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소파남과 만날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이번 작전의 가장 큰 변수는, 다름 아닌 디어리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유찬 형이 자신감을 드러내면서 내 앞에 우뚝 섰다. 형은 긴 폴라티에 마스크를 쓰고, 목도리로 하관을 한 번 더 칭칭 싸매고 있었다. 거기에 한 손에는 선글라스를, 다른 손에는 야구 모자를 들고 있었는데…….
“수배자로 신고당할 것 같아요.”
이 더운 날씨에 저 착장 어떡할 거냐고. 사실 디어리라면 귀만 보고도 알아보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손만 보고 정이한을 알아차렸던 디어리를 잊지 못했다.
“미행하는 느낌 주려면 이게 딱인데……. 덥긴 덥네.”
유찬 형은 목도리를 풀어 헤치면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러더니 왜 하필 지금 여름이냐면서 하늘을 원망스레 바라봤다.
“난 걍 이러고 나갈래.”
이서호는 가벼운 반팔과 청바지 차림에 선글라스만 하나 쓰고 있었다. 한 손에 든 야구 모자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면서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뭘 하든 걸려. 그럴 거면 차라리 당당하게 드러내고 뻔뻔하게 구는 게 나아.”
어떻게 생각하면 이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강현 형도 이서호 의견에 동의했다.
“눈에 띄어야 하니까 그냥 나가자.”
“그, 훼이크로 카메라 같은 걸 들까?”
정이한이 촬영인 척하면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건 내가 반대였다. 자칫하면 소파남을 만났다 쓰러지는 것도 몰카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목격담 떠서 정곤 형이 잡으러 오는 거 아니야?”
유찬 형은 팔을 감싼 채 부르르 떨었다. 서슬 퍼런 매니저 형한테 목덜미 잡히면 진짜 무서울 것 같긴 해.
“악!”
갑자기 유찬 형이 호들갑 떨면서 휴대폰을 쥐고 벌벌 떨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정곤 형’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진짜 저 형도 촉 장난 아니라니까.
“빨리 받아! 수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이서호가 채근하자 유찬 형이 심호흡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리도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 모드로 바꿔준 덕분에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 얘들아, 잘 쉬고 있어?
“그럼요, 형!”
- 연습 일찍 끝내준 거 놀러 가라고 한 거 아니니까 숙소에서만 푹 쉬어야 한다? 저녁 외식하고 싶으면 무조건 나한테 전화해. 회사에 있으니까 금방 데리러 갈 수 있어.
“네, 그럼요!”
- 그래, 그럼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갈게.
“내일 봐요, 형.”
매니저 형은 우리한테도 꼭 편하게 쉬라고 힘주어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유찬 형이 가슴을 꾹 누르면서 양심에 찔린다면서 바들거렸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유찬 형이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아무런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착실하게 활동했을 텐데…….
“……미안해요.”
“하온이가 왜 미안해. 우리가 논의해서 정한 건데. 나쁜 건 그 자식이지.”
유찬 형은 되려 나를 위로해준 뒤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정이한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정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이제 위험한 일은 하지 말자.”
“네. 그럴게요.”
나는 정이한을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나는 내 표정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 모자만 푹 눌러 쓴 상태였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몸을 비틀어 뒤를 돌아 보았다.
형들이 탄 택시가 저거려나. 괜히 근처의 택시들로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가 목적지 근처에 도착해 자세를 바로잡았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모자를 한 번 더 푹 눌러 쓰고는 고개를 숙여 버거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그 앞을 서성거렸다. 휴대폰을 쥐고 들여다보다가 다시 서성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한 여성분이 조심스럽게 내게 접근했다.
“저, 혹시 디아스의 진하온 맞아요?”
나는 당황하면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어색하게 아니라고 대꾸했다. 여성분은 그런 날 향해 귀엽다는 듯 눈웃음을 짓더니 “그래요? 자세히 보니 아니네요.”하고 멀어지셨다.
말투에 가득한 웃음기 덕에, 이미 알아봤으면서 모르는 척 해 주신 것이 여실히 티가 났다.
이, 이거 좀 민망하긴 하다.
또 한 번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오려고 했는데, 아까 질문했던 여성분이 큰 목소리로 “저도 물어봤는데, 아니시래요!”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아, 그래요? 닮았는데 아니구나!”하고 크게 대답하셨다. 동시에 내 쪽으로 슬금슬금 접근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멀어졌다.
와…….
모르는 척해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시는 거였구나. 백화점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생각해보니 백화점에서도 누군가 한 명이 물꼬를 틀자 다 같이 달려들었던 것 같다.
