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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175화 (175/320)

175.

모든 일이 정리되고 며칠이 지난 시점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기대어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휴대폰 화면 안에는 합의금 입금 내역이 떠 있었다.

“헉.”

1, 1억? 1억이라고? 합의금이 이렇게 많아…?

화들짝 놀라서 눈만 끔벅거리자 정이한이 무슨 일인지 물어왔다. 합의금으로 1억이나 받았다고 털어놓았는데 내 예상과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당연히 같이 놀랄 줄 알았는데 심드렁해 보였다.

“하온이 고생한 거에 비하면 껌값이네.”

어느 집 껌이 그렇게 비싼데?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는 계획한 대로 합의금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뭐 찾아?”

정이한이 기웃거리면서 물었다.

“기부하려고요.”

“기부? 합의금?”

“네.”

나한테는 쓸모없고 기분 나쁜 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할 수 있으니까. 이서호가 돈은 죄가 없다고 외친 덕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온이 다운 생각이네.”

정이한이 설핏 웃으면서 말했다. 동시에 정이한은 기부처를 함께 찾아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나는 조심스레 거절했다.

“마음이 가는 곳은 있어요.”

나는 이미 어린이재단의 저소득층 환아지원사업을 눈여겨 봐 두었다. 내게는 어린 시절의 빛바랜 추억조차 하나 없었다. 그렇기에 부모가 포기하지 않은 아이들을, 건강하게 회복하면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아이들을 후원하기로 결심했다. 이 돈이 아이들에게 미래를 준다면, 내게도 가치 있는 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소득층 환아지원사업?”

“네. 제게는 달갑지 않은 돈이, 어떤 아이들의 부모님에게는 희망일 수 있잖아요. 그게 제일 좋은 해답 같아요.”

정이한은 나를 기특하게 보다가 싱그럽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형, 문제가 있어요.”

“뭔데?”

나는 울상을 지으면서 은행 어플을 보여줬다.

“1억 이체가 안 돼요…….”

이체 한도 초과로 인해 내 계획이 무너졌다. 정이한은 그런 날 멀뚱멀뚱 보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이건 은행을 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당분간 외출은 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은행 가면 되지. 같이 가 줄게.”

“……알았어요.”

내일 매니저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이번에 마음고생 시킨 우리 디어리한테 미안해서라도 ‘디어리’ 이름으로 기부할 생각이었다.

꾸물거리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더니 정이한이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쪽.

또 내 이마에 뽀뽀했다. 깜짝 놀라서 한 손으로 이마를 턱 덮으면서 외쳤다.

“악! 혀엉!”

“미안, 오늘따라 하온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못 참겠네.”

정이한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사과한 뒤 잽싸게 도망치듯 방 불을 꺼 버렸다. 그리고는 침대에 올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영을 게슴츠레 노려보다가 나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아, 진짜. 잊을 만하면 훅 치고 들어오는데 뭐 있어. 정이한 선수 아니냐고.

괜히 뜨끈해진 이마를 손등으로 마구 비비적거리다가 이불을 그러모아 얼굴을 묻어버렸다.

***

조용히 하고 싶었던 나의 기부는…….

부끄러울 정도로 대문짝만한 기사가 났다. 이게 전부 매니저 형한테 은행 같이 가자고 말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은밀하고 신속하게 기부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디어리 이름으로 기부한 걸 디어리가 모르지 않겠냐는 말에 설득당했다. 디어리를 위한 일인데 그들이 모르면 말이 안 되지…….

결국 기부는 공식 스케줄이 되어 버렸다. 나 혼자 서기에는 영 부끄러워, 멤버들과 함께하겠다고 빡빡 우긴 탓에 모두 함께 기부금 전달식을 할 수 있었다.

연신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방긋방긋 웃고 지친 마음으로 돌아온 게 며칠 전이었다. 덕분에 디아스의 연관 검색어가 ‘디어리, 기부’로 바뀌었다.

“야야, 진하온. 우리 디어리가 우리 이름으로 또 기부했대!”

이서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내게 뉴스 소식을 알렸다. 한참 컴백 연습에 집중하다가 쉬던 중에 접한 소식에 깜짝 놀라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아이돌의 선한 영향력, 디아스 팬덤으로 이어지는 기부 행렬]

[디아스 팬덤 디어리, 이번엔 ‘디아스’로 기부

- 사랑를 잇는 희망의 선순환]

……헐. 우리 디어리가!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 마음씨 착한 아이돌에 팬들이네요^^ 오랜만에 힐링 기사에 마음 촉촉해져서 갑니다.

─ 보여주기 퍼포먼스 잘봤구요ㅋㅋㅋ

┗ 네 다음 달빛~

┗ 풉! 배아프면 지는거랬는데~ 어떡하냐 맨날 져서^^

┗ 정신승리 오지넼ㅋㅋㅋ 어차피 신인 시절 한때다ㅋㅋㅋ 불꽃놀이 엔딩각ㅋㅋ

┗ 안물안궁

─ 나 진짜 내 돌이 우리 이름으로 기부금 1억이나 쾌척했다는거 듣고 그 자리에서 눈물 좔좔 흘림.. 친구들이 이상하게 봤는데 너무 뻐렁쳐서 멈출수가 없엇음... 그래서 나도 총대 계좌로 기부금 넣었다ㅠㅠ... 솔직히 디아스 진짜 행복하고 당당하게 덕질 쌉가능하다고 엄마 앞에서도 외칠 수 있음ㅜㅠㅠㅠㅠㅠ 내 돌이 너희라는게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해!!!

