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어떻게 알았지? 설마 나 또 메모 계속 쳐다봤나? 아닌데. 일부러 안 보려고 노력했는데?
“푸흡!”
갑자기 정이한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앞에서 메모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우리 하온이는 솔직해서 표정이 다 읽혀.”
“저 그렇게 단순한 사람 아니거든요…….”
나는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렸다가 벌새처럼 날렵하게 메모로 손을 뻗었다.
“어딜!”
아, 정이한 의외로 민첩하네. 우리 그룹 최장신인 정이한이 천장 쪽으로 팔을 쭉 뻗으니 내 손은 도무지 닿을 길이 없었다. 정이한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고 깡충깡충 뛸 때마다, 정이한은 팔을 뒤로 뻗어 피해버렸다.
“아! 너무해요!”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설마 여기에 메모가 하나뿐이겠어? 다른 걸 찾는다.
“하온아, 어디 가?”
“메모 찾으러요!”
“이거 줄게.”
“…….”
정이한의 제안은 솔깃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기에는 영 의심쩍었다. 나는 눈매를 좁히면서 뒤를 돌았다.
“왜요?”
“응? 이거 하온이도 많을걸? 나 이거랑 같은 것만 네 장짼데…….”
정이한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메모를 꺼내 보여줬다. 메모에는 전부 [요일?]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여기 오면 다른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하온이도 그런 거 아니야?”
……정이한은 어디 가서 뒤통수 맞고 와도 아픈 줄도 모를 것 같다고 언젠가 생각했었는데, 왜 지금 그 생각이 또 나는 걸까.
“아, 뭐예요. 그거였어요? 전 또 다른 건 줄 알았네.”
“푸흐흐. 놀려서 미안. 필사적인 게 귀여워서 그랬지.”
“별게 다 귀엽네요.”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내밀었다. 정이한이 내 손바닥을 멀뚱거리면서 쳐다보길래 “줘요. 가는 길에 버려줄 테니까.”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야. 내가 버릴게.”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버려야 해요.”
나는 정이한의 손에서 메모를 잡아채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걸로 세 개 모았다. 괜찮은, 흑백, 요일. 아직도 뭔 뜻인지 잘 모르겠어. 쪽지가 몇 장인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더 찾으라는 거야?
나와 정이한은 혹시 다른 메모가 있을지도 모르니 귀신의 집을 더 수색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추가로 찾은 메모는 내가 갖고 있는 메모의 단어들과 동일했다. ‘요일?’ 메모는 정이한에게서 뺏은 게 전부였는데, 그 와중에 정이한은 ‘요일?’ 메모만 2장이나 더 찾아냈다. 요일 귀신이 붙었나.
“헉!”
갑자기 숨을 들이켠 정이한이 뒤에서 조용히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접근해서 어깨 너머로 엿보니, ‘흑백’ 쪽지를 주운 것 같았다. 내 인기척을 느낀 정이한이 날 경계하며 뒤를 돌아봤다. 나는 모르는 척 눈꼬리를 사르륵 접어 웃었다.
“귀신의 집에선 다 찾은 것 같죠?”
“……어, 어어. 그러네.”
어느새 출구가 코앞에 다다랐다. 우리의 뒤로는 귀신분들이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원래 귀신의 집 귀신들은 잠깐 사람을 놀라게 하고 사라지지만, 게임 룰이 추가된 탓인지 이 귀신분들은 끝까지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 우리 때문에 재미없겠다…….
제작진이 바라는 그림도 이게 아니었을 텐데, 하필이면 나랑 정이한이 여길 왔네. 하지만 중요한 건 게임이니까! 우리는 귀신들에게 인사한 뒤 출구 밖을 살폈다. 혹시라도 좀비가 있을 걸 대비하고 잔뜩 경계했으나 환하게 켜진 가로등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슬슬 회전목마 쪽으로 가볼까.
“형, 저는 저쪽으로 갈게요.”
“으응. 나는 그쪽은 봐서…….”
정이한은 헤어지는 게 아쉬운 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게 좀 귀여워 보여서 이따 보자고 손을 흔들었다. 내게 손을 마주 흔들어주는 정이한을 뒤로하고 회전목마로 향했다.
***
회전목마 근처는 휑하기만 했다. 좀비가 없는 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우리 팀 사람도 없다는 거였다. 내가 좀 일찍 온 건가. 회전목마 근처를 기웃거리면서 또 다른 메모가 없나 찾아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중 한 비명 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비명의 주인공이 좀비를 잔뜩 끌고 올 것을 대비해 근처에 있는 작은 스토어 뒤에 몸을 숨겼다. 우리 팀이면 도와주고, 백팀이면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유찬 형!”
나는 밖으로 튀어 나가면서 울상을 짓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유찬 형을 불렀다. 형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하온아아아!”하고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 뒤로 못해도 스물은 넘을 듯한 좀비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헉! 유찬 형, 빨리 이쪽으로 와요! 빨리!”
