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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154화 (154/320)

154.

“오래 안 걸릴 거야, 중요한 얘기라 그래. 잠깐이면 되니까 유찬이 네가 하윤이 좀 같이 봐주면 좋을 것 같은데…. 부탁할게, 응?”

“…….”

유찬 형은 입을 꾹 다문 채 난처한 듯 웃기만 했다. 은근하게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 같았는데, 소파남이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내가 곤란한 부탁을 했나? 싫은 것 같네.”

속내야 어떻든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거절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만큼 정중한 게 문제였다. 나는 의견을 구해오는 것처럼 날 힐끔거리는 유찬 형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럼 제가 진하윤 참가자 연습 돕고 있겠습니다.”

그제야 소파남이 흡족한 듯 웃음 지었다. 지난번에도 느꼈는데 이 사람 생각 이상으로 머리를 잘 굴렸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우리 형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쏙 빼내 갈 생각을 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

……지금까지 간과해 왔지만, 아무래도 소파남의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소파남은 걸어 다니는 연예 뉴스라고 해도 될 만큼 다양한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아주 큰 구설에 휘말리는 일 없이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룹은 물론이고 소파남 개인 팬덤의 규모도 꽤 컸다.

그만큼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를 잘한다는 뜻이겠지. 바꿔 말하면, 못된 짓거리는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을 만한 아주 은밀한 곳에서 한다는 뜻일 테고.

“하온아, 진짜 잠깐이면 되거든? 이쪽으로 와.”

그렇다는 건 지켜보는 눈들이 많은 여기서는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카메라에 반갑게 쪼르르 다가가는 것처럼 비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조금 주저하는 기색으로 주춤거리면서 다가갔다.

언젠가 소파남이 그를 둘러싼 소문에 휩쓸려 침몰당할 때 조금이라도 엮이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곤란해하는 티’를 내야 했다. 무엇보다 나는 너를 떼어낼 거거든. 귀찮게 굴면 굴수록, 그리고 그 증거가 남을수록 떼어내기 쉬워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정이한이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거절 따윈 거절한다는 듯한 단호한 느낌이었다. 소파남의 한쪽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겨우 표정 관리에 성공한 듯한 소파남이 한 템포 쉬었다가 물었다.

“……왜?”

“하온이 낯 가려요. 낯선 곳에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니까 같이 있어 줘야 해요.”

살짝 말아쥔 정이한의 주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겁도 많으면서 나를 위해 나서주는 게 마냥 고맙기만 했다. 나는 정이한의 주먹을 내 손으로 가만히 감쌌다가 놓으며 난 괜찮다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납치라도 하는 줄 알겠다. 잘 데리고 가서 얘기만 하고, 다시 데려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찰나에 끼어든 건 강현 형이었다. 소파남과 정면으로 마주 선 강현 형이 한 음절씩 강하게 힘을 실어 말했다.

“저희 막내가 아직 어.려.서.요.”

“어린 친구랑은 대화도 못 하나?”

잠깐 소파남을 응시하던 강현 형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 떨리게 하는 예의 미소가 아닌, 얼음 조각처럼 차가워 보이는 미소였다.

“꼭 둘이서만 해야 하는 얘기가 어딨다고……. 따라가야겠습니다. 매니저 형이 안 계실 땐 저희가 하온이 보호자라서요.”

소파남은 찡그리는 대신 더욱 과장되게 상냥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아이쿠. 하온이 데려가는 것도 미안한데, 다른 후배 님들 시간까지 뺏을 순 없지.”

분위기가 조금씩 싸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거 좀 곤란한데……. 분위기 전환을 좀 시켜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엥? 아니에요! 선배님! 형들이랑 같이 다녀오셔도 돼요! 여긴 저랑 유찬 형이 맡으면 되니까!”

