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감정을 알기 어려울 만큼 높낮이가 없는 물음이었지만, 묘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박유찬은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올렸다. 삐걱거리면서 고개를 돌리자 묵묵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 당연히 좋아하지. 너랑 이한이, 서호도.”
혹시 제 태도에서 티가 난 건 아닐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때려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들고 있던 패드를 내려놓은 백강현이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며 걸터앉았다.
“그런 거 말고.”
“……그럼 뭔데?”
백강현은 시선을 내리깔고 작게 한숨 쉰 뒤 다시 박유찬을 응시했다.
“형, 티나. 이한 형만큼은 아니지만.”
“어? 뭐? 이한이? 여기서 이한이가 왜 나와?”
아무것도 몰랐던 박유찬이 눈을 홉 떴다가, 이내 의미를 파악한 뒤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이한이가 하온이를 좋아한다고? 그, 그러니까 여, 연애 감정으로?”
“어. 형처럼.”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고 소리치려던 박유찬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 그런 게 아니라는 부정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온이를 그런 감정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이 말 한마디면 되는데.
대답을 기다리던 백강현은 여상한 어투로 툭 내뱉었다.
“나도 똑같아.”
“……어?”
스스로 이해력이 좋다고 생각했던 박유찬이지만, 지금만큼은 곧바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으로는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나랑 강현이 이한이가 전부 하온이를 좋아한다고?’
두 사람에 대한 경계와 함께 그룹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이럴 때 그룹의 리더로서 제 감정을 잘라내고, 멤버들도 포기시켜야 하는 게 옳았다. 남자 아이돌 그룹이 내부 치정 문제 때문에 삐걱거린다는 건 어디에도 상담할 수 없는 내용이니까.
‘……그러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접어야 하는데.’
솔선수범 없는 설득이 통할 리 없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어떻게 접어?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으나, 오랜 기간 진하온과 함께 해 오면서 서서히 키워온 감정이었다.
이제야 막, 진하온이 왜 제게 유달리 애틋한지 깨달았는데, 그걸 접어야 한다고? 하지만 박유찬에게 꿈은 진하온 만큼이나 중요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박유찬은 헛숨을 흘렸다.
‘하온이만큼 내 꿈도 중요해…….’
항상 제게 가장 중요한 건, 꿈이었다. 인생의 최우선 과제였고, 가장 뚜렷하고 오래된 목표였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꿈과 진하온을 동급에 올린 뒤 저울을 재고 있었다.
‘정말 접을 수 있겠냐, 박유찬.’
“내가 묻고 싶은 건.”
생각을 비집고 들어온 목소리에 박유찬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하온이가 형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괜찮은지야.”
“……아.”
“나는 그럴 수 있어.”
백강현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으로 박유찬을 보고 있었다. 일종의 신념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선택하더라도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분명한 각오.
“난…….”
박유찬은 제 발끝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 진하온과 감정적으로 부딪혔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상처는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리고, 다른 사람을 먼저 위하는 태도가 그때는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착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종종 인터넷에 제 이름을 서칭하는 박유찬은 누군가의 날 선 감정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손가락 끝의 칼날과 마주친 순간에는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미세하게 쪼개져 마음 깊숙이 박힌 조각들은 때때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자신을 괴롭혔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런 상황에 의연해지고, 초연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던 걸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사실에 박유찬은 혼자 가슴을 쥐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손 내밀어 줄 수 있었던 건…….
박유찬의 시선이 진하온에게 받은 캔들로 향했다.
‘하온이 다운 선물이었지.’
이따금 뒤척이는 밤이 온다는 걸 알고 선물한 걸까. 하온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답이 너무 명확했으니까.
“하온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편안하게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이 생기길 바랐다.
‘그게 나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품에서 쉬고 있는 하온이를 보면, 이제 됐구나. 너는 괜찮겠구나, 싶어서 안심될 것 같았다.
「그럼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는 거네요. 그게 더 좋다.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가끔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기대어 준다면 박유찬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다고 쉽게 양보할 생각은 없지만.
“이왕이면 나였으면 좋겠고.”
“그럼 됐어.”
백강현이 어슴푸레한 미소를 지었다.
“넌? 넌 어떻게 알았어?”
“나는 무인도 리얼리티 촬영할 때.”
박유찬이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그렇게 빨리?”하고 되물었다. 백강현은 편안하게 침대에 몸을 눕히면서 대꾸했다.
“어. 아마 이한 형도 그때일걸.”
