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저 사실 형들 선물 사 왔거든요.”
허벅지 위에 올려뒀던 쇼핑백을 만지작거리면서 운을 띄웠더니, 유찬 형과 이서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우리도!”
왜 이렇게 물건이 많은가 했더니, 나 혼자만 선물을 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멀뚱멀뚱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내 선물부터 개시할게!”
유찬 형은 멤버들 전원이 같이 쓸 수 있는 색색의 텀블러를 사 왔는데, 그중에 분홍색이 하나 끼어 있었다. 색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사 왔다면서 유찬 형이 분홍색을 챙겨갔다.
강현 형은 검은색, 이서호는 빨간색, 정이한은 파란색, 마지막으로 나는 하얀색 텀블러를 받았다. 멤버들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고른 거라는 유찬 형의 말에 하얀색이 나랑 어울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이서호가 대뜸 물어왔다.
“엥? 진하온 너 몰랐어?”
“응? 뭐가?”
“너 하냥이 말고 별명 또 있어. 흰 하온눈이.”
“……그게 뭐야?”
낄낄거리며 웃은 이서호가 나한테 보여준 사진은…….
“어? 이거!”
아까 정이한이 사달라고 했던 그 새 인형이잖아! 깜짝 놀라서 정이한을 봤더니 씨익 웃으면서 내가 사준 인형의 부리를 검지로 콕콕 찍어댔다.
이, 이 녀석이 진짜…. 의외로 고단수네, 이거…….
“엇? 뭐야? 이거 샀네? 아! 좋은 생각 났다!”
갑자기 이서호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정이한에게 내 어깨에 인형을 올려보라고 요구했다.
“진하온, 카메라 보고 인형처럼 갸우뚱해 봐. 빨리!”
“……왜.”
“아, 해봐! 디어리가 좋아할 거니까!”
디어리가 좋아할 일이면 해야지. 시키는 대로 고개를 기울이기 무섭게 촤르륵, 연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제일 잘 나온 사진이라면서 내게 들이밀었다.
저렇게 귀엽고 예쁜 인형이랑 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나와 매니저 형에게 허락받은 이서호는 곧장 디아스 공식 짹짹이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디아스@Dias_SR
내 디어리들 잘 있죠? 서호예요! ㅇ.<
흰하온눈이 실사 버전 찍었어요!
저 잘했쬬ㅋㅋㅋ
(시키는대로_갸우뚱해주는_막내.jpg)
#디아스 #흰하온눈이 #Dias #찐막내 #하온 #짭막내 #서호
낙지요맨@slrspdlaanjgkwl
@Dias_Sr 님에게 보내는 답글
오이오이 막내즈 믿고 있었따구! 흰하온눈이파는 고개를들라!!
떱떱이@july_lover
@Dias_Sr 님에게 보내는 답글
우리 서호 사진은 어디에...ㅠ 아줌마 좀 섭하내,,,
하모아@hamoa
@Dias_Sr 님에게 보내는 답글
으앙 얘들아 보고시퍼ㅠㅠㅠㅠ
사진 좀 자주 올려주라ㅠㅠㅠㅠ
(일단 이건 개같이저장..주섬주섬
카랑코에@ffrr-_-or
@Dias_Sr 님에게 보내는 답글
내 마음의 눈으로 봤을 때
인형 잡은 저 섬섬옥수... 이한이다!!
이걸 맞추네.
손만 보고도 우리가 누군지 알아맞히는 디어리인데, 이렇게 눈썰미 좋은 디어리들 앞에서 마스크랑 모자만 쓰고 돌아 다녔으니…….
“아, 맞다. 사람들이 매니저 형 보고 ‘헝베’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무슨 뜻이에요?”
“아. 그거.”
유찬 형은 운전하는 매니저 형을 흘끔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
“헝그리 베어의 줄임말이래. 눈 부릅뜨고 팬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배고픈 야생곰 같다나.”
“…….”
웃음이 크게 터질 뻔한 걸 필사적으로 참느라 입술을 꽉 베어 물었다. 너무 찰떡이잖아!
