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60화 (160/320)

160.

“딱 1시간 뒤에 다시 모이는 거다? 돌아다닐 때 마스크랑 모자 절대 벗지 말고, 너희 다섯 명이 뭉쳐 다니면 눈에 띄니까 적당히 흩어져서 다녀.”

매니저 형은 우리가 올 때까지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겠다면서 손을 흔들었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매니저 형은 대기조를 자처하고 나섰다.

“혹시라도 팬들 몰려서 못 움직이게 되면 전화해. 바로 데리러 갈 테니까.”

밴에서 내리기 전에 목적지부터 정하자는 말에,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옷 살 거야!”

그렇겠지, 그러려고 왔으니까.

“그럼 내가 서호랑 다닐게. 나도 온 김에 옷도 좀 보고 싶고, 이 녀석 혼자서는 사고 칠까 봐 불안하니까.”

“아아닛? 형님, 절 뭘로 보시고?”

“이서호.”

“나처럼 의젓한 사람이 세상 어디 있다고?”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게 중요하단다.”

이서호가 낄낄 웃으면서 동의했다. 장난치던 이서호는 시간이 아깝다면서 밴에서 쏠랑 내려버렸고, 유찬 형이 이따 보자면서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그럼 우리는 셋이 다니면 되나?

“……나도 개인적으로 사고 싶은 게 있는데.”

강현 형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뉘앙스로 보아 혼자 다니겠다는 말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정이한을 봤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정이한은 방긋방긋 웃으면서 “내가 하온이랑 있을게.”하고 말했다.

“어. 그럼 이따 만나.”

정이한이 대답하자마자 강현 형은 기다렸다는 듯 뒤도 보지 않고 바쁘게 걸어갔다. 백화점 오는 거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더니, 막상 오니까 좋아하는 것 같네.

“이한 형도 사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 너는?”

“저도 딱히…….”

“그럼 우리, 소화 시킬 겸 걸을까?”

“좋죠.”

우리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적당히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니기로 했다. 그러다가 백화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소품샵을 발견했다. 이것저것 귀여운 게 많아 보여서 구경하는데, 정이한의 작업실에 있던 사기 선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깨진 선인장 그대로 장식해 뒀으려나. 최근에는 신경 써서 본 적 없어서 그런가 기억이 영 희미했다. 선인장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뭘 오해한 건지 정이한이 대뜸 물었다.

“하온아, 그거 갖고 싶어? 사줄까?”

“네? 아뇨. 이거 형 작업실에 있는 선인장이랑 비슷해서요. 그거 깨져 있었잖아요.”

“……그걸 아직도 기억해?”

“그럼요. 형에 관한 건 전부 기억하죠.”

선인장에 집중하면서 대답하느라 정이한이 조용해진 걸 좀 늦게 알아챘다. 슬쩍 곁눈질로 훔쳐본 정이한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형?”

“하, 하온이 넌 정말…. 유죄남이야.”

“…응?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정이한은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는 속삭였다.

“내가 꼬신다고 했는데, 네가 꼬시면 어떡해?”

“……네에? 제가 언제요!”

정이한은 이미 잡은 물고기한테까지 이렇게 열심히 먹이를 주면, 살찌지 않겠냐면서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 먹이를 줬어?

“있어. 나 설레게 한 말.”

그게 뭔지는 안 알려주겠단다. 알려주면 앞으로 못 들을 것 같다면서……. 도대체 뭐냐고. 내가 한 말을 열심히 곱씹어 봤는데도, 도무지 모르겠다.

“하온아, 하온아.”

“……네?”

“나 이거. 이거 사주라.”

그렇게 말한 정이한이 가리켜 보인 건 새하얗고 동글동글한 인형이었다. 손바닥 위에 딱 올려놓기 좋아 보이는 작고 귀여운 새.

“그게 마음에 들어요?”

“응.”

“선인장은요?”

정이한은 심각한 얼굴로 새 인형과 선인장을 번갈아 봤다. 뭘 고를지 고민하는 게 눈에 보여서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니 둘 다 사줄 수 있는데.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정이한을 내버려 둔 채 다른 것들도 살폈다. 형들한테도 뭔가 하나씩 선물해 주고 싶은데, 찾아볼까.

부담스럽지 않고 기분 좋게 받아줄 수 있을 만한 것들로. 아무 생각 없이 구경할 생각이었지만, 내친김에 형들에게 줄 선물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이한 형.”

“응?”

“아직도 못 골랐어요?”

“으응.”

“그럼 둘 다 사줄게요.”

정이한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마음에 둔 게 있었는지 주르륵 나열된 사기 선인장 중 하나를 집어 드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빨간 꽃이 피어 있는 앙증맞은 녀석이었다.

“이거!”

“좋아요, 계산하러 가요.”

“하온이는? 갖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선물해 줄게.”

“저는 없어요.”

“그러지 말고, 구경하다가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

계산대를 향하면서 장난기가 동한 나는 “그럼 달이요.”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정이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잠깐만 기다리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농담이었는데? 하지만 정이한이 뭘 골라올지 조금 궁금해져서 얌전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뭘 가지고 오려나. 이거 의외로 두근두근하네. 그래서 내가 선물해 준다고 했을 때 설렌다고 한 거였나?

