가리키면서 중얼거렸다.
“흑백을 모노톤이라고 보면…….”
유찬 형은 내 손끝을 따라 지도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노레일……. 맞는 것 같은데?”
유찬 형이 얼떨떨한 얼굴로 날 보면서 끔벅거렸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면서 잠시 멍하게 있다가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모노레일로 가봐요!”
내가 외치자 강현 형이 제일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앞장설게.”
“그럼 제가 뒤 볼게요.”
“난 길 안내할게.”
유찬 형은 가운데에서 지도를 말아 쥔 채 우리를 봤다. 우리끼리 모이니까 일이 착착 진행되는 느낌인걸.
“가자.”
강현 형은 미니 정원 밖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깥에 좀비가 없는 걸 확인하자 유찬 형이 바로 오른쪽 계단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방향을 지정해줬다. 우리는 일렬로 쪼르륵 서서 좀비를 피해 무사히 모노레일 근처에 도착했다.
다른 어트랙션과 똑같이 탑승장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어서, 주변을 살피던 때였다. 오밤중에 검은 양복과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탑승장 안쪽에서 나왔다.
“으악!”
유찬 형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펄쩍 뛰었다. 유찬 형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나는 진행 요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런 반응 없이 우릴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좀비가 아니라 복식을 갖춘 요원이 지키고 있으니 여기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유찬 형. 메모, 형이 가지고 있죠?”
“어어. 그거 드려볼까?”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낸 유찬 형이 남자분에게 메모를 건네주었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메모를 받아 살핀 뒤 포켓에 넣었다.
“해석 부탁드립니다.”
오! 우리가 해석한 뜻이 맞나 보다. 이제 설명은 우리 리더 형 몫이지. 나를 돌아보는 유찬 형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설명을 들은 남자는 입구를 막고 있는 차단봉의 벨트를 풀어줬다.
길이 열리자 흥분한 유찬 형이 앞장서면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유찬 형을 따라가면서 강현 형의 팔을 끄는 건 내 몫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모노레일 대기 라인을 따라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
“백신은 없고…….”
유찬 형은 조금 허망하게 웃으면서 찢어진 노트를 주워 들었다. 누가 봐도 소품으로 보이는 노트는 모노레일 탑승구 밑에 떨어져 있었다.
“노트만 있네.”
노트를 탁탁 털어낸 뒤 휘적휘적 넘겨보던 유찬 형이 나와 강현 형에게 한 페이지를 보여줬다.
“다음 힌트는 급행목이래.”
이게 나무를 뜻하는 건 아니겠지? 언뜻 생각하면 ‘급행목’이라는 나무를 찾아야 할 것 같지만, 앞선 힌트를 생각해보면 그런 단순한 힌트는 아닐 것 같았다. 이것도 뭔가 영문이나 한자를…….
“이거 W익스프레스 같아.”
지도를 보던 유찬 형이 대뜸 말했다.
“아. 급행!”
“응. W가 우드의 W거든. W익스프레스 레일을 나무로 만들었으니까.”
“맞는 것 같아요!”
활짝 웃으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W익스프레스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놀렸다. 조심히 다니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가야 하는 바람에 결국 좀비 무리에 쫓기고 말았다.
“아아악! 악! 징그러워! 오지 마요! 악!”
기함한 유찬 형이 나와 강현 형을 막무가내로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유도된 길이라서 그런지 좀비가 유독 많은 것 같았다. 심지어 넓게 뚫린 길이 내내 이어져서 숨어서 쉴 곳도 마땅치 않았다. 누가 런&런 아니랄까 봐 이렇게까지 뛰게 만들다니…….
“헉, 헉, 흐으…….”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괴로운 건 나뿐인가. 두 형들은 여전히 잘 뛰고 있는데 나 혼자만 과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뚝뚝 떨어지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뒤를 훔쳐봤다. 속도를 늦추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 어디든 들어가서 숨을 만한 곳이…….
“하온아, 이쪽으로.”
강현 형이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금 너무 힘들어서 뭔가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무작정 강현 형의 등만 보고 뛰었다. 이제 더는 못 뛰어,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커다란 공연장이 보였다.
“하온이 더 뛸 수 있어?”
“헉, 허억, 네, 뛰어, 볼게요.”
“공연장 간판 뒤쪽으로 숨어.”