“어울리지?”
“……완전요.”
나는 연달아 심호흡하면서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다스렸다. 머릿속에서 ‘헝베’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 뒤에야 내 쇼핑백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건 유찬 형 선물이에요.”
형에게 사준 건 아로마 향초였다. 예민한 신경을 완화 시켜 느슨하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에, 바로 유찬 형을 떠올리고 구매한 것이었다.
“오! 향기 좋다. 밤에 잘 때 켜두면 돼?”
“네! 캔들도 세트로 샀어요!”
형은 내가 사준 캔들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함박웃음 지었다. 이거 되게 뿌듯하네.
“어? 내거는? 내거는 뭔데?”
드디어 짹짹이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이서호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물었다. 기대감으로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이것도 자신 있지.
“짠.”
자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곧장 내용물을 헤집기 시작한다. 닌텐드 게임 칩을 발견한 이서호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전생에서부터 숨은 명작이라는 평을 듣던 게임이었다. 발매 당시엔 재미에 비해 유명세가 낮았지만, 뒤늦게 게임 너튜버들로 인해 인기가 치솟은 바 있었다. 아마 이번 생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분명 재밌을걸.
“오오? 나 이 게임 처음 봐! 유명한 건가?”
“재밌어 보여서 샀어.”
“유찬 형, 나 이따 딱 한 판만, 응?”
유찬 형은 한숨 쉬면서 나를 흘겨봤다. 하필이면 선물을 해줘도 게임일 건 뭐냐고 질책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뺨을 긁적였다. 어쩔 수 없었는걸, 이서호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해 보니까 게임밖에…….
“에휴, 알았어. 너무 늦게까지 하면 안 된다?”
그래도 훈훈하게 마무리돼서 다행이다. 만세를 부르는 이서호를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마지막 멤버인 강현 형을 봤다.
형은 내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져 웃다가, 마지막 쇼핑백 하나를 형에게 건넸다. 솔직히 이건 좀 취향 타는 선물이라 긴장돼…….
“마사지 오일이네?”
“네. 형이랑 어울리는 향으로 골랐어요.”
형은 내가 선물한 오일 병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곧 뚜껑을 열어 향기를 맡아봤다.
“향 좋은데.”
그와 함께 내 광대가 한껏 당겨 올라갔다. 다행이다! 형은 답례로 아주 귀한 미소까지 보여줬다.
“고맙다. 잘 쓸게.”
강현 형은 케이스 안에 다시 오일을 넣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여상한 어투로 물었다.
“저녁에 마사지해 줄까? 첫 개시 할래?”
“엇, 아니요. 괜찮아요!”
물론, 예전에 받았을 때 아주 좋긴 했지만……. 그런 의도로 선물한 게 아니었기에 한사코 거절했다.
“헤헷, 이제 내 차례인가! 받아, 받아!”
이서호가 양손 가득 쥐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을 우리에게 안겼다. 그 안에는 검은색 상, 하의 세트의 트레이닝복이 들어 있었다.
“히히! 내 꺼 사는 김에 그냥 다 같이 샀지! 우리 이거 입고 연습 영상 찍어서 올리자!”
“어, 아이디어 괜찮은데? 내친김에 우리, 연습 영상 매일 찍어서 컴백한 다음에 연습 과정 압축해서 올릴까?”
“오! 그거 좋다!”
이서호가 물개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형들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면서 좋아했고,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매니저 형도 룸미러를 통해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
회사에 도착해 밴에서 내리기 전, 나는 마지막 쇼핑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차 키를 눌러 밴을 잠그는 매니저 형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손에 쇼핑백을 쥐여줬다.
“형, 선물이에요.”
“……내 선물도 있어?”
“당연하죠. 형도 디아스 팀이잖아요.”
“팀…….”
매니저 형은 감격에 겨운 듯 울먹울먹한 눈망울로 내가 선물한 넥타이를 손에 쥐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은 채 번쩍 들어 올렸다. 숨이 꽉 막힐 정도로 격한 포옹에 지금 형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놓아줬으면…….
