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O.D.I 마지막 촬영을 위해 우리는 합숙소를 향했다. 연습 첫날엔 말 그대로 엉망이었던 하윤이는 다행히 두 번째 촬영 때는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타고난 성대의 한계를 넘을 순 없어서, 결국 키를 좀 낮추기로 한 게 지난 수요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참가자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세 번째 만남이라 그런지 양쪽 모두 바짝 긴장했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꽤 친근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온 선배님!”
하윤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자길 좀 봐달라는 듯 내 앞에서 기웃거렸다.
“잘 지냈어?”
“네! 저 연습 많이 했어요!”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니 자신 있나 보네.
“진짜? 그럼 한 번 볼까?”
“으악! 벌써요?”
하윤은 침을 꼴딱 넘기더니 입술을 부르르 떨며 얼굴 근육과 입술을 마구 풀기 시작했다. 후하후하, 하고 크게 심호흡한 뒤 준비되었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기쁜 듯이 웃으면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봤다.
“야야, 진하온. 그 얘기 해 줘.”
이서호가 어깨로 나를 툭툭 건드리면서 눈웃음 지었다. 하윤이뿐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도 궁금해하면서 내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집중해서 들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닌데. 괜히 이서호 때문에 과할 정도로 판이 깔린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너무 기대하시는 것 같은데 별 건 아니고요…….”
우물쭈물 운을 떼면서 참가자들 눈치를 살폈다. 별 건 아니라는 말에, 오히려 참가자들의 기대감이 천장을 뚫을 것처럼 더 높아진 것만 같아서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빨리 말하고 치워버리자.
“오늘 점심은 저희 디아스가 쏩니다!”
“헐, 우와!”
“와아아!”
“회식! 회식!”
“진짜요? 진짜 진짜요?”
하윤이가 내 손을 덥석 붙잡은 채 폴짝폴짝 뛰었다. 고개를 끄덕여줬더니 싱글벙글 난리가 났다. 고작 밥 한번 사주는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기뻐하는 참가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 전에, 어제 연습한 결과부터 좀 볼까요?”
유찬 형이 아까와 달리 조금 엄한 눈으로 참가자들을 모았다.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던 모습은 금세 자취를 감추고, 참가자들 사이에서 살짝 긴장감이 돌았다. 곧 노래가 재생되었고,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각자 담당한 참가자를 집중해서 관찰했다.
“이야, 진짜 많이 좋아졌다.”
노래가 끝난 뒤 유찬 형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참가자들에게 애정 어린 박수를 보냈다. 안무는 거의 숙달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완성도가 좋아졌다.
“키 낮추니까 하윤이 보컬도 괜찮네.”
“네. 훨씬 듣기 좋아졌어요.”
유찬 형의 말에 동의하자 하윤이의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흥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잘했다고 칭찬해주자 빨갛게 상기 된 얼굴로 연신 싱글벙글 웃어댔다.
이어지는 연습은 디테일한 안무 코칭이었다. 좀 더 딱딱 맞는 군무 느낌을 살리기 위해 팔, 다리의 각도와 점프하는 타이밍, 다리를 벌리는 넓이 등을 세밀하게 조절해줬다.
그게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 연습을 하다 보니 슬슬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계속된 연습으로 탈진 상태가 된 참가자들이 널브러져서 쉬는 동안 유찬 형은 매니저 형에게 곧 이동할 거라고 연락했다.
나는 슬라임처럼 바닥에 눌어붙은 하윤이를 보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참 신기하게도, 저 모습을 보니 연습실에서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내 눈에만 그런 게 아닌 듯 이서호가 진하온이랑 똑같다고 낄낄거렸다.
그런 이서호의 말을 뒤로한 채 하윤의 옆으로 가서 풀썩 주저앉자, 깜짝 놀란 하윤이 상체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기합이 바짝 든 모습에 괜찮으니까 편히 쉬라고 해도 도통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내가 있어서 불편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불편할 것 같긴 해. 하윤이가 나를 워낙 잘 따라서 깜빡했지만, 엄연히 선후배인데 편하게 대하기 힘든 관계긴 하지. 피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하윤이가 그런 나를 붙잡았다.
“어디 가세요……?”
“너 편하게 쉬라고. 나 있어서 불편해하는 것 같길래.”
“아니요! 절대! 불편한 게 아니라, 긴장한 거예요!”
그게 불편한 거 아닌가? 뭐가 다른 거지…….
“악, 아니, 그러니까요……. 저 진짜 선배님 너무 좋아해요…….”
“으, 으응?”
난데없는 고백에 반문하는 내 목소리에서는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그, 그러니까! 너무 좋아서 긴장한 것뿐이에요! 가지 마세요……. 네?”
“그, 그래…….”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하윤이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제 긴장 다 풀렸다며 방긋거렸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든지요!”
“내가 왜 좋아?”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나를 잘 따라주는 게 기특하고, 귀여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
하윤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우으으, 하고 고뇌에 찬 얼굴로 앓더니, 이내 힘없이 말했다.
“……다 좋아요.”
“어?”
