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56화 (156/320)

156.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요, 저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말했다시피 전부 다 연기한 거고, 일부러 듣는 사람이 오해하게끔 고른 단어니까요.”

형들이 조금이나마 진정하길 바라는 마음에 감정을 싣지 않은 어조로 최대한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별 소용 없는 것 같았다.

강현 형은 여전히 애꿎은 소파 팔걸이를 작살 낼 기세로 움켜잡았고, 정이한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만 내려보고 있었다. 저 작은 머리통이 날 혼자 보낸 것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런데 시끄럽게 굴 줄 알았던 이서호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정이한과 나란히 앉은 이서호는 데칼코마니라도 되는 것처럼 허벅지 위에 주먹 쥔 두 손을 얹은 채 떨고 있었다.

정이한과 다른 건, 청바지 위에 검은 점이 방울방울 번지고 있다는 거였다. …아, 왜 조용한가 했더니 울고 있었네.

내 계획이 필연적으로 형들에게 상처 줄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대로 피해 다니기만 한다면 언제까지고 질질 끌려다닐게 뻔하잖아.

우리 쪽에서 협조하지 않으면 연예계 활동이 힘들어질 정도의, 강력한 한 방을 먹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소파남 측 소속사가 ‘자신들의 아티스트’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와 겹치는 일을 피하려고 할 테니까.

“저, 이다음에 선배님이 불러내면 나갈 거예요.”

그걸 위한 첫 단계였기에 다짜고짜 폭탄부터 투하했다. 대형 폭탄인 만큼 형들에게서도 즉각 반응이 왔다. 펑펑 울면서 미쳤냐고 소리치는 이서호부터, 어느 때보다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 세 글자를 힘주어 부르는 강현 형까지.

“하지만 그땐 절대 밀폐된 곳까지 안 갈 거예요. 그 전에 쓰러질 거거든요.”

“…뭐?”

인상을 찌푸린 유찬 형이 기함했다. 손등에 힘줄이 시퍼렇게 돋을 정도로 소파 팔걸이를 움켜쥐던 강현 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 새끼 지금 조지고 오면 못 만나겠네.”

“악! 형! 당연히 안 되죠!”

“강현아, 이번만큼은 안 말릴게. 제대로 먹이고 와.”

“네? 유찬 형까지 왜 그래요. 말려야죠!”

“……나는 같이 갈래.”

“나도 갈 거야!”

울먹거리는 얼굴의 정이한이랑 이서호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들, 제발 진정해요…….”

말리지 않으면 정말 뛰쳐나갈 것 같아서 사력을 다해 강현 형을 와락 끌어안고 버텼다. 형은 차마 날 강하게 내치지 못하겠는지 목 끓는 소리를 내다가 외쳤다.

“어떻게 보내! 저 녹음본까지 들어놓고, 우리가 어떻게…….”

강현 형은 격한 감정을 토해내다가 두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을 실어 내 양팔을 꽉 붙들었다. 나는 형의 손등을 토닥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 자신 있어요.”

“하온아……. 그러지 마. 지금 녹음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응? 그냥 정곤 형한테 이거 보내자……. 실장님한테 부탁하자…….”

정이한은 거의 내게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젖어 든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예상은 했는데, 막상 진짜 우는 모습을 보니까 내 예상보다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속상해 죽겠네…….

솔직히 말하면 누구보다도 내가 소파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쓰러질 때 멱살이라도 좀 잡아야 속이 풀리겠어.

“싫어! 너 혼자 못 보내! 정 가야겠으면 나도 데려가. 무조건 데려가!”

이서호가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덩달아 목소리가 커질 뻔했지만, 나까지 흥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침착하게 대꾸했다.

“안 돼. 협박에 굴복해서 회사랑 멤버들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몰래 나온 것처럼 가장할 거니까.”

“그치만……. 그렇지만, 계, 계획대로 안 되면 어떡해? 응? 일이 틀어져서 진하온 너한테, 씨이,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냐고오, 흐윽…….”

잠시 그쳤던 이서호의 눈물이 다시 펑펑 터져 나왔다.

“그래, 하온아. 이한이 말대로 하자. 지금 당장 정곤 형한테 이거 보낼게. 회사에서 대응하게 두고 우린 손 털자.”

“안 돼요, 유찬 형. 저는 주한 형 꿈도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 소속사에서 일방적으로 터트린 그림이 되면 곤란해요.”

“……너 우리 마음은 생각해봤어?”

침울하게 돌아온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했지. 왜 안 했겠어. 주한 형을 위하는 마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생각했었다.

“했어요. 형들이 이렇게 반대할 것도 예상했고, 많이 놀라고 걱정할 거란 것도 알았어요. 그런데요. 형들이 저를 좋아하는 만큼, 저도 형들을 좋아해요. 그래서 그래요…….”

형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결심했으니까.

“그 사람 때문에 형들이 마음고생 하는 거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속상해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하고 싶어요. 제발, 저 한 번만 믿고 따라 와줘요…….”

소파남이랑 있을 땐 연기까지 동원해 쥐어 짜내야 했을 정도로 퍽퍽했던 눈이 왜인지 시큰해졌다. 하지만 지금 울면 역효과가 날 것만 같아서 눈물을 떨구지 않도록 눈매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네 마음은 알겠어. 근데 일단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줘. 잠깐 애들이랑 이야기 좀 할게.”

“네. 저 방에 들어가 있을까요?”

“……그래, 그러면 좋겠다.”

나는 형들을 거실에 남겨두고 혼자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막혀 있던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형들에게는 대충 연기할 거라고 설명했지만, 나는 상태 이상을 터트릴 생각이었다.

