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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157화 (157/320)

157.

“네가 그랬잖아. 우리가 신경 쓰고, 스트레스받는 게 속상하다고…… 근데 하온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네 자유를 속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랑 마주칠 때마다 너 계속 우리 눈치 보잖아.”

“그 사람이 형들한테 나쁘게 할까 봐 그랬죠…….”

강현 형 어깨를 부여잡았던 것처럼. 형은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나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됐을 수모를 겪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뭐야, 그건 우리가 해야 할 말이거든? 그 자식이 해코지해봤자 몇 대 맞기밖에 더 하겠어? 그런 건 몸의 상처로 끝나. 그보다 무서운 건…….”

이서호는 말을 하다 말고 뚝 멈춘 채 나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마구 헝클어트리더니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왜? 내가 마음에 상처 입는 일이라도 겪을까 봐?”

“아! 이, 일부러 말 안 했는데!”

꼭 그걸 말로 꺼내서 확인받아야 직성이 풀리냐면서, 입 밖으로 뱉기도 끔찍하니까 앞으로 금기어로 지정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마음의 상처. 솔직히 이서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줄은 몰랐다. 무슨 일 생기더라도 남자끼리니까 뭐 좀 징그럽게 만지고 끝나는 정도일 텐데, 그 정도로는 불쾌감은 느낄지언정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이런 일에 상처받기에는 난 이미 별일 다 겪었거든. 그래도…….

“서호 형, 걱정해줘서 고마워.”

“뭐, 뭘 그런 당연한 걸 가지고 고맙대? 고마울 것도 많다!”

이서호는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옆얼굴을 보이며 드러난 이서호의 귀가 홍시처럼 잘 익어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다 같이 거실에서 잘까?”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를 지워낸 유찬 형이 큰 목소리를 냈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인지 형의 목소리 톤은 평소보다 밝고 높았다.

“우리는 팀이니까! 역경을 함께 극복하자는 의미로 꼭 붙어서 단체 취침! 어때?”

그렇게 제안한 유찬 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밝게 웃었다.

“좋아요!”

분위기 환기를 돕기 위해 발랄하게 대답하면서 방긋방긋 웃었다. 그런 우리를 보던 이서호가 쾌활하게 대꾸했다.

“우왓! 나도 좋아! 수학여행 온 기분 날 것 같아!”

소파를 벽으로 바짝 밀어놓는 걸 돕기 위해 일어났더니, 강현 형이 조용히 날 제지했다.

“먼저 씻어. 우리가 준비해 둘 테니까.”

“응? 괜찮아요. 저도 같이 밀게요.”

“힘든 것도 아닌데, 너까지 나설 필요 없어.”

강현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손을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내 머리카락에도 채 닿지 않은 손을 거둬가 버렸다.

“왜요? 머리 쓰다듬어주려던 거 아니었어요?”

“……괜찮아?”“네? 뭐가요?”

“그 새끼 때문에 이런 거… 불쾌하게 느낄까 봐.”

엥? 여기서 소파남이 왜 나와? 강현 형이 내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내가 영 못 알아듣고 갸웃거리자 강현 형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그러더니 곧 툭, 하고 내 머리 위로 손이 올라왔다.

“네가 괜찮으면 됐어.”

“전 형이 쓰다듬어주는 거 좋아해요.”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이 우뚝, 멈추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마구 헝클어트려 대기 시작했다.

“억, 어어억, 어지러워요!”

오뚝이 인형처럼 머리가 앞뒤로 흔들린 탓에 해롱거렸더니 강현 형이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도 좋아?”

“우, 좀 봐줘요.”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정리하면서 볼멘소리를 냈다. 그동안 형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나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아, 또! 또 저렇게 사람 홀리는 얼굴로 웃지…….

아, 같은 남자지만 진짜 심장에 유해한 형이라니까.

“……그럼 저 씻고 올게요!”

내 심장의 안녕을 위해 도망치듯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

무언가가 옆구리를 콕콕 건드리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뭐, 뭐야? 잠결에 놀란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눈만 끔벅거렸다.

아, 맞아. 다 같이 거실에서 잤지.

그렇다면 범인은 한 명뿐이지. 이서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서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내 옆구리를 꾹꾹 밀어 대고 있었다.

“우으응……. 나도… 먹을…….”

그 순간, 잠꼬대를 웅얼거린 이서호의 팔이 내 얼굴 쪽으로 뻗어 왔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덕에 얼른 베개로 막아 방어할 수 있었다. 꿈에서라도 많이 먹으렴…….

한 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이서호였기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녀석을 데굴데굴 굴려서 베란다 창문 가까이 붙여버렸다. 이만큼 떼어 놨으면 내가 빠져도 형들한테 가서 들러붙지 않겠지.

새벽 6시.

더 자도 괜찮겠지만, 일어나기에 아주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기지개를 쭉 켜면서 보니 내 자리 이외의 빈자리가 하나 더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이한이 없네? 이 시간에 일어났을 리는 없고, 화장실이라도 갔나? 나오면 바로 씻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갈아입을 옷을 챙기려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둠 속에서 정이한이 홀로 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까, 깜짝이야…….”