┗ 한줄요약좀...

┗ 나 지금 행복해서 울고 있다

나는 연예계 뉴스를 장식한 기사들을 보다가 민망해서 꺼 버렸다. 이러려고 기부한 게 아니었는데……. 우리 디어리가 이렇게 단체로 움직여 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 재단 짹짹이에 감사 인사 또 올라왔다.”

이서호가 나에게 보여주겠다며 휴대폰 액정을 들이밀었지만, 나는 열심히 고개를 저으면서 밀어냈다. 그러자 날 의아하게 보던 이서호가 이내 박장대소했다.

“진하온, 얼굴 빨개진 것 봐! 푸하학!”

“……시끄러워. 민망하단 말이야.”

나는 열이 홧홧하게 오른 얼굴을 숨기려고 몸을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이서호가 옆에서 깔짝대다가 정이한한테 제지당했다.

“하온이 울겠다.”

“……안 울어요.”

나를 뭐로 보고. 이 정도로 울지는 않는다. 그냥 얼굴에 오른 열을 삭힐 수 없을 뿐이지. 나는 무릎에 뺨을 비비적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만 놀고 연습하죠!”

“악! 진하온…! 내가 잘못했어…….”

이서호가 무릎으로 기어와 내 다리를 붙잡았다. 나는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하게 올린 뒤 다리를 확 잡아 빼면서 강현 형을 찾았다.

“강현 형! 연습해요!”

“어. 잠깐만.”

강현 형이 내 쪽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인 뒤 몸을 돌렸다. 어라? 강현 형이 연습을 미룬다고? 같은 걸 목격한 이서호가 멍한 목소리로 “내일 세상이 멸망하려나 봐…….”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무슨 일이지?”

나는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힌 채 통화 중인 강현 형의 뒤통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상한데?

“통화 중이잖아. 용건이 안 끝났나 보지.”

정이한이 가장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애초에 강현 형은 연습 중에 개인 통화 자체를 한 적이 없었는걸.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우리 강현 형에게 연습보다 중요한 통화라니, 그게 도대체 뭐냐고.

“유찬 형도 이상하죠?”

나의 솔로몬에게 고견을 구하면서 고개를 휙 돌렸다. 유찬 형은 나를 보고 있었던 듯 곧장 눈이 마주쳤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유찬 형은 화들짝 놀라면서 마구 기침을 해댔다.

“……유찬 형?”

“컥, 콜록, 쿨럭, 사, 콜록콜록, 사레, 쿨럭.”

나는 다급하게 유찬 형의 분홍색 텀블러를 찾아 쪼르륵 달려갔다.

“형, 물 먹어요, 물.”

가슴을 팡팡 치던 유찬 형은 마구 기침하면서 겨우겨우 물을 삼켰다. 그럼에도 사레는 가실 기미가 없었다. 급기야 눈물이 흐르고, 호흡까지 가빠오는지 거칠게 쌕쌕거렸다. 그게 꼭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여서, 너무 놀라 구원 스킬을 써 버렸다.

나의 체력 손실과 함께 유찬 형의 기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멎었다. 형은 숨을 고른 뒤 날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제야 안도하면서 형의 등을 쓰다듬던 손을 떼어냈다.

“아, 깜짝 놀랐다.”

“제가 더 놀랐거든요?”

진짜 구원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걸로 강현 형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에게 구원 스킬을 썼다. 더는 쓸 일이 없길 바랐는데 자꾸 소소하게 쓸 일이 생기네.

“미안. 놀랐어?”

“당연하죠!”

형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눈꼬리를 사르륵 접었다. 그리고는 텀블러를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고 돌아왔다. 예전이었으면 끌어안았을 타이밍인데 이상하네.

최근 계속 이런 느낌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구는 것 같으면서도, 날 안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다. 정확하게 내가 퇴원한 이후부터.

이 형도 이상하단 말이야.

유찬 형을 샐쭉하게 보고 있자, 형이 ‘왜?’ 물었다. 별생각 없이 요즘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뭐가?’ 하고 되물었을 때 ‘왜 최근에는 안아 주지 않아요?’ 이렇게 대답하면 이상하잖아. 다행이야, 말로 뱉기 전에 눈치채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신 할 말도 잃고 말았지만. 유찬 형은 애매하게 웃다가 “그래.”하고 대답했다. 사실, 이것도 이상했다. 평소였으면 왜 그러는지 한 번쯤 더 물어봤을 텐데.

유찬 형이 많이 놀랐었나?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면서 괜히 유찬 형을 눈으로 좇았다.

“자! 연습하자!”

언제 통화를 끝났는지 바로 연습 벌레 모드로 전환해 버린 강현 형이 외쳤다. 덕분에 어어, 하는 사이 나는 춤을 추고 있었다.

***

침대에 누워 허공을 응시하는 박유찬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이제 제가…… 싫어졌어요?」

조심스러운 질문 너머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화들짝 놀라서 다그치듯 진하온을 붙잡았다. 약간의 배신감까지 들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그런 종류의 배신감.

그러다 문득, 박유찬은 자신의 감정이 같은 팀 멤버에게 품어서는 안 될 종류의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뒤로는 예전처럼 편하게 닿을 수가 없었다. 과거의 자신은 어떻게 ‘하온 테라피’라면서 덥석덥석 끌어안았던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닿는 걸 피하는 거 눈치챈 것 같지…….’

벽을 향해 모로 뉜 채 끙끙대던 박유찬을 향해 서늘하고 묵직한 백강현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유찬 형. 하온이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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