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55화 (155/320)

155.

“……유찬 형과 주한 형이 친구인 건 맞지만, 저희는 부정행위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소파남은 녹음 파일을 뒤로 돌려서 내가 주한 형에게 조언하는 내용을 틀었다.

“글쎄, 이걸 들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소파남이 조금 더 급발진할 수 있게 유도하면 좋을 것 같은데……. 돌아가면 정이한을 잔뜩 예뻐해 줘야겠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물건을 딱 건네주다니.

“지인으로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조언해 준 것뿐이에요. 선배님. 저희는 심사단으로서 객관적으로 평가를 했습니다. 사심이 들어간 건 없어요.”

“어쨌거나 디아스는 이주한에게 합격을 줬고, 이주한은 고민도 하지 않고 미션 곡으로 디아스를 골랐지. 꼭 미션 내용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 얹기 딱 좋은 상황이지 않아?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 없거든.”

나는 벌벌 떨면서 불안한 기색을 잔뜩 드러냈다. 그리고는 소파남을 올려다보면서 팔을 꽉 움켜잡았다. 연기 스탯과 더불어 승리한에게 촬영 내내 혹독하게 굴려지며 빚어낸 나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왜, 왜,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 저희는, 정말…….”

승리한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내 손등을 더듬거렸다. 달팽이 수십 마리가 기어 다니는 듯한 불쾌감에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래.”

소파남은 상냥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음침한 속내가 숨겨지지 않는 말로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느끼해…….

“그러게 제때 전화를 받았어야지. 하다못해 나중에 연락이라도 했으면 내가 이렇게까진 안 했을 거 아냐.”

이 타이밍에서 눈물 한 방울 똑똑 흘려주면 좋겠는데, 아직 연기력이 그 정도 경지에 이르진 못했는지 내 눈은 그저 뻑뻑하기만 했다. 장담하건대 사막의 모래보다 습기가 없을 게 분명했다.

정 눈물이 안 나오려면 포기하려고 했는데,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정현이가 되자!

나는 감정 몰입을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나는 정현이다. 정현이다. 정현이다.

정현이는 눈물 많고 감정 표현에 솔직한 캐릭터였다. 눈앞의 소파남 때문에 형과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설정을 넣고, 정현의 감정에 몰입해 들어가자 순식간에 눈가가 시큰해졌다.

가장 소중한 형.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형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믿을 수 없게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와, 이게 되네!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감정이 깨질 것 같아서 침착하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멤버들이랑 주한 형한테 피, 해 주고 싶지 않아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응. 어려운 거 아니야. 전화 잘 받고, 나오라고 하면 나와. 그거면 돼.”

내 손등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팔뚝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는 소파남의 팔을 내리누르면서 울먹였다.

“마, 만지지 마세요…….”

뿌듯하다. 이 정도면 소파남의 연락을 기다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지금 확보한 녹음 파일 하나로도 충분히 뒤통수 세게 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응? 내가 어딜 만졌는데?”

아니?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지금 만졌잖아, 내 팔! 이러면 조금 전에 쪽팔림 무릅쓰고 날린 회심의 대사를 못 써먹게 되잖아.

나는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눈썹을 늘어트린 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면서 소파남을 올려봤다. 그러자 소파남이 내 머리카락을 슬슬 쓸고는 귓불을 매만졌다.

“그, 그만 만, 지시면 안 될까요, 싫어요…….”

좋아, 오해 사기 딱 좋은 떡밥은 던져졌다. 이제 물기만 하면…….

“싫기는. 너 좀 예민한가 봐? 엄청 움찔거리네.”

와, 이 변태 자식 말하는 거 봐라! 아주 잘했다. 증거 수집을 위해서라면 그까짓 귀 좀 만지작대는 것쯤 아무렇지 않았다. 형들이 소파남 때문에 속앓이한 걸 생각하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지.

“내 제안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마. 소문 흘러나가는 순간 디아스에 더러운 루머 붙고, 이주한은 바로 탈락하는 거야.”

자기한테 그 정도 힘은 있다면서 으스대는 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샐 뻔했다. 진짜 종류별로 다 해줘서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알아들었어?”

“흐윽, 네, 네에, 알겠어요. 그럴게요…….”

“기사님들이 쳐들어올 시간이네.”

소파남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나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 낸 뒤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내 눈물을 보고 오해한 강현 형이 주먹이라도 날리면 곤란하니까.

“그래, 그렇게 굴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하면 재깍 받고. 내가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이라서 말이야. 아는 기자들 번호는 엄청 많지만. 무슨 말인지 알지?”

마지막까지 착실하게 협박한 소파남은 이제 가보라면서 선뜻 나를 보내줬다. 소파남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곤란하니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척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일부러 더 크게 심호흡한 뒤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문 가까이에 서 있던 강현 형과 부딪칠 뻔했다. 막 문을 열려고 했던 듯, 쭉 뻗은 강현 형의 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에 굳어 있었다. 형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뒤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안쪽을 노려봤다.

문이 닫히자마자 정이한이 두 손으로 내 뺨을 문지르면서 고생했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래, 이게 힐링이지.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끼면서 정이한의 손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하온아, 괜찮았어? 기분 나빴지…….”

나는 주머니 속의 녹음기를 꺼내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정이한을 보고 방긋 웃었다. 혹여라도 방에 있는 소파남에게 목소리가 흘러갈까 한껏 낮춘 채 속살거렸다.

“기분이야 나쁘긴 했지만…. 그런데 괜찮아요. 형이 녹음기 챙겨줬잖아요. 어떻게 이런 걸 다 챙길 생각을 했어요?”