“서, 성의 없게 느껴지실 것 같긴 한데요! 도저히 하나만 꼽을 수 없어서요. 그렇다고 전부 나열하자니 선배님이 부담스럽다고 도망치실 것 같아서…….”
“푸흡, 아하하!”
이유가 너무 귀엽잖아!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크게 웃어 젖혔다. 하윤이는 그런 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런 하윤에게, 하도 웃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
“헤헤헤……. 저 진짜 너무 행복해요! 하지만 조금 슬프기도 해요…….”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하윤이 일순 고개를 푹 떨궜다. 왜 슬프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지나면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렇다면서 우울해했다. 한숨을 한 번 푹 내쉰 하윤이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지! 선배님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즐겨야겠어요! 우울해하는 건 이따…… 헤어진 다음에 해도 충분하니까요!”
그런 하윤에게 나는 내 휴대폰을 내밀었다. 깜짝 놀란 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휴대폰만 쳐다만 보고 있길래, 손을 위쪽으로 한 번 흔들어 보였다.
“번호 안 찍어 줄 거야?”
“제, 제제, 제가, 제가 감히, 그래도 되, 될까요?”
너무 굳어 있길래 장난기가 동한 나는, 양손으로 휴대폰을 받친 채 공손하게 말했다.
“번호 좀 주세요, 진하윤 참가자.”
“아악! 네! 드리겠습니다! 뭐든지 다 줄게요!”
순식간에 무릎을 꿇고 공손한 자세로 앉은 하윤이 조심스럽게 내 휴대폰을 받아 갔다.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만약, 내 영혼이 폐급이 아니었다면……. 나랑 하윤이, 전생에서도 이렇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을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만약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 삶은 무언가를 후회하기에는 잃어서 후회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매 순간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선택의 연속이었으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과거를 곱씹으면서 후회하는 일은 의식적으로 피해왔다. 그런데 이 순간, 처음으로 안타까웠다. 운명의 장난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내 과거의 삶이.
하지만…….
나는 연습실에 삼삼오오 모여 매니저 형을 기다리고 있는 디아스 멤버들을, 우리 형들을 봤다. 내가 폐급 영혼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었다. 어쩌면 전생의 경험이 없었다면 처음 멤버들에게 오해받았을 때 지금처럼 무난하게 넘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발버둥 치면서 살아온 모든 기억과 경험들은 어떤 식으로든 내 안에 축적되었고,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게 지금의 나였다. 그랬기에 지금의 이 행복을 손에 쥔 걸지도 몰랐다.
난 부족한 것도 많고, 욕심도 많고, 겁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눈물이 날 만큼 넘치도록 사랑받고 있었다.
***
O.D.I 촬영이 끝났다. 하윤이는 헤어지는 게 싫다면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런 하윤을 품에 꼭 안아 주고 등을 다독여줬다. 그럴 때마다 울음소리가 더 커졌지만, 안타깝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하윤아, 이제 그만 그쳐야지. 계속 울면 형 못 가잖아.”
“흐어어어어엉…….”
“힘들 때 언제든지 전화해. 톡 해도 괜찮고.”
“혀, 혀엉, 하온이 혀엉…….”
그렇게 형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냐고 하더니 이제야 불러주네.
“그래, 그래.”
“저, 정말, 훌쩍, 전화해도, 돼요? 귀, 귀찮지, 않아요?”
“응. 하윤이한테 연락이 오면 기쁠 것 같아.”
“후에에에엥!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형이, 더, 훌쩍, 더 좋아지잖아요오오오…….”
하윤이가 하도 울어서 그런가. 덤덤하게 우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다른 참가자들의 눈도 어느 순간부터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서호가…….
“흑, 흐끅, 끄흑.”
또 운다. 하여간 저 울보.
“형드을, 꼬옥 연락해야 해요…….꼭이요!”
기다리다 못한 매니저 형이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이제 가야 한다면서 눈물 젖은 이별을 끝내줬다. 마지막까지 하윤이를 안아 주고 있다가 나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매니저 형에게 나중에 공식 짹짹이에 글 하나 남겨도 되는지 물었다. 하윤이를 위한 메시지를 남겨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우리 디어리가 하윤이를 예쁘게 봐줬으면 좋겠어…….
“음. 정 그렇게 눈에 밟히면 차라리 주말에 애들 무대에 서는 거 보러 갈래? 방청 형식으로 가는 건데, 가면 응원 인터뷰 따 갈 거거든. 문라이트 때문에 거절해두긴 했는데…….”
“갈래요!”
두말할 것 없지! 이제는 소파남이랑 얽혀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목격자가 더 늘어나는 거니까 좋으면 좋았지. 게다가 하윤이 무대도 직접 볼 수 있다니 신이 내린 기회가 분명했다.
“내 생각보다 더 정들었나 보네. 하온이가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거 처음 본다.”
매니저 형은 내일 바로 연락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면서 나를 진정시켰다.
아, 잠깐. 생각해 보니까 교주네도 오지 않을까? 으음.
하지만 지금 당장은 교주의 존재보단, 하윤이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과 지금 막 머리에 떠오른 계획이 더 중요했다. 나는 교주를 뒷방으로 밀어 넣고, 아직까지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작전을 보완하기 위해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