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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159화 (159/320)

159.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게는 무척 익숙한, 다정한 빛을 띤 눈동자가 날 지그시 응시하면서 곱게 접혔다.

“네가 웃을 때. 하온이가 웃으면 나도 행복해지거든.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받는 너를 본다면…….”

정이한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잠시 후 다시 나를 보는 눈은 바닥이 훤히 비쳐 보이는 호수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게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슬플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도 같이 행복해질 거야. 하온이가 행복하다면.”

나는 조금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정이한의 감정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이 내 안을 가득 채우면서 넘실거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품 안에 가득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응? 뭐가?”

“저를…….”

목이 메어서 뒤로 갈수록 말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다시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냈다.

“좋아해 줘서요.”

정이한은 가볍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고마워할 거 없어. 널 좋아하게 된 건……. 나한테는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하온이한테 미안하지.”

“네? 또 뭐가요?”

정이한의 눈동자가 일순 짓궂은 장난기로 물들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내 뒷덜미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목덜미를 스치는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림과 동시에 나를 끌어당기는 힘에 끌려갔다.

쪽.

이마에 닿아 온 감각에 깜짝 놀라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이마에 뽀뽀했잖아!

“으, 으억?”

나는 스스로 듣기에도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런 날 보는 정이한은 반대로 아주 즐거워 보였다.

“꼬신다고 했잖아.”

“그, 그렇다고 이렇게, 막, 어, 막, 갑자기 뽀뽀하고 그러면 안 되죠!”

나는 두 손을 교차시켜 이마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면서 횡설수설했다.

“이마까지는 봐줘……. 이다음부터는 네가 허락해 주면 할게.”

이다음? 이다음이라니! 다음에 뭐가 있는데!

절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입술을 매만지던 정이한이 날 보면서 빙긋 웃었다.

“한 번 더 해도 돼?”

미, 미쳤나 봐! 정이한 갑자기 왜 이렇게 뻔뻔해졌어!

“악! 하긴 뭘 해요! 전 씻으러 갈 거예요!”

방에서 후다닥 도망쳐 나와 곧장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뒤에야 나는 갈아입을 옷을 놓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엄한 욕실 벽만 머리로 콩콩 찍으면서 당혹감을 다스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온아.”

“윽.”

정이한이다……. 하, 이거 열어줘도 되나?

“갈아입을 옷 가져왔는데 혹시 지금… 벗고 있어?”

아니, 왜 이 말이 야하게 들리는 거야!

“……아, 아니거든요!”

어쩐지 민망함이 몰려들어 문을 벌컥 연 순간 품에 내 옷을 안고 있는 정이한과 대놓고 눈이 마주쳤다. 정이한은 내 품에 갈아입을 옷을 안겨주고는 아주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줬다.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비에 쫄딱 젖어서 낑낑거리는 어린 고양이를 주워다가 정성껏 키웠는데……. 그 고양이가 알고 보니 여우라면 이런 느낌일까?

***

밤새 잠 한숨 못 잤으면서 정이한은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또렷한 눈매로 내 곁을 맴돌았다. 평소보다 안무 몰입도도 높았고, 어디서 체력을 끌어온 건지 종일 지친 기색이라곤 없이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우울한 것보다는 백번 나으니까 다행이긴 한데, 나 혼자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날 대하는 태도는 평소랑 똑같았다. 생각해보면 이미 날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딱히 달라지지 않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날 어떻게 꼬시려는 건데……?

“하온아, 박자 밀렸다.”

“앗, 네!”

연습 중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날 꼬시겠다던 정이한의 말을 억지로 몰아낸 뒤 나는 안무에 집중했다. 연습실에 울리는 발소리는 한 사람이 추는 것처럼 딱딱 맞아들어갔다.

“한 번 더 하자.”

강현 형은 맨 처음 대형대로 움직이며 헐떡이는 우리를 모았다. 그렇게 우리는 연습에 집중한 채 오전 시간을 보냈다.

굶주림과 계속된 연습으로 누적된 피로에 정신과 몸이 모두 지쳐갈 무렵이었다.

“이제 점심 먹자.”

강현 형의 허락에 이서호는 소고기를 부르짖으며 폴짝폴짝 뛰었고, 나는 방전된 체력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들어…….

차가운 연습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었더니, 정이한이 수건을 가져다줬다. 잔뜩 흐른 땀을 대충 닦아내자마자 물병을 건네준다. 이것도 평소랑 비슷한데…….

“고마워요, 형.”

“응.”

달라진 건 역시 저 방긋방긋 웃는 얼굴뿐이다. 평소에도 나만 보면 잘 웃긴 했는데, 오늘은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꽃이 만개하는 듯 화사한 미소였다.

“이한이 뭐 좋은 일 있어?”

“어?”

유찬 형이 우리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 오면서 물었다. 내 허벅지를 베고 누운 유찬 형을 힐끔 본 정이한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니?”하고 대답했다.

“아니긴. 뭔가 있는데.”

의심의 눈초리로 정이한을 보던 유찬 형은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뭐. 그렇게 웃을 일 있으면 좋은 거지.”

