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정이한은 ‘다르다’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아까와 다르게 괴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처럼 안아줘도 되는 건가…….
꼭 안은 채로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정이한의 진심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전처럼 편하게 그를 대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직 데뷔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인이잖아.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연애사업 같은 건 전부 뒤로하고 그룹 활동에만 매진해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 정이한이 내게 아주 특별한 사람인 건 분명했지만, 서로를 향한 나와 정이한의 감정은 결이 달랐다.
내게 정이한은 다른 형들과 똑같이 소중한 멤버였고, 가족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뿐이었다.
나는 내 행동이 정이한에게 상처를 줄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한 태도로 그를 달랬다. 정이한은 쌓인 설움을 터트리기라도 하듯 계속 울었다.
한참을 울다가 잠깐 내 쪽을 올려다보고, 내가 웃어주면 잔뜩 젖은 눈을 한 채로 따라 웃다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또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걸 몇 번 반복한 뒤에야 서서히 울음이 사그라들었다.
“히끅…….”
딸꾹질까지 하네.
“물 갖다 줄까요?”
“아니, 히끅, 그냥, 여기 있어 줘.”
“알았어요. 얼굴 좀 닦아요. 엉망이네.”
티슈를 몇 장 더 뽑아서 건네줬더니 잔뜩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찢어진 휴짓조각이 뺨에 달라붙어 있어서 무의식중에 떼어 주려다가 나도 모르게 주춤하며 멈칫거렸다.
“……아.”
정이한이 허공에 애매하게 멈춰선 내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어둑어둑하게 물드는 눈동자를 보면서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나한테 닿는 거 싫어?”
아, 이거 봐. 또 오해했잖아. 나는 얼른 정이한의 뺨에 붙은 휴짓조각을 떼어 주면서 대꾸했다.
“아뇨. 그건 아닌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예전처럼 편하게 만져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이건 또 오해할 만한 발언인 것 같은데…….
상처 줄까 봐 못 만지겠다? 하지만 이 말이 고백받은 이상 예전이랑 똑같이 지낼 순 없다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르지.
어쨌든 정이한과 내 온도가 다른 이상 나 혼자 마음 편해지자고 정이한에게 무조건 참으라고 할 순 없는 거잖아.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정이한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나…… 원래는 고백할 생각 없었어.”
“……아.”
“그런데, 어제 자려고 네 옆에 누웠을 때부터……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어. 내가, 하온이 너를 단순한 동생으로 보지 못하는 내가 그 사람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더라고.”
“……다르다니까요.”
정이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밤새 하온이 너한테 미안해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너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는데 난, 음침하게 네 온기에 혼자 마음을 빼앗겨서 왜 너에게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품게 된 건지……. 그게 속상하고, 화가 났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원래 마음은 뜻대로 할 수 없는 거기도 하고.”
감정이란 녀석이 이성에 지배되는 쉬운 놈이었다면, 전생의 나도 한결 편안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안 되니까 계속 마음을 기댈 사람을 찾고, 찾고, 또 찾은 거잖아.
그런 사람이 나타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성은 포기하라고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그때 당시의 내 상황에 겹쳐보면, 정이한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안 돼. 이럴 때는 ‘형, 저 포기해요.’하고 따끔하게 말해주는 편이…… 오히려 나아.”
“……그, 그래도 돼요?”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너무 단순하게 속내를 드러내 버렸잖아! 더 좋은 말로 거절해도 됐었는데…….
정이한이 잔뜩 상처받았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올곧은 시선으로 날 보는 정이한은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응. 왜냐하면 알고 있거든. 하온이에게 디아스가, 그리고 디어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렇게 말한 정이한은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내 손을 건드렸다. 만져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한 것처럼,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워 꼭 깃털이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하온아, 나는 꿈을 좇는 너를 사랑해.”
툭툭 건드리던 손가락이 이내 단단히 얽혀들었다. 익숙한 온기가 아닌 유달리 뜨거운 체온이었다.
“내 마음 때문에 네 빛이 흐려지는 건 원치 않아.”
너무나도 진지하게 부딪혀오는 감정에 선뜻 단어를 골라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 받아주지 않아도 돼. 하지만 딱 하나만 바라도 될까?”
“……뭔데요?”
정이한은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내가 도망가기라도 할 것 같은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준 채였다.
“계속 너 좋아해도 돼?”
“……아.”