강현 형은 유찬 형에게 나를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런 형을 힐끔 바라본 유찬 형은 입술을 꾹 여물고 내 팔을 잡았다.
“……강현아, 너의 희생 잊지 않을게!”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친 유찬 형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데리고 뛰었다. 설마 강현 형이 좀비한테 잡힐 리가…….
강현 형이 신경 쓰여서 속도가 느려지자 유찬 형이 날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봤다. 많이 힘드냐고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다리에 힘을 줬다. 우리가 먼저 시야에서 벗어나야 강현 형이 좀비를 따돌리고 올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서두르는 게 맞았다.
가까스로 공연장 간판까지 전력 질주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었다. 유찬 형은 날 내려보다가 각오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좀비 있는지 확인할게.”
조도가 낮은 곳에서도 희게 질린 얼굴과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보니 형이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신 뒤 몸을 일으켰다.
“하온이는 앉아있어.”
“형, 하아, 후우……. 무섭잖아요.”
“괜찮아.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형은 내 어깨를 꾹 눌러 주저앉히면서 입꼬리를 바짝 당겨 올렸다.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가 형의 긴장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저런 형을 혼자 보낼 순 없지.
“하온아. 형 믿고 쉬자. 응?”
유찬 형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간절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진지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움직이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좀비가 있다면 벌써 덤볐을 테니 괜찮겠지.
유찬 형은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첩보 작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 신중히 움직였다. 너무 신중해서 진행이 더디긴 했지만.
만약 진짜 좀비 사태가 터졌다면 우리 유찬 형…… 벌써 좀비 밥이 됐겠는걸. 아, 맞다. 이미 한 번 잡혔다고 했었지. 유찬 형을 눈으로 좇으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공연장 끝까지 다다른 유찬 형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왁!”
유찬 형이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몇 걸음 물렸다. 설마 좀비가 있었어? 깜짝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유찬 형이 흐느적거리면서 주저앉았다.
“강현아아……. 놀랐잖아!”
“미, 미안.”
강현 형은 유찬 형의 양 팔을 붙잡은 채 멀뚱거렸다. 역시 우리 강현 형이 좀비한테 잡힐 리 없지!
“형!”
“하온이 좀 괜찮아?”
강현 형은 다리가 풀린 유찬 형을 데리고 내 옆으로 오면서 물었다. 그새 컨디션이 꽤 좋아진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쉴게요.”
“……나도 지금 다리 풀렸어.”
유찬 형은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채 허벅지를 주물럭거렸다.
“카메라 감독님은 어디에다 두고 혼자 온 거야?”
“……뛰다 보니까 안 계시던데.”
유찬 형이 한숨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 감독님이 없어서 좀비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면서. 좀비만 따돌린 게 아니라 감독님까지 따돌렸네.
***
W익스프레스 입구가 코앞에 보였다. 우리는 거대한 목조 구조물을 향해 돌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는 이서호 좀비와 마주쳐 버렸다.
“우와아아악!”
우렁차게 포효하는 이서호가 미친 듯이 우릴 쫓아왔다. 좀비라면 좀 절뚝거려야 하는 거 아니야? 이서호는 규칙 따윈 머리에 없다는 듯 엄폐물에 숨어도 우리를 귀신같이 찾아내서 쫓아왔다. 이서호에게 이게 맞냐고 항의해도 들은 척도 안 했다.
미치겠네. 숨차서 더는 못 뛸 것 같아.
이서호는 유독 나만 노리고 쫓아왔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져 조금씩 속도가 늦춰졌다. 그 탓에 금방이라도 이서호에게 잡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겨우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백강현! 하온이 데리고 가!”
갑자기 유찬 형이 소리 지르더니 이서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놀란 이서호가 “유찬 형!”하고 소리 지르면서 유찬 형을 받아들었다.
“악! 이서호, 얼굴 치워! 징그러!”
“내 얼굴이 왜!”
“너 좀비잖아아악!”
“아, 맞다.”
이로써 이서호는 자신이 좀비라는 걸 잊어버리고 술래잡기하듯 우리를 쫓아왔다는 게 사실로 확정되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뒤로하고 나와 강현 형은 W익스프레스를 향해 계속 뛰었다. 유찬 형의 긴 비명이 들려서 힐끔 돌아보니 좀비들에게 번쩍 들린 채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 박유찬 아웃, 박유찬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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