“형들, 뭐해? 배 안 고파? 얼른 소고기 먹으러 가자!”

체력이 넘치는 이서호가 방방 뛰면서 달려오더니, 누워있던 유찬 형의 팔을 단숨에 잡아끌어 일으켰다.

“씻으러 가자!”

“어어, 그래. 하온아, 너도 갈 거지?”

“네. 그래야죠.”

정이한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도 되나. 나 진짜 평소처럼 대해도 되는 거야? 어쩐지 확신이 없어 잠깐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내밀었더니, 아주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된 거지.

***

개인 샤워 부스에서 머리까지 바짝 말린 뒤 나왔더니 형들이 공용 탈의실에 모여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마지막이네요.”

나는 걸음을 재촉해 들고나온 트레이닝복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요즘 츄리닝 너무 빨아서 헤진 것 같아……. 새로 사고 싶은데 밥 먹고 백화점 같이 갈 사람?”

이서호의 원대한 나들이 계획은 강현 형으로 인해 단칼에 잘려나갔다.

“연습해야지 어딜 가? 그리고 디어리들이 잔뜩 보내줬잖아. 그거 입어.”

“우우…! 그래도 옷 사고 싶단 말이야!”

연신 입술을 삐죽거리던 이서호가 잠깐의 일탈을 원한다면서 소리쳤다. 한계에 달한 모양이네. 그동안 열심히 하긴 했지.

“……그래. 밥 먹고 백화점 가자. 가끔 기분 전환도 시켜줘야지.”

유찬 형도 요즘 계속 긴장의 연속이었으니 쉬어갈 때도 있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확실히 그건 그랬지. 어떻게 된 게 요 최근이 활동기 때보다 더 피곤하고, 힘들었다.

“우리 곧 뮤비 찍어야 하는데,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완벽하게 다듬어야 하지 않아?”

“두 시간 정도 연습 뺀다고 뮤비 촬영에 지장 있진 않아. 우리 다 휴식이 필요한 건 맞는 것 같아. 나도 좀 지쳤고.”

유찬 형은 선풍기 전원을 끔과 동시에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백화점은 우리가 가기로 한 소고기 가게와 가깝다고 했다.

“정곤 형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

유찬 형이 곧장 매니저 형에게 연락해 일정을 확인하는 동안 우리는 일단 대기했다. 이서호가 잔뜩 긴장한 채 통화하는 유찬 형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이한이 슬그머니 내 뒤로 다가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는데도 정이한은 모르는 척 내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해.”

“……윽.”

꼬신다는 게 이런 거였어? 깜짝 놀란 나는 얼른 손으로 귀를 감싸며 뒤를 돌았다.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건지 정이한이 내게서 두 어 발자국 떨어진 채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아, 형. 놀랐잖아요…….”

“응?”

모르는 척 시치미 떼는 정이한이 얄미워서 흘겨봤더니 “하온이가 귀여운 게 잘못이지~”하고 대꾸했다. 목소리가 꽤 커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른 멤버들을 살폈다. 하지만 정이한의 발언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 그렇구나. 하긴, 유별날 것도 없었다. 나 이런 말 평소에도 많이 듣고 살았었지. 특히 유찬 형이랑 정이한한테…….

문득 든 생각인데… 내가 정이한한테 홀라당 넘어가서 사귀게 된다고 하더라도, 멤버들 중 우리 관계를 눈치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아니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가정을 하면 안 되지, 진하온.

말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앞으로도 지금처럼 기습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수시로 듣게 될 것 같아서 조금 두려워졌다. 나를 세뇌하려는 건가? 이러다가 넘어가면 어떡하지…….

“정곤 형이 데리러 온대. 가자!”

적당한 타이밍에 통화를 마친 유찬 형이 그렇게 외쳐준 덕에, 간신히 복잡미묘한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싸아!”

“하온아, 가자.”

정이한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아오더니 가볍게 끌어당겼다. 이, 이것도 꼬시는 건가? 아닌가? 평소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나 진짜 정이한이랑 너무 붙어 다녔나 봐. 어떤 게 꼬시려고 하는 행동인지 구분할 수가 없네…….

“푸흡, 하온아.”

“……네?”

“그렇게 신경 쓰여?”

나는 잠깐 사이에 꽤 거리가 벌어진 멤버들의 뒷모습을 힐끔거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신경 쓰여서 못 참겠는 정도라고!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만 해줘. 그러면 조심할게.”

“……불편하다기보단, 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나하나 신경 쓰게 돼요. 이게 정상인 건가…….”

정이한은 내 대답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편안하게 해도 괜찮아.”

“형 상처 주기 싫단 말이에요.”

“상처 안 받아. 하온이가 내 마음 밀어내지 않아 줘서……. 나 지금 진짜 행복하거든.”

정이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산뜻하게 웃었다.

“……형, 그렇게 다 좋다고 하다가 저한테 이용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거야 기꺼이. 하온이한테 이용 가치가 있다는 뜻이잖아.”

……말을 말자.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이러나저러나 내가 좋은가 봐. 황당한 마음과는 별개로 입꼬리는 절로 씰룩거렸다. 되게 민망하고 어색한데, 기분은… 조금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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