거실에서 자는 형들을 위해 방문을 닫았더니 앞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방불을 켜니 그제야 정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온아.”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사람이 아닌데. 뭔가 잠 못 들게 하는 걱정이라도 있는 걸까? 설마 나 때문에 못 잔 건 아니겠지…….

“왜 그래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

정이한이 입술을 꽉 깨물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정이한의 허벅지를 짚으면서 올려봤다. 그제야 애처로울 정도로 흠뻑 젖은 채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이 선명하게 보였다.

“왜 울어요. 설마 밤새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죠?”

협탁 위에서 티슈를 뽑아 들면서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눈물이라도 닦아 주려고 손을 뻗은 순간 갑자기 정이한이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쳐냈다. 그 바람에 놓친 티슈가 팔랑거리면서 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어.”

“아. 아니, 미안.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놀라서, 지금. 아……. 미, 미안해. 미안해, 하온아. 미안해…….”

“에이, 괜찮아요. 이 정도로 뭘 그렇게까지 사과해요?”

일부러 가볍게 말하면서 주운 티슈를 정이한의 손 위에 올려줬다. 정이한은 내가 건네준 티슈를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얼굴을 훔칠 생각은 않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저한테 말 못 하는 고민이에요?”

“……아니.”

“그럼 말해줄 수 있어요?”

“…….”

정이한은 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뒷말을 들을 순 없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나한테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인 듯싶다. 가뜩이나 힘들어하는 사람한테 억지로 말하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형, 잠은 잤어요?”

“으응. 잤어…….”

“에이, 못 잔 것 같은데요? 우리 형 다크서클 심한 것 봐.”

아까처럼 놀랄까 봐 아주 천천히 정이한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정이한이 내 손을 보고 있는 걸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뺨에 손을 얹었다. 가볍게 떨린 뺨은 열이라도 오른 것처럼 뜨거웠다.

“뺨이 왜 이렇게 뜨거워요? 열나요?”

“문질러서 그런가 봐…….”

웃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당겨 올라간 입꼬리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게 왠지……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았다. 아니, 높은 확률로 나 때문에 이러는 게 맞겠지.

정이한의 눈물은 지독하게 떫은 과육을 베어 문 것처럼 날 씁쓸하게 했다. 그 탓에 정신을 단단하게 조이지 않으면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쓰디쓴 숨을 몇 번이나 억지로 삼켰다.

내가 어떻게 해야 정이한을 달래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혼자 두는 게 맞을까? 아니면 옆에 있어 줘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침묵 속에 흐르는 가느다란 흐느낌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너무 가슴 아프고 괴로워서,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형 속상한 거 저 때문이죠…….”

“아, 아니야. 하온이 때문이 아니라, 나, 내가, 내가 너한테, 괴물처럼 느껴질…….”

“무슨 소리예요? 저한테 형이 괴물일 리 없잖아요.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정이한이 격하게 도리질 치며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 아냐, 나는, 난 그 사람이랑 똑같아……. 너, 너한테 못된 짓 했던 그 사람이랑…….”

누구? 설마 소파남 말하는 거야?

“누구요? 김호채 선배님이요?”

“내가……. 내가, 널, 좋아해……. 하온아, 미안……. 미안해……. 그 사람처럼, 나, 흐윽, 나도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나도 똑같아…….”

어…….

일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멍청하게 굴러가지 않는 뇌를 어떻게든 다시 굴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아, 잠깐만… 머리가 안 굴러가!

잠깐 진정하자, 진하온.

그러니까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고. 일단 정이한은 나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친한 형으로서 동생을 좋아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어, 그러니까. 으음……. 동생으로서가 아니라는 건…가요?”

정이한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떨고만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이한은 나를 특별한 의미로 좋아하고 있었다.

이, 이럴 땐 어떡해야 하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하는 사이 정이한의 흐느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일단 정이한부터 달래고 그 뒤에 생각해야겠다.

나는 정이한이 눈치 못 채게 연거푸 심호흡한 뒤 양어깨에 터억, 손을 올렸다. 깜짝 놀라서 크게 움찔거리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형.”

동시에 정이한이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봤다. 크고 선한 눈망울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훔쳐주며, 나는 방긋 웃었다.

“제가 형한테 제일 특별한 사람이라는 소리잖아요. 그런 사람을 제가 왜 괴물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내가 징그럽지 않아? 끔찍하잖아. 혐오스럽다거나…….”

“아뇨. 전혀 안 그래요. 오히려 기쁜데요?”

“기……뻐?”

나는 연신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빠르게 깜박거리는 눈동자에서 아직 그치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미치겠네. 설마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면 징그럽다고 할까 봐 무서워서 울고 있었던 거야?

“그럼요. 그 사람은 그냥 절 한번 가지고 놀아보고 싶은 것뿐이잖아요. 형은 제일 소중하게 여겨주는 거고요. 그 마음이 어떻게 같아요? 전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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