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우리가 틀어지면 하온이가 슬퍼한다는 말은 박유찬에게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 혼자서 쓰린 가슴을 움켜쥐고 있을지언정, 폭주할지도 모를 감정의 억제가 되어줄 것 같았다. 진하온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행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물어본 거야. 선택받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아…….”
그러고 보니 첫 질문이 그랬었다. 박유찬은 연달아 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완전히 잊고 있던 질문을 떠올렸다.
“만약, 괜찮지 않다고 대답했으면 어떡하려고?”
백강현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같이 포기하자고 설득했겠지.”
“……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잠시 굳어 있던 박유찬은 결국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룹과 진하온을 위해서였다.
“너는 포기할 수 있어?”
“난 티 안 나잖아.”
저 말이,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실제 마음과 달리 티는 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런 박유찬을 바라보면서 백강현은 설핏 웃었다.
“형도 티 내지 마. 평소처럼 굴어.”
“……그게 돼야 말이지.”
박유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얕게 신음했다.
“이게 말이야, 강현아.”
고개를 번쩍 든 박유찬의 눈이 빛을 반사하듯 반짝였다.
“내 마음을 알고 나니 하온이가 너무 사랑스러운 거야. 아, 물론 원래도 사랑스러워서 보기만 해도 흐뭇했는데 이제는 막 가슴이 쿵쾅거려서 죽겠는 거지. 오늘도 훔쳐보다가 눈 마주쳐서 사레들렸잖아? 그런데 하온이가 다정하게 등 쓰다듬어 주는데……. 아, 사레들리길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박유찬은 막혀있던 수도관이 터진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가슴 속에 조심스럽게 품고 있던 감정이, 룸메이트를 표방한 동지 앞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박유찬은 진하온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처음에는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들어주던 백강현도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원래 아는 내용을 반복해서 들으면 지겹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진하온의 사랑스러움은 타인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박유찬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만히 들어주던 백강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형, 나 이제 잘 건데.”
“조금만 더 들어주라. 응?”
“…….”
백강현은 자신이 춤에 관해 설명할 때, 박유찬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예능 프로그램 <런&런> 촬영을 위해 오프닝 장소인 네버랜드로 가는 중이었다. 예전에 <팀팀> 촬영이 끝난 뒤 봉재범 선배님께서 게스트로 추천해주신다고 하셨었는데, 정말 런&런에 출연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심지어 타이밍이 무척 좋았다. 이번 촬영은 여름 특집으로 기획되었는데, 방영 시기와 우리의 컴백 날짜가 정확히 한 달 뒤로 겹쳤다.
국민 예능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청률이 좋은 예능이라, 신곡 홍보와 함께 우리를 더욱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소파남과 얽힌 일련의 일들 덕분에 메인 미션 경험치가 40%를 넘어섰다. 잘하면 12월까지 갈 필요도 없이 메인 미션을 완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한 몸 불살라 상태 이상 터지기 직전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의지를 다잡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 형이 촬영장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오프닝 장소에 도착하니 봉재범 선배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은 푸근한 미소와 함께 우리를 환영해줬다.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으셨고, 시원한 커피도 권유하셨다. 선배님 곁에 옹기종기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분이 웃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매니저 형이 곧장 ‘서장수 피디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남자분이 누군지 파악한 우리도 매니저 형을 따라 폴더 인사로 예의를 갖췄다.
“디아스 매니저 박정곤입니다. 섭외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눈치껏 매니저 형의 말을 복창하면서 한 번 더 꾸벅 인사했다. 피디님이 우리를 흐뭇하게 보시면서 손사래를 치셨다.
“어이고, 저야말로 게스트로 출연해 주셔서 감사하죠. 디아스 라이징 스타잖아요.”
서 피디님이 활짝 웃으면서 매니저 형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피디님과 인사를 마무리하고, 봉재범 선배님과 대화하는 사이 다른 런&런 고정 출연자인 백건 선배님이 도착했다. 선배님은 대뜸 나를 보면서 환히 웃었다.
“오, 루비 소년이구나!”
……이거 오랜만에 듣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선배님께 인사했다. 백건 선배님은 2세대 아이돌 그룹인 콜드블루의 막내 멤버였다. 내가 SR 오디션 볼 때 부른 ‘유앤아이’가 바로 콜드블루의 곡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할 말이 딱히 없어, 아무 생각 없이 오디션 때 이야기를 했다가 ‘유앤아이’ 를 불러달라는 선배님의 요청에 난데없이 오프닝 전부터 노래를 불러야 했다.
심지어 도중에 안무가 기억났다면서 나와 함께 가볍게 합을 맞춰주셨는데, 그걸 본 피디님이 오프닝 때 꼭 한 번 더 해달라고 요구하셨다. 나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물론이죠!”하고 호기롭게 대답했다.