이서호가 무해하게 웃으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우리 형들 막내 사랑이 지극해서 절대 혼자 안 보낼 텐데 선배님 시간 낭비예요. 그냥 셋이 세트다, 생각하고 데려가세요~ 으하학!”

이서호는 눈치 없는 사람처럼 한참을 텐션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대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잠깐만. 혹시 진하온이랑 둘이서만 얘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셨어요? 헉! 대체 무슨 얘기길래? 아직 미성년자인 후배 그룹 막내랑 까마득한 선배님이 둘이서만 긴밀하게 해야 할 얘기라는 게……. 대체 뭐얼까?”

이서호는 양손 검지를 제 관자놀이에 가져다 댄 채 눈을 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도한 액션을 곁들인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서 여기저기서 푸흡, 하고 잔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거 좀 위험한데. 자칫 선배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유찬 형이 성난 목소리로 이서호를 불렀다.

“이서호!”

깜짝 놀라 한 이서호가 반사적으로 몸을 똑바로 세우면서 차렷 자세를 했다. 그리곤 놀라서 홉 뜨여진 눈을 연신 깜박이면서 유찬 형 눈치를 살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농담이어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지. 설마 선배님이 우리 하온이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시겠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알겠어?”

“어, 으응. 미안해…….”

“사과는 선배님께 드려야지.”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도 죄송합니다.”

유찬 형과 이서호가 동시에 소파남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와, 유찬 형도 연기 재능 있었나. 이렇게 완벽한 극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소파남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유찬 형이 먼저 농담으로 치부하면서 혼내는 바람에 소파남은 화도 못 내게 생겼다. 속이 다 시원하네.

파들파들 떨면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유지 중인 소파남을 보고 있으니 제대로 한 방 먹인 것 같은 통쾌함이 느껴졌다.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던 두 사람에게 칭찬 스티커라도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 됐다. 그냥 너희도 따라와.”

“네.”

“그러죠.”

소파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이한과 강현 형이 각각 내 옆구리를 차지했다. 연습실을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니 이서호와 유찬 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아주 밝게 웃어줬다.

***

“여기야. 보여줄 게 있으니까 들어와.”

소파남이 문을 열면서 말했다. 너머에는 긴 책상과 큼지막한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꽉 차는 작은 공간이었다.

강현 형이 먼저 들어가려고 하자, 소파남은 팔로 형의 가슴팍을 밀어내듯 막아섰다.

“너희 말고, 하온이만.”

“안 됩니다.”

소파남은 팔짱을 끼고 문틀에 비스듬히 기댄 채 천장을 가리켰다.

“거치 캠은 없어도 보안용 CCTV는 있어. 보안실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데 내가 허튼짓할 수 있겠냐? 진짜 개인적인 용무라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진하온만 따라와.”

강현 형이 소파남과 대치하는 사이 정이한은 나를 잡아당겨서 제 등 뒤로 숨기려고 들었다. 소파남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뒤 한숨 쉬었다.

“야,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슬슬 성격 나오네. 강현 형이 이길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말려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정이한이 소파남을 경계하면서 그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팔을 아래로 내려 내 손에 뭔가를 쥐여줬다.

정이한의 몸을 가림막 삼아 물건을 확인한 나는 조금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정이한은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서는 포커페이스로 돌아갔다.

허어. 설마 지금까지 계속 녹음한 건가?

나는 손바닥 안에서 굴러다니는 소형 녹음기를 얼른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분위기로 보아 같이 못 들어갈 것 같으니까 넘겨준 모양이었다.

좋다. 이걸로 소파남과 둘만 방에 들어가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졌다. 소파남이 진상 부리면 부릴수록, 더 빠르게 접근금지 요청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잠깐만 참으면 된다. 나는 만류하는 뜻을 담아 강현 형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방긋 웃었다.

“형, 저 괜찮아요.”

“난 안 괜찮아.”

“아 나 이 새끼가……. 야, 너는 내가 선배로 안 보이냐? 어?!”