만약 처음에 제대로 된 걸 못 뽑으면 연타 패널티로 며칠은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날 걱정할 멤버들, 매니저 형, 실장님, 그리고 우리 디어리에게 너무 미안해진다.

상태 이상 피하려고 발악해도 모자랄 판에 일부러 터트리다니.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너무 무모한가 싶었지만, 꾀병으로 쓰러진 척만 했다간 들킬 위험도 있잖아.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혹시’와 ‘설마’를 배제하고 한 번 할 때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

“하온아, 우리 의견 모았어.”

얼마나 지났을까, 유찬 형이 방문을 두들겼다. 거실로 나가니 테이블을 한쪽으로 미뤄둔 채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다.

“앉아. 이야기하자.”

유찬 형이 맞은 편을 가리켰다. 정이한과 이서호 사이의 공간에 들어가 앉자 유찬 형의 시선이 곧장 나를 따라왔다. 내가 자리에 앉은 뒤 형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결심한 것처럼 나를 봤다.

“하온이 네 계획을 먼저 들어보고, 내가 대표로 판단하기로 했어. 무작정 안 된다고 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네가 생각했다는 계획부터 먼저 얘기 좀 해 보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었기에 각오한 일이었다.

“좋아, 그럼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어볼게. 녹음 파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요. 협박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이고, CCTV를 보면 과한 접촉까지는 없었다는 게 증명되니까요. 아마 두 소속사 간에만 긴밀히 협의하게 될 거고, 외부에 알려지는 일 없이 지나갈 거예요. 그렇게 되면 분명, 시간이 흘러서 소속사의 감시가 느슨해지는 순간 복수하려고 들겠죠.”

유찬 형은 내 말을 곱씹어 보는 듯 가만히 시선을 내리깐 채 사색에 잠겼다. 대표로 유찬 형이 대화를 주도하기로 했는지, 다른 형들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 네가 하려고 하는 건, 판을 키우는 거야?”

“네. 제가 그 사람의 함정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제가 파 놓은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도록 만들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상황에서 네가 쓰러져야만 한다는 거지? 그 기점부터 루머의 시작점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고?”

이성을 되찾은 유찬 형은 작은 힌트로도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추리했다.

“맞아요. 제가 원하는 건 ‘문라이트의 김호채가 디아스의 진하온을 괴롭히는 것 같다.’라는 소문이에요.”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하려고?”

“불씨를 만들었으니 다음은 익명의 게시글만 있으면 돼요.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합숙소 내부 사진이 있는 인증 글이면 좋겠죠.”

나는 휴대폰 앨범에 저장한 합숙소 내부 사진을 형들에게 보여주면서 말을 덧붙였다.

“형들도 알겠지만, SNS에서 시작되는 루머만큼 골치 아픈 게 없잖아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사실인 것처럼 퍼져나가죠.”

“하지만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봤자 좋을 게 하나 없잖아. 굳이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네, 없죠. 그러니까 저건 소문으로만 끝나야 해요. 저 소문을 진정시키려면 ‘소문 속의 피해자’인 저희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어떤 경로든지 우리가 부정을 해줘야 한다는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맞아요. 하지만 제가 괴롭힘당한 건 사실이니까 그걸 부정해주는 대가를 받는 것쯤, 쉽지 않겠어요? 대형과 중소의 싸움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가 되는 거니까요.”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문라이트의 활동기는 디아스와 겹치지 않는다. 문라이트와 디아스는 동시에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으며, 선 교섭권은 디아스가 갖는다……같은 딜도 가능할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어쩌면 O.D.I 하차도 요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실 거기까지가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O.D.I 하차까지 이뤄진다면 주한 형도, 하윤이도 소파남과 멀어질 테니까 피해 볼 걱정도 없잖아.

“루머가 재발화 되면 곤란할 테니 그전에 너를 포기할 거라고 가정하고, 그걸 노리겠다는 거지?”

“맞아요.”

확신하건대, 계획대로 잘 된다면 소파남은 내게서 손을 뗄 확률이 높았다.

나와 소파남은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메마른 강바닥 같은 사이였다. 소파남이 처음 내게 느낀 건 그냥 단순한 흥미 정도였을 테지만, 뜻대로 안 되니 성질머리를 못 이겨서 집착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커리어와 나를 바꿀 가치가 없다는 뜻이었다.

“네가 왜 위험해질 걸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일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지금 떨구는 편이 너도, 우리한테도 좋으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할게.”

형은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을 멈추고 또렷한 눈으로 나를 봤다. 이 마지막 질문이 고 앤 드랍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만약에, 우리가 이걸 회사에 알린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할 거다. 정곤 형부터 시작해 모두가 날 감시하려 들 테지만, 어떻게든 감시망을 피해 일을 진행할 방법은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형들에게 말해도 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답은 둘 중 하나잖아. 포기하고 이 일을 회사에 맡긴다, 포기하지 않는다.”

아…….

어쩐지 이 질문의 의도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형들은 내게 안전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신 뒤 유찬 형과 눈을 마주치면서 천천히 말했다.

“……포기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할 거라는 거지?”

“네.”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다.

형들, 미안해요…….

“알겠어. 그럼 도울게. 어떻게든 할 거라면 우리가 협조하는 편이 안전하겠지. 대신 조건이 있어. 이후 그 사람한테 오는 모든 메시지는 우리에게 공유할 것. 시간과 장소를 비롯한 모든 걸 우리랑 같이 상의해서 하는 거야.”

“그럼요. 그건 약속할 수 있어요.”

그럼 됐다고 대답한 유찬 형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조금 슬퍼 보이는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사실은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길 바라지만…….”

그리고는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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