***
워터파크에 걸맞게 우리는 모두 수영복으로 환복했다. 검은색 레깅스형 수영복을 입고, 그 위에 반바지를 걸쳐 입었다. 기장이 조금 긴 셔츠로 마무리한 뒤 카메라 뒤에서 우리를 불러줄 때까지 대기했다.
공중파의 인기 예능이라서 그런지 장소를 통째로 빌린 모양이었다. 탁 트인 오프닝 장소에는 스태프 이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예능 <런&런>은 방송 타이틀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달려야 하는 예능이었다. 오전 게임으로 어드벤티지 카드를 모으고, 그 카드는 저녁에 진행되는 본 게임에서 다양한 요소로 사용되곤 했다.
오프닝이 끝난 뒤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됐다. 첫 경기는 팀을 정하는 경기였는데, 디아스 멤버가 개인적으로 경기를 진행하여 2등부터 팀을 고를 수 있게 된다.
1등은 가장 마지막에 고르게 되는데, 3 vs 3 상황이므로 1등이 속하는 팀은 네 명이 되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봉재범 선배님은 설명을 마친 뒤 곧바로 경기를 진행 시켰다.
“첫 번째 게임입니다! 부표 밀어내기! 앞에 네모난 부표가 보이시죠? 마지막까지 버티면 1등입니다!”
“네!”
수중 안전 스태프들이 부표를 풀장 가까이 옮겨왔다. 이서호가 제일 먼저 폴짝 올라갔는데, 부표에 발을 딛기 무섭게 미끄러졌다.
“악!”
주르륵 미끄러진 이서호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버둥거리다가 풀장에 입수했다. 입수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시작부터 몸 개그를 확실하게 보여준 이서호가 내심 자랑스러웠다.
“푸하!”
물을 잔뜩 먹고 벌떡 일어난 이서호가 얼굴을 문질렀다. 이서호는 깔깔거리면서 웃는 우리를 한 번 째려본 뒤 다시 부표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푸흐흡, 서호 형. 뭐해?”
“올라가야지!”
“풀장 밖으로 나오면 되잖아.”
몸소 부표가 미끄럽다는 걸 알려준 이서호를 위해 조언해줬다. 이서호는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움찔거렸다가 “나, 나도 알거든?” 하면서 물살을 헤쳤다.
이서호가 풀장 밖으로 나오는 사이, 이번에는 강현 형이 부표 위로 올라갔다. 형의 뒤를 따라 나도 조심스럽게 부표로 올라갔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쩍벌남이 될 판이었다.
이서호가 왜 부표 위에서 버둥거렸는지 알겠어! 균형을 잡기 위해 본능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파닥거릴 때였다. 팔이 확 잡아당겨지더니 단단한 기둥을 만난 것처럼 몸이 꼿꼿이 섰다.
강현 형이 내 어깨를 붙잡아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역시 진천의 아들! 진천이 놓친 보물!
“……형, 안 미끄러워요?”
“종아리에 힘주면 돼.”
1등은 백강현. 지금 막 결론 났다. 우리는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부표는 풀 중앙으로 배달되었고, 가운데에 도착하자마자 예고도 없이 “경기 시작!” 이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철퍽 엎드려버렸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최대한 바닥과 닿는 면적을 넓혀서 버티려는 전략이었다.
좋아, 다 덤벼! 아니, 진짜 다는 곤란하고 한 명 정도면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꼴등은 피하고자 나는 턱을 높게 치켜들고 형들의 동태를 살폈다.
“으랴아아아! 간드아!”
이서호가 우랑차게 기합을 넣으면서 달렸다. 목표는 무려 강현 형이었다. 강현 형은 제 자리에서 이서호를 받아 낸 뒤 가볍게 몸을 틀어서 이서호를 물에 던져버렸다.
“아악!”
“서호야! 시작하자마자 빠지면 어떡하냐!”
봉재범 선배님이 껄껄 웃으시면서 외쳤다. 백건 선배님의 예상 1위 픽은 강현 형인지, 형에게 같은 백씨라는 걸 어필하고 있었다.
강현 형의 반대편에서는 유찬 형과 정이한이 몸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상대를 떨어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강현 형은 조용히 관전만 하고 있었고, 나는 바닥에 엎드린 게 무색하리만치 모두의 관심 밖이었다.
……민망하네.
그냥 일어나면 더 민망할 것 같아서 슬금슬금 포복 전진했다. 강현 형은 셋이서 덤벼도 못 이길 테니까 유찬 형과 정이한을 동시에 교란할 생각이었다.
목표는 2등! 두 사람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하는데, 갑자기 발목이 붙잡혔다.
“밟혀.”
강현 형이 나를 주르륵 끌어당겼다. 이대로 물에 처박힐 각오를 했는데, 형은 날 원래 위치로 끌어다 놓았을 뿐이었다. 이거 그건가? 고양이가 쥐 가지고 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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