진열대 사이로 정이한의 머리가 빼꼼 올라왔다가 사라지길 몇 번 반복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찾은 듯 환히 웃더니 내 쪽을 힐끔거렸다. 돌아온 정이한의 손에는 꽤 그럴싸하게 만든 달 무드등이 들려 있었다.

“자, 하온이 달이야.”

“하핫. 와, 좋네요! 마음에 들어요.”

정이한은 성공했다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한 번 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각자 선물을 계산한 뒤 그 자리에서 교환했다.

“고마워, 하온아.”

“저도요. 잘 쓸게요.”

***

멤버들을 위한 작고 소소한 선물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내 마음까지 채워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선물을 고른다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구나.

다들 좋아해 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양손에 묵직하게 들린 쇼핑백을 품 안 가득 안았다.

“이제 주차장으로 가자.”

정이한은 연신 내 어깨를 감싼 채 품 안쪽으로 끌어당기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게,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에 사람들이 늘어나도 너무 많이 늘어났다.

게다가 주변 반응에 예민한 ‘예쁜 척’ 스킬이 어디선가 나를 찍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눈 바로 아래까지 올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채 고개 숙이고 바닥만 보며 걸었다.

“엘리베이터는 갇힐지도 모르니까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가자.”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얼른 꺼내서 확인하니 매니저 형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다 왔는데 나와 정이한만 아직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까지 인파가 몰린 이유가 우리만 밖에 있어서인 것 같았다. 매니저 형은 우리 위치를 물어보고는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구석진 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동하는데, 또 한 번 진동이 느껴졌다. 멤버들인가 싶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어깨가 움찔 떨릴 정도로 크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온아!”

동시에 꺅꺅거리는 비명과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고 있던 팬들과의 균형이 무너진 건.

누가 먼저 시작할지 눈치만 보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동시다발적인 플래시가 마구 터져 나왔다. 심지어는 우리를 중심으로 원이 만들어지더니, 그 원의 지름이 점점 좁아 들었다.

허, 허어. 진짜 인파에 둘러싸여서 갇히는 일이 생기는구나…….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건지. 우리 디어리들 눈썰미가 대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디어리라고 생각해도,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몰려드는 걸 보니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원이 더욱더 좁아지더니 급기야는 손이 쑥 뻗어 나왔다. 그 손은 내 팔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잡았다.

“윽.”

“괜찮아?”

정이한이 얼른 방향을 틀어 제 몸으로 나를 방어해주면서 벽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나를 잡았던 손은 이제 정이한을 잡고 있었다. 그를 시작으로 자꾸만 여기저기를 더듬는 손이 늘어났다. 그때마다 나와 정이한은 흠칫거리면서 울상을 지었다.

이, 이게 뭐야…….

패닉 상태에 빠진 듯한 정이한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날 만지려 드는 손을 너무 대놓고 쳐내려고 들길래, 허둥지둥 정이한을 붙잡았다.

“이한 형.”

정이한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우리가 나서서 대응하면 안 된다. 괜히 디아스 멤버에게 폭행당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과 루머가 뜰 수도 있었다. 정이한도 연습생 시절부터 몇 번이고 주의받았던 부분인 만큼 내가 말리자 인상을 잔뜩 찌푸릴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비켜요, 비켜!”

그 순간 무척 위압적이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매니저 형이다!

“헝베 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흡사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인상을 잔뜩 찌푸려서 더욱더 사납게 느껴지는 매니저 형이 사람들을 가르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은 곧장 우리를 옆으로 당겨와 보호하면서 엘리베이터로 데리고 갔다. 우리를 엘리베이터 문 바로 앞에 대기시킨 매니저 형이 쫓아온 사람들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지키고 서 있으니,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질 못했다.

우리 형……. 진짜 멋있다…….

얼마 안 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잔뜩 타 있을 줄 알았는데 안에 있는 건 백화점 안전 요원뿐이었다.

정이한과 함께 냉큼 올라타자 매니저 형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따라 타려는 뻔뻔한 사람들이 몇 있긴 했지만, 안전 요원에게 제지당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 백화점 안전 요원에게 감사 인사와 사과의 말을 전하는 매니저 형을 따라 우리도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러자 인상 좋은 안전 요원분이 허허 웃으면서 가끔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영업방해로 고소당해도 할 말이 없는데 상냥하시네…….

매니저 형과 안전 요원 두 분의 도움을 받아 밴으로 돌아온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밴 안에서 기다리며 우리를 걱정하던 멤버들도 이제야 좀 안심된다면서 몸의 힘을 풀었다.

“그런데 다들 뭔가 많이 샀네요?”

한숨 돌리고 보니 쇼핑백들이 밴 안에 꽤 많이 실려 있었다. 이서호가 새로 산 옷을 자랑하려는 듯 쇼핑백 하나를 집어 들었는데, 유찬 형이 조금 이따가 개시하자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덩달아 씨익, 입꼬리를 올린 이서호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 옷 산 게 그렇게 좋은가. 내 선물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조금 꾸깃꾸깃해진 쇼핑백을 손으로 꾹꾹 눌러 편 나는 선물들을 내 다리 위에 소중히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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