도대체 어디서부터 모은 거야? 얼마나 쫓겨 다녔는지 형의 얼굴은 땀 범벅이었다. 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그게 너무 느려서 좀비에게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기다릴 게 아니라 데리러 가야겠어. 나는 좀비를 향해 뛰는 기이한 경험을 하면서 유찬 형에게 손을 뻗었다. 형은 거칠게 헐떡거리면서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형, 조금만 더 뛸 수 있어요? 좀비 따돌릴게요.”
“헉, 허억. 따, 돌릴, 헉, 수 있어?”
“그럼요. 저만 믿고 조금만 더 힘내요.”
유찬 형은 헐떡거리면서도 “응!”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나는 오는 길에 봐 둔 미니 정원으로 유찬 형을 데리고 갔다. 내부에 좀비도 없었으니 문만 닫으면 요새나 마찬가지였다.
“형, 들어가요! 빨리!”
“뭐, 뭐? 저런 데 들어가면 잡히는 거 아냐? 퇴로가 없어 보이는데!”
“괜찮으니까 얼른.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유찬 형은 좀비에게 잡히는 게 불안한지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그워러어어억…….”
저런 소리는 어떻게 내는 거야……. 저분들 성대 괜찮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유찬 형을 채근했다.
“아악! 알았어! 믿는다, 하온아!”
형이 미니 정원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나도 뒤를 따라 들어가 곧장 문을 닫아버렸다. 미니 정원은 거대한 나무들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어서 밖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헉, 허억, 되, 된 거야?”
“네. 이제 기다리면 좀비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유찬 형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흠뻑 젖은 셔츠를 펄럭거렸다.
“아으으……. 좀비 너무 싫어. 징그러워…….”
유찬 형이 벽에 기대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테라피 좀 해달라는 뜻에 얌전히 품에 안겨줬더니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 살 것 같다.”
- 봉재범 아웃. 봉재범 아웃.
“어?”
“헐…….”
“우리 A 카드 3장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벌써 아웃이라고? 깜짝 놀라서 눈을 끔벅거리자 유찬 형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형의 반응을 보니 못해도 하나 정도는 썼나 보다.
“내, 내가 한 장…….”
“그럼 재범 선배님이 두 장 쓰셨나 봐요.”
솔직히 강현 형이 잡힐 것 같진 않아. 형의 체력을 따라잡을 좀비는 없을걸.
“하온이는 안 썼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파악한 좀비의 특성에 관해 설명해줬다. 내 설명을 들은 형은 입을 떡 벌리면서 그런 걸 알아낼 생각도 못 했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요령껏 피해 다니면 돼요.”
“그래도 메모는 몇 장 찾았어.”
유찬 형이 주머니에서 찾아온 메모를 꺼내 들었다. 형은 ‘괜찮은’과 ‘요일?’ 메모를 중복으로 주워 왔다. 형이 가져올 줄 알았으면 정이한 속이지 말걸…….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인 걸 어쩌겠어.
그보다 중요한 건 힌트의 답이었다. 문제는 형이 가져온 메모들이 이미 내게도 있는 메모들이라는 거다. 우리는 일단 세 장의 메모를 보며 고민했지만, 역시 답을 알 순 없었다.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느낌인데.”
“그렇죠?”
이대로 계속 여기에 숨어 있을 순 없으니 다시 회전목마로 돌아가기로 했다. 회전목마는 여전히 조용했는데, 조금 기다렸더니 강현 형이 홀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강현 형!”
강현 형은 우리를 보자마자 빠르게 달려왔다.
“유찬 형! 하온아!”
저렇게 반가워하는 강현 형은 처음 본다. 형도 좀비가 싫었나 봐.
- 이서호 아웃. 이서호 아웃.
아, 이서호 탈락했다.
“서호가 우리 중에선 1등으로 탈락했네.”
“그러게요.”
나는 헤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나중에 이서호를 잔뜩 놀려 줄 생각을 하니 벌써 신나는걸.
“아, 강현 형은 메모 뭐 찾았어요?”
강현 형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내게 매모를 꺼내 보여줬다. 처음 보는 ‘거꾸로 해도’라는 메모가 두 개, 그리고 나머지는 내게도 있는 중복 메모뿐이었다.
“정원 가서 고민해 보자.”
“아, 그럴까요?”
“정원?”
“네. 있어요. 안전 캠프 같은 곳.”
나는 형들을 데리고 미니 정원으로 돌아갔다. 문단속을 확실히 한 뒤 바닥에 주저앉아서 우리가 얻은 쪽지를 주르륵 나열했다.
[괜찮은] [흑백] [요일은?] [거꾸로 해도]
일단 네 가지인데. 각자 흩어져서 찾았는데도 새로운 메모가 없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운이 지독하게 없었다거나, 네 장이 메모의 전부거나.
“일단 ‘요일은?’은 종결어미니까 끝에 놓자.”
유찬 형은 ‘요일은?’ 메모를 맨 뒤에 빼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거꾸로 해도’를 제일 앞으로 뺐다.
“……‘흑백’이랑 ‘괜찮은’이 앞으로 오면 제대로 된 문장이 안 나오거든?”
“하나 밖에 안 나오는 것 같아요. ‘거꾸로 해도 괜찮은 흑백 요일은?’이요.”
“다른 메모가 더 없다면 이게 맞겠지만……. 감이 안 잡혀.”
유찬 형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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