잔뜩 긴장한 정이한이 날 올려보고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그저 하염없이 나만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마치 선고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형대 위의 사형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사람 마음이 접으란다고 마음대로 접히는 건 아니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그러세요, 하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기도 했다.
“역시, 이런 거 물어보는 것도 좀 민폐겠지…….”
“그, 그건 아닌데요.”
“……그럼 좋아해도 돼?”
실낱같은 기대를 잃지 않은 맑은 눈동자가 내게 쏘아졌다. 안 된다고 하면 저 눈에 다시 눈물이 가득 찰 것 같아서 싱숭생숭했다.
“아, 으…….”
“……안돼?”
좀처럼 대답이 떨어지지 않자 정이한이 양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이런 상황에 놓인 게 처음이라 어떤 답을 들려주는 게 최선일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내 의사부터 확실하게 전달하기로 결심했다.
“형, 저는 지금 여,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우리 디아스 이제 막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응. 알아. 내가 제일 잘 알지. 난 그냥, 널 좋아하는 걸 허락해줬으면 좋겠어…….”
“……안된다고 하면 접을 순 있고요?”
정이한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래 좋아했거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정이한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이한의 고개가 나를 따라 이동했다.
돌이켜 보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정이한은 언제나 제 시야에 나를 가득 담고 있었다. 다른 곳을 보다가 정이한을 발견하면 언제든 눈이 마주쳤고, 어느 순간부터는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데요?”
“모르겠어. 아마 처음부터 아닐까? 자각한 건…….”
말을 멈춘 정이한이 길쭉하게 뻗어 예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내 허벅지에 팔꿈치를 괸 채 물끄러미 올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무인도에서 리얼리티 찍었을 때…….”
“응? 거기서요?”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거려봤는데 아무리 곱씹어 봐도 평소 우리끼리 있을 때와 별다를 게 없었다. 도저히 모르겠네.
“……등목하겠다고 너 옷 벗었잖아. 그때 자각했…어. 미안, 나 변태 같지.”
벗은 걸 보고…? 이, 이건 예상치 못한 한 방인데…….
“미안한데 조금 그렇긴 하네요…….”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에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으윽. 나 기분 나쁘지…….”
“어? 아뇨? 그렇게 막 기분 나쁘진 않아요. 그냥 그랬구나, 싶어요. 상황이 좀 변태 같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더니 정이한이 나를 따라 조금씩 웃음을 흘렸다. 정이한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한 분위기가 지금, 이 순간에 다시 찾아왔다. 마치 고백받기 전의 우리처럼.
아, 그렇구나. 정이한이 내게 바라는 건 좋아하든, 말든 자신을 변함없이 대해주는 나였다. 그저 제 감정을 인정해 달라고. 그거면 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비록 지금 당장 마음을 받아줄 순 없겠지만…… 정이한이 용기를 낸 만큼, 나도 한번 맞닥뜨려 보기로 결심했다.
“알았어요.”
“……어? 뭐가?”
“저 계속 좋아할 거라면서요? 그거 알았다고요.”
“그, 그래도 돼?”
얼굴빛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정이한의 낯빛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네. 그걸로 형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요. 생각해 보니까 형의 감정은 형 건데,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도 제가 허락해야 형이 편해진다면…… 할게요. 허락.”
“내 감정은 내 것…….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였구나…….”
“네? 당연하죠. 애초에 좋아한다는 감정은 누군가한테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정이한은 꼭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입술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눈동자에 이채가 돌더니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면 나 너 꼬셔도 되는 거야?”
“……네?”
응? 얘기가 왜 그렇게 되지? 어, 어라? 뭔가 이상한데?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정이한이 천천히 운을 뗐다.
“뭐 대단한 걸 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언젠가 네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정이한은 눈꼬리를 사르륵 접어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주길 바라서 그래.”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요.”
“5년 뒤, 10년 뒤여도 괜찮아. 나는 평생 널 사랑할 테니까.”
언젠가, 정이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줄 것 같다는 든든함을 느낀 적 있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영원한 내 사람. 지금 드는 기분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였나. 나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니 무언가 이상했던 순간들이 제법 떠올랐다. 정이한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 보니 그는 매 순간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제가 다른 사람 좋아하면 어떡하려고요.”
“그건 그것대로 좋은걸.”
“네? 저 좋아한다면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묻자, 정이한은 가볍게 어깨를 떨면서 웃었다.
“내가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젠지 알아?”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