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혼몽한 의식이 점차 또렷하게 바뀌었다. 침대 주변을 배회하는 인기척으로 미루어 봤을 때, 눈을 뜬 뒤 풍경이 눈에 잡힐 듯 선했다. 또 잔뜩 걱정하고 있을 형들이 있겠지.
연기한다고 했으면서 진짜 쓰러지면 어떡하냐는 형들의 타박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왔으니 빨리 눈을 떠야 하는데, 체력이 완전히 바닥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무거운 눈꺼풀과 한참을 씨름하다가 가까스로 눈을 뜰 수 있었다. 흐릿한 시야 때문에 사물이 이중으로 보였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린 뒤에야 또렷하게 바뀌어서 형들을 눈에 담았다.
“……하온아.”
유찬 형이 무척 지친 얼굴로 날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한 손으로 얼굴을 덮더니 이내 등을 돌려버렸다. 그 순간 가슴이 덜컥거렸다. 왜 저런 반응이지?
불안한 마음으로 정이한을 바라보았다. 정이한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조심스레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등에 제 이마를 비비면서 울먹였다.
“다행이다…….”
손가락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선연했다. 나는 손을 움직여서 정이한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을 후두둑 쏟아내면서 훌쩍거렸다.
“야이, 사기꾼아!”
이서호가 버럭 소리 질렀다. 연기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진짜 쓰러지면 어떡하냐고, 펑펑 울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는 행동이 무색하리만치 이서호의 얼굴은 금세 젖어들었다.
“……서호 형, 미안해.”
“흐끅, 흡, 너, 진짜, 흐어어엉…….”
“이서호, 진정해.”
강현 형이 이서호의 등을 두들긴 뒤 나를 봤다. 내 얼굴을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너 혹시…….”
강현 형 답지 않게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저 날 지그시 응시하던 형이 아주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병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네? 그럼요. 저 아주 건강해요!”
내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이서호가 어딜 봐서 건강하냐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 그래. 다른 사람이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럼 약이라도 먹었어?”
당혹스러운 질문에 빠르게 눈을 끔벅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약이요? 갑자기 무슨.”
“어떻게 그 타이밍에 쓰러져. 이상하잖아.”
“아…….”
이건 좀 수상쩍게 여길 만하지. 이래서 형이 선뜻 말하기 어려워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환생이나 시스템에 관해 말할 순 없잖아.
아주 잠깐, 이야기해도 믿어주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저 깊은 곳으로 수납시켜버렸다. 말도 안 되지. 나라도 헛소리로 치부할 게 뻔한데.
그냥 미리 생각해 둔 변명이나 하려고 했는데, 내 대답이 늦어지자 어떻게 생각했는지 강현 형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말한 약은 수면제 같은 그런 거야. 이상한 약에 손댈 리 없다는 건 알아.”
강현 형은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눈을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네가 정말 쓰러지기 위해서, 택시 안에서 우리 몰래 먹은 게 아닌가 싶어서.”
그와 동시에 다른 멤버들이 숨을 들이켜면서 나를 봤다. 다들 강현 형의 추리가 신빙성 있게 들린 모양이었다.
“……저 사실은요.”
“어. 뭐든 말해. 편하게.”
“제가 원래 체력이 약하거든요.”
다른 변명거리를 찾아볼까 했지만, 이미 이서호가 예전에 까발렸으니…. 지금 갖다 쓰기엔 이것만큼 적절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게다가 실장님도 아는 거니까.
“알아.”
“하하…. 그렇죠? 그래서 좀 피로가 누적되면, 곧바로 몸에 반응이 와요. 데뷔하기 전에도 무리하다가 호흡곤란 온 적도 있고요.”
갑자기 이서호가 딸꾹질하면서 그땐 미안했다면서 또 사과해왔다. 나는 이서호에게 아직도 그게 미안하냐면서 웃어줬다. 다시금 이서호 탓이 아니라고 말해준 뒤 강현 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저 좀 피곤하긴 했거든요. 얼마 전에 오전 연습도 쉴 만큼.”
“……그랬지.”
“그래서 감이 딱 왔어요. 아, 이거 제대로 쉬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데, 하고. 제 몸은 제가 잘 알거든요.”
강현 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나는 실실 웃으면서 형의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강현 형은 내 손을 피하진 않았지만,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게 불쾌해 보였다.
“그런데도 수요일에 직전까지 연습한 거야?”
“네. 그럼 그 사람 만날 땐 쓰러질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확실히 하려면 연기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던 강현 형이 내 뺨을 꼬집었다. 꽤 아파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이내 한숨과 함께 꼬집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형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나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는지 조금의 불신이 담긴 시선이 돌아왔다. 헤헤, 하고 웃으니 강현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날 보고 웃었다.