“어떻게 알았는데?”
“나? 이한 형?”
“……둘 다?”
백강현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입술을 매만진 뒤 천천히 운을 뗐다.
“이한 형이 자작곡 선물한 거 알지?”
“응.”
“하온이가 나한테 그 곡이 얼마나 좋은지 쫑알거리더라고. 그게 좀 울컥하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선물 받은 걸 왜 나한테 자랑하는가 싶어서.”
백강현은 그 좁쌀 같은 마음이 뭔지 당혹스러웠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이게, 사고가 다른 쪽으로 튀더라. 나도 선물을 주면 저렇게 좋아해 줄까, 하고.”
그래서 충동적으로 「나도 선물해 줘야겠네.」 하고 중얼거렸었다. 다행히 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백강현은 하온이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큰 의미로 남을지 계속 고민했다. 안무 창작할 때만큼이나 진지한 제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었다.
지나온 삶에서 온전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건 오직 춤밖에 없었다. 그런데 같은 팀의 동생에게, 마찬가지로 같은 팀의 형이 준 선물보다 의미있는 선물을 주고 싶어서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건 정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알았지. 평범한 마음이 아니라는 걸.”
백강현은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으로 턱을 받쳤다. 하지만 자작곡에 필적할 만한 무언가를 찾기가 어려웠다. 처음으로 춤 말고 다른 것도 좀 해볼걸, 하는 후회를 했으니까.
“그, 내가 묻기는 좀 그렇지만…….”
그런 백강현을 빤히 보던 박유찬이 주저하면서 룸메이트의 눈치를 살폈다. 감정에 휩쓸리다가 놓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우린 남자잖아…….”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태도에 순간적으로 이건 아무 문제가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넌 상관없어? 하온이도 남자인데…….”
여자 좋아하지 않을까, 라는 말은 짓씹어 삼켰다. 아이돌로서 여자와 연애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왠지 꺼림칙했다.
“하온이가 남자라서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거부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어.”
박유찬은 자신의 질문과 다른 대답이 나와서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제 질문이 다르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충분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한 형은 뭐, 고백했다가 차인 것 같던데.”
“……뭐?”
튀어나올 듯한 눈을 한 박유찬이 놀라서 되물었다. 정이한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분위기가 달라졌거든. 하온이를 보는 이한 형도, 그런 형을 대하는 하온이의 태도도. 최근엔 괜찮은데 한참 삐걱거렸어.”
“아니, 도대체 언제. 나는 왜 하나도 몰랐지? 전혀 눈치 못 챘어…….”
박유찬이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디아스가 언제 이렇게 된 거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한이와 강현이도 하온이를 좋아할 만큼 그 애가 매력 있다는 말로 들렸다. 말 그대로 성별까지 초월할 만큼. 그러니 자신이 하온이에게 품은 마음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너는? 너도 고백할 거야? 그 선물인지 뭔지 주면서?”
“모르겠어.”
언제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움직였던 백강현이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정이한이 선수친 마당에 저까지 고백해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 마음도 정이한과 같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온이는 말하기 전까진 모를 테니까.’
하온이는 평소에는 눈치가 빠른 듯한데, 유독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무척 둔하게 굴었다. 그래도 제법 티를 낸 것 같은데……. 부족했나.
“으아아……. 잠깐, 설마 서호는? 서호는 아니지?”
“서호는 글쎄.”
백강현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면서 두 사람을 떠올렸다. 어떨 때 보면 좋아하는 것 같은데, 또 어떨 때 보면 그냥 평범하게 투닥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계기가 있으면 바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역시 잘 모르겠단 말이지.’
백강현의 생각을 모르는 박유찬은 조금 안도했다. 그나마 이서호라도 이 전쟁에서 빠졌다는 게 어디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 멤버가 자각했는데, 이서호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멤버들에게 사랑받는 진하온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이서호까지 진하온을 좋아하게 된다면…….
“우리 다 틀어지면 어떡하지…….”
애정 문제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남자, 멤버 간 치정, 심지어 모두가 한 명을 좋아한다면 당연히 지금처럼 지내기 힘들 게 뻔했다.
진하온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아서 밸런스가 유지될 수 있다 치더라도, 만약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저 또한 ‘내가 아니어도 돼.’라고 말했지만, 그건 막연하게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만약 그게 내가 아닌 다른 멤버라면 그때도 의연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하온이가 슬퍼할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불쑥 끼어 들어온 말에 박유찬은 잠깐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틀어지면 하온이가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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