조금 신기한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두 분을 쳐다봤는데, 분명 서로 모르는 것 같았음에도 어째서인지 둘이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핏 내 이름이나 멤버들 이름이 들려왔다. 디어리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나 봐! 소파남 만나는 것만 아니었으면 같이 사진 찍으면 좋았을 텐데…….
모르는 척 해주시는 게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저분들한테 상처 주는 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고…….
심란한 마음에 땅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주변이 또 한 차례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들자 소파남이 얼굴을 드러낸 채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일찍 왔네?”
그쪽이 10분 늦은 거거든.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은 6시 10분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불만은 쏙 집어넣고는 벽에 기댔던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야야, 이런 데서 그러지 마라. 보는 눈이 많잖아.”
소파남은 내 어깨에 멋대로 팔을 턱 걸치면서 씨익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란 척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약속 장소 갑자기 바꿨는데 안 불편했어?”
“네? 아, 네…….”
소파남은 뭔가 위대한 업적이라도 달성한 것처럼 목소리에 힘을 줘서 속삭였다.
“흐음, 그래? 역시 너도 마음이 있구나?”
이건 또 뭔 신박한 헛소리인가 싶었는데, 이게 교주의 스킬 효과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소파남은 뒤쪽에 주차해 놨다면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날 지켜보던 디어리 몇 명이 의아한 듯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대외적으로 접점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으슥한 곳으로 가기 전에 빨리 쓰러져야겠다. 더는 소파남과 붙어 있기도 싫었다.
그래서 슬쩍 소파남의 팔을 떼어내려고 몸을 비틀었다. 어깨를 떨어트릴 정도로 거리를 벌린 순간, 소파남이 아플 정도로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인위적인 미소 속에 은은한 짜증이 묻어났다.
“보는 눈이 많다니까?”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소파남에게 엿보기 스킬을 사용했다. 디버프에 신뢰(5Lv)이 있는 것만 확인하고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연달아 엿보기 스킬을 사용해서 체력을 5 미만으로 떨구었다.
이제 슬슬 연기 좀 해야겠네.
체력이 이 정도로 떨어지면 안색이 창백해진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내 얼굴색이 어떨지를 가늠하면서 벌벌 떨었다.
“죄, 죄송…….”
“야!”
순간적으로 소파남이 목청을 높였다. 동시에 우릴 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파남은 미간에 혈관이 불룩 솟을 정도로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이내 미소 띠면서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내가 뭘 했다고 벌벌 떠는데? 이런 곳에서까지 그딴 식으로 계속 티 내 봐. 응?”
소파남이 대뜸 내게 짜증을 부렸다. 이렇게 쉽게 넘어온다고? 이것도 교주 스킬에 영향을 받은 건가? 처음 이서호가 실장님께 대들었던 걸 떠올리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디버프 설명을 보면 확실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본 엿보기 스킬은 갱신하기 전까지는 유지되니까 이대로 킵해두고 나중에 레벨 올린 뒤에 봐야겠다.
나는 남은 체력을 떨어트리기 위해 한번 더 엿보기 스킬을 사용했다. 체력이 마이너스가 되면서 상큼한 상태 이상 발생! 메시지가 떴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림판을 보면서 나는 숨을 헐떡였다.
“헉, 죄, 허억, 헉.”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내 가슴을 꽉 움켜잡고 있는데, 소파남이 억지로 내 턱을 잡아 올렸다. 이게 쇼하는 건 아닌가,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숨이 막히는 척하면서 소파남의 가슴을 더듬거렸다. 그리고는 컥컥거리면서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뭐, 뭐 하는…….”
“흐으, 헉, 죄, 송…….”
<시스템: 상태 이상 ‘빈혈’에 걸렸습니다.>
아니, 빈혈이면 안 되지! 기절이 나왔어야 했는데. 바닥이 들썩이며 울렁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휘청였다. 이번엔 진짜 상태 이상이었기에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소파남의 멱살을 꽉 움켜쥐고 무릎이 푹푹 꺾이는 걸 버텨냈다. 그 때문에 목이 졸린 건지 소파남이 켁켁거렸다.
아주 속이 다 시원하다! 멱살 한 번 꼭 잡으려고 했는데, 이렇게라도 했으니 소소한 복수를 한 셈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소파남이 내 손목을 잡아 떼어냈다. 그리고 소파남이 손을 놓은 순간, 나는 뒤쪽으로 철퍼덕 넘어졌다.
누가 보면 소파남이 날 밀쳐낸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소파남도 그렇게 느꼈는지 당황하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야, 왜 넘어지고 그래? 너 진짜 어디 안 좋은 거냐? 어?”
눈치는 약에 쓸래도 없네. 아직도 내 상태가 정상으로 보이나? 나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내 몸도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어떡하냐면서 울먹거리는 디어리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잔뜩 젖은 목소리가 주는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따끔 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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