단번에 소파남의 목소리가 커졌다. 근처에 거치 카메라도 없고, 스태프나 참가자들의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있는 건 외부인의 출입을 확인하는 용도인 경계용 CCTV뿐이라 본성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선배님.”

벌써부터 괜히 얼굴 붉힐 필요 없어서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소파남을 향해 눈을 접어 웃어주니 짜증 섞인 시선이 내게 향했다.

“연습생 때부터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어서……. 저희 형들이 원래 저를 좀 과보호해요. 선배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요. 다른 분이어도 같았을 거예요.”

“그래서? 같이 들어오겠다고 끝까지 개기시겠다?”

“어……. 하실 말씀이 긴가요?”

“짧다고 했잖아. 아오! 몇 번을 말해? 5분이면 끝난다고.”

5분이라는 말에 강현 형을 쳐다봤다. 형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혐오하는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건 강현 형도 마찬가지였다.

“강현 형.”

형이 나를 똑바로 보는 걸 확인한 뒤에 말을 이었다.

“여기서 5분만 기다려주세요.”

“5분 지나면?”

소파남이 이를 으드득, 가는 소리가 났다. “5분 지나면 문 쳐부수고 들어오던가!”하고 소리치자 강현 형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딱 5분입니다. 문은 잠그지 말고, 이상한 소리 들리면 바로 들어갈 겁니다.”

“대체…. 나를 뭐, 얼마나 쓰레기로 보는 거냐, 너희들?”

어떤 쓰레기냐니. 두 눈으로 본 그대로의 쓰레기지. 나는 이쯤 해서 강현 형과 소파남의 대치를 끝내기 위해 소파남을 슬쩍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씩씩거리며 뒤를 돌아보면서도 내게 순순히 밀려 주는 걸 보니 ‘용건’이라는 게 의외로 중요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희롱이 목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굴 리 없잖아.

문이 닫히자마자 제 성질을 못 이긴 소파남이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뭡니까?”

“내가, 빡쳐서 소리 지른 거다. 내가악!”

“하온이한테 화풀이하지 마십시오.”

“안 해, 이 새끼야!”

“그럼 됐습니다.”

강현 형은 마지막까지 형형한 눈으로 소파남을 노려보곤 천천히 문을 닫았다.

“후우, 진짜 저 새끼를 확.”

확 뭐. 확 어쩔 건데? 우리 형한테 손대기만 해 봐라. 각자도생이고 뭐고 녹음본 공개해서 처형시킬 테니까.

이글이글 끓는 속마음을 애써 밀어놓은 채, 나는 완벽하게 ‘힘없고 겁먹은 연약한 후배 그룹 멤버’라는 가면을 썼다. 처형하려면 증거가 있어야지. 지금은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자, 진하온.

“저, 선배님……. 보여주신다는 게 혹시 뭔지…….”

나는 녹음기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소파남이 다짜고짜 내 팔을 잡아끈 탓에 아파하면서 앓는 소리도 확실하게 녹음기에 담아줬다.

“윽. 아파요, 선배님…….”

“앉아.”

소파남은 나를 강제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혔다. 그리고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듯 씩씩거리면서 노트북을 조작했다.

“이거 끼고, 들어.”

무선 이어폰이었다. 소파남은 내가 이어폰을 귀에 끼우는 걸 확인하고는 녹음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O.D.I 예선 촬영 당시, 주한 형을 만나 방송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줬던 바로 그 순간이 녹음 파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이거 어떡할까? 응?”

“…….”

“사실관계만 슬쩍 흘려줘도 살은 알아서 붙을 것 같지 않아? 박유찬과 참가자 이주한은 친한 친구 사이다. 너도 안면이 있고 말이지. 따로 불러서 방송 팁을 전해줄 정도로 말이야.”

어느덧 소파남의 얼굴에서 짜증스러운 기색이 완전히 걷혔다.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한 건 비열하게 비틀려 올라간 입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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