“하온이가 증거 모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너는 휴대폰 잘 안 챙기니까 이럴 때 쓸 만한 물건이 없을 것 같아서…….”

나, 나를 정말 잘 아네. 조금 민망해서 헤헤, 하고 웃어 보이자 이번에는 강현 형이 날 추궁하듯 물었다.

“저 새끼가 뭐랬는데.”

“나중에 숙소 가서 말해줄게요. 그보다 연습실로 가야죠. 우리 참가자들 가르쳐주려고 여기 온 거잖아요.”

강현 형은 자세히 듣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일단 소파남과 닿은 손과 팔부터 깨끗하게 씻고 싶어서 화장실로 쌩하니 도망쳐 버렸다.

손을 벅벅 문지르면서 보니 체력이 절반 넘게 뚝 떨어져 있었다. 주한 형 때문이라도 소파남 소속사에 녹음본을 찌르는 건, O.D.I 촬영이 끝난 뒤여야 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전화해서 불러낸다면… 일단 그것까진 나가야 하려나.

나는 귓불까지 깨끗하게 닦아내면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어쩌지. 무슨 좋은 수가…….

아!

나는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에 흡족하게 웃다가 이내 인상을 구겼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계획 자체는 괜찮았지만……. 형들과 디어리 모두를 속상하게 하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소파남을 깨끗하게 떨굴 수 있는 묘수가 이것 말곤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해요. 이번만 걱정 끼칠게요.

***

O.D.I 첫날 촬영이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마지막에 퇴근한 그룹이 되어서, 숙소에 도착했을 무렵엔 밤 11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다들 방으로 들어가지도, 씻으러 가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형들.”

내가 입을 열자마자 나를 꿰뚫을 듯한 네 개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다, 다들 그거 신경 쓰느라 방에 안 들어가고 있었구나.

“선배님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궁금하시죠?”

“어! 하루종일 궁금했어! 말해줄 거야?”

이서호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채근했다.

“당연하죠. 형들한테 얘기 못 해줄 말이 어딨겠어요. 그런데…….”

나는 주르륵 앉아 있는 멤버들과 한 사람씩 눈을 맞추며 잠시 고민했다. 녹음 파일을 들려주면 설득하는 게 더 힘들어질 것 같은데…….

하지만 내 계획을 위해서는 멤버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나중에 녹음 파일을 듣고 제지당하는 것보다는 미리 오픈하고 고 앤 드랍을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꼭 하고 싶긴 한데, 형들이 내가 혼자 실행에 옮기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거 같이 들으려고 하는데요.”

소형 녹음기를 손에 쥔 채 나를 위해 비워둔 자리에 앉았다. 지금처럼 다섯 명이 다 모일 땐 1인석은 항상 유찬 형의 자리였는데 오늘만큼은 내가 주인공인가 보다.

“소파, 아, 소파가 아니라. 선배님이랑 둘이서만 방에 들어갔었거든요. 이한 형이 녹음기를 줘서 그때 나눈 대화를 녹음해왔고요. 그런데요.”

한 템포 쉬어가듯 말을 멈추자 녹음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형들이 나를 봤다. 나는 최대한 표정을 편안하게 풀면서 말을 이었다.

“나중에 공개될지도 모르니까, 그거 고려해서 약점 잡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연기한 거거든요. 저 연기 잘하는 거 아시죠? 그거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일단 다 듣고 이야기해요, 우리.”

나는 녹음기에서 파일을 찾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나와 소파남이 나눈 대화만 흐르고 있었다. 내가 들어도 연기 하나는 진짜 기막히게 잘한 것 같다. 녹음된 음질로 들으니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진짜 겁에 질린 것처럼 느껴졌다.

「마, 만지지 마세요…….」

뿌드득.

강현 형이 소파 팔걸이를 두 동강 낼 기세로 움켜쥐었다. 헐, 형 진짜 무섭다…….

당황한 이서호는 나와 녹음기를 한 번씩 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찬 형은 입술이 허옇게 질리도록 깨물어대고 있었고, 정이한은 무릎 위에 정갈하게 올려 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형들이 저렇게 화낼 만한 건 없었는데…….

아무래도 연기를 너무 잘한 것 같네. 내가 저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꼭 들려줘야겠다.

「싫기는. 너 좀 예민한가 봐? 엄청 움찔거리네.」

녹음기 성능이 예상보다 더 좋네……. 무서워서 헐떡이는 듯한 내 숨소리에 의자가 끽끽거리는 소리까지 곁들여지니 진짜 꼭… 추행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더러운 새끼가.”

결국 강현 형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하온아!”

동시에 유찬 형이 벌떡 일어났다.

“형들! 일단 진정하고 끝까지 들어요. 그리고 저 때 귓불 잠깐 만졌을 뿐이에요. 제가 증거로 남기려고 좀 오버해서 연기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이미 선 넘었잖아, 범죄라고!”

“그래도, 저 하나 눈 꼭 감고 희생해서 거머리 떼어낼 수 있으면 모두에게 좋은 거잖아요. 저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 끝까지 들어줘요.”

“진하온.”

유찬 형이 딱딱한 어투로 나를 불렀다.

“형, 부탁이에요. 들어주세요. 이거 다 듣고 형들이랑 논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

형들이 내 ‘부탁’에 약한 걸 알고 일부러 골라낸 단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형은 역시 내 부탁을 무시하지 못했다.

“……하아. 일단 알았어.”

녹음 파일의 재생 바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주한 형까지 볼모로 잡아 협박하는 내용을 들은 유찬 형은 충격에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벌린 채 연신 헛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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