“혀엉, 갑갑해요…….”
“억, 미안! 진짜 고맙다, 하온아. 잘 쓸게! 형 진짜, 진짜 너무 기쁘다. 너희 매니저 하길 잘했어…….”
급기야 팔등을 들어 눈을 묻는 매니저 형을 보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기뻐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걸로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었다.
진하온, 너 진짜 행복한 사람이야!
기분이 좋아진 나는 평소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형들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 기세를 몰아 남은 연습도 아주 완벽하게 해내겠어!
떠들썩하게 연습실로 복귀한 우리는 곧장 연습 재개 준비를 했다. 유찬 형에게 선물 받은 텀블러를 씻어서 냉수를 가득 담은 것으로 연습 준비는 끝났다.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는 휴대폰을 벤치 위에 올려두려다가 아까 형들한테 전화가 왔었다는 걸 떠올랐다.
헷갈리니까 알림을 지워둘 요량으로 휴대폰 액정을 켰더니, 내 예상과 전혀 다르게 소파남의 이름이 떡 하니 찍혀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네. 며칠은 더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며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들기다가 형들을 불렀다.
“연락 왔어요.”
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기민하게 알아차린 멤버들이 순식간에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는 다들 내 곁으로 다가와 동그랗게 둘러섰다.
“지금 연락할 거야?”
“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오래 끌어봤자 신경만 쓰이니까. 마음을 굳힌 나는 스피커 모드로 바꾼 채 소파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통화가 연결됐다.
- 어.
“안녕하세요, 김호채 선배님. 부재중 전화가 있어서…….”
- 이번엔 다시 걸었네?
“제가 조금 늦게 봤어요. 죄송해요…….”
- 안 씹었으니까 됐어. 내일 오디아이 2차 촬영 있지? 끝나고 시간 있어?
설마 내일도 오려고?
“어제 저희 10시 좀 넘어서 끝났었는데, 내일도 비슷할 것 같아요.”
- 어. 어차피 밤에 가야 하니까 괜찮아.
“……어디 가는데요?”
- 있어. 좋은 곳.
유찬 형이 필사적으로 팔을 X자로 교차시키며 고개 저었다. 형의 신호를 확인한 나는 곤란한 듯 목소리 톤을 잔뜩 낮췄다.
“……저 밤에는 못 나가요. 형들이…….”
- 아, 아아. 그 자식들.
소파남은 알만 하다면서 꼰대 같은 멤버들한테 잡혀 사냐고 비꼬았다. 감히 누구더러 꼰대래. 울컥한 마음을 다스리느라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제가 아직 어려서……. 형들이 저를 많이 걱정해요.”
- 아오…! 진짜 까고 있네. 그럼 이렇게 하자. 나도 주말까지는 오디아이 촬영 때문에 바쁘니까 다음 주에 저녁이나 같이 먹고, 그날 외박해. 그건 괜찮지?
“외박…은 해본 적 없는데…….”
어차피 만나면 금방 헤어질 거니까 상관없긴 하지만, 일단 한 번 튕겨봤다.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오히려 소파남은 기분 좋다는 듯 음흉하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 괜찮아. 외박도 해 버릇해야 익숙해지는 거야. 형이 잘 아는 가게 있으니까 거기서 보자. 위치는 톡으로 보내줄게.
“……네.”
소파남과 정확한 약속 날짜까지 잡은 뒤에 통화를 종료했다. 그즈음 연습실 안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
유찬 형은 채 걱정을 지우지 못한 안색으로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유찬 형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라 밝았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급격하게 다운되었다. 나는 휴대폰을 대충 벤치 위에 올려놓고, 내 결의를 담아낸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했다.
“형들, 저는 이 싸움 이길 거예요.”
절대 지고 싶지 않으니까. 이건 멤버들과, 우리 디어리들을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멤버는 내가 지킨다.
그건 절대 변하지 않을, 내 신념과도 같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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