“하아, 하온아.”
유찬 형이 넋 나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에 흠칫 놀라서 돌아봤더니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날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어떡해. 진짜로 쓰러지면 안 되잖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내가 진짜…….”
유찬 형의 목소리에 습기가 가득 들어찼다. 이렇게 흐트러진 유찬 형은 두 번째였다. 쓰러질 때마다 날 걱정하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놀란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안절부절못한 정이한이 날 부축해줬다.
곁눈질로 체력을 확인하니 이제 막 10으로 올라갔다. 조금 움직여도 될 것 같아서 정이한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 못 박힌 듯 서 있는 유찬 형에게 다가갔다.
형은 나를 빤히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내게 손도 뻗지 않았다. 그저 무척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멍한 눈으로 날 볼 뿐이었다. 내게 거리를 두는 듯한 묘한 태도 때문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혹시 내가 너무 욕심부려서 형이 질린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소파남 때문에 유찬 형과 틀어지는 건 정말, 정말 원치 않았다. 내가 정말 과했나. 내가 실수한 건가. 그런 후회가 밀려들어서인지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유찬 형, 죄송해요. 저 이제, 안 그럴게요. 이제 제가…….”
나는 숨을 삼켰다가 쥐어짜듯 내뱉었다.
“싫어졌어요……?”
유찬 형이 황당하다는 듯 날 쏘아봤다. 그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형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양팔을 꽉 붙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유찬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유찬 형한테 안기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나는 형을 꼭 마주 안고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너무 놀라고, 속상해서 그랬어. 너를 소홀히 한 네게 화가 난 거지 싫어진 게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빠르게 말을 쏟아내던 유찬 형의 목소리에 점차 흐느낌이 섞였다.
“……내가 널.”
유찬 형이 갑자기 멈칫거렸다. 날 안고 있는 형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형은 잠시 후 흩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얼마나 좋아하는데…….”하고 말을 이었다. 순간 정이한이 떠올랐지만, 묘한 기시감을 미뤄두고 유찬 형을 다독일 수 있도록 조곤조곤 말했다.
“이제 안 그럴게요. 저 정말, 관리 잘할게요…….”
길게 내쉬는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유찬 형은 날 안은 팔에 힘을 주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부탁할게. 진짜. 제발, 제발 부탁할게. 하온아. 이제 보기 싫어. 너 병원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거…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응?”
나는 저항 없이 형에게 안겨들면서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형은 한참 동안 더 울었다. 간신히 눈물을 그쳤던 이서호가 다시 오열했고, 정이한의 훌쩍이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강현 형의 야트막한 한숨 소리가 울음소리 사이에 섞여들었다.
이게 웬 초상집 분위기냐고…….
알고는 있었지만, 미안해 죽겠다. 우리 디어리들도 걱정 많이 하고 있겠지…….
***
형들이 진정된 이후 조심스럽게 내가 쓰러진 뒤에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정곤 형한테 혼났어.”
강현 형은 그 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부족한 설명은 유찬 형이 대신해줬다. 정곤 형에게 1차로 혼나고, 이후에 실장님이 찾아오셨다고 했다.
유찬 형은 실장님께 녹음본을 내밀면서 어떤 계획을 했는지 전부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걸 들은 실장님이 무척 크게 화를 내셨다고…….
회사를 못 믿냐고 소리치는 실장님은 정말 무서웠고, 또 죄송했다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걸. 다음은 너야, 하온아.”
유찬 형이 장난스레 말하면서 윙크를 보내왔다. 나는 유찬 형의 장난이 기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지금 좋아할 타이밍이야?”
유찬 형은 조금 얼빠진 목소리를 냈지만, 나는 그조차도 좋았다. 평소의 유찬 형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냥요.”
그렇게 말하면서 방긋거리자, 유찬 형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더니 결국엔 나를 따라 웃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잠시 후 도착한 실장님과 면담 아닌 면담을 시작했다. 형들은 전부 나가고 실장님과 단둘이 남았다. 실장님은 일어나려던 나를 도로 침대에 앉힌 뒤 보조 의자를 끌고 와 앉으셨다.
“하온아.”
“네.”
“녹음본이 있는데도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정확하게 뭔지 들어보자.”
이미 형들한테 화내신 덕분인지, 나한테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나는 왜 내가 행동에 나섰는지 그 이유에 대해 실장님께 설명했다. 진지하게 경청해 주시던 실장님은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쉬시며 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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