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김호채 선배님]
액정 화면 위로 선명하게 떠 오른 이름에 인상을 찌푸리자, 이서호가 옆으로 와서 기웃거렸다.
“왜? 누군데 그래?”
“……김호채 선배님.”
이서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손안에 쥔 종이처럼 구겨졌다. 동시에 휴대폰을 쥔 내 손목을 잡아 내리더니 경계하는 어조로 말했다.
“야, 받지 마.”
“안 받아.”
나와 이서호는 휴대폰 액정을 뚫어지라 들여다보면서 통화가 자동으로 끊길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부재중 기록만 남긴 채 불쾌한 진동이 사라졌다. 이번에야말로 매니저 형한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또 한 번 진동이 울렸다.
“아…….”
“또 왔어?”
“응.”
“아, 집착 뭔데. 진짜 소름 돋아.”
이서호가 부르르 떨면서 휴대폰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매니저 형한테 전화하기는 그른 것 같다. 또 걸었다가 통화 중이라는 음성이라도 들으면, 내가 일부러 피했다는 티가 날 게 뻔하니까.
…그동안 잠잠하다 했지.
나는 무음 모드로 바꾼 다음, 얼른 휴대폰을 가방 속에 봉인시켜 버렸다. 그때 강현 형이 어깨로 연습실 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품에 자판기에서 뽑아온 거로 보이는 음료수를 대여섯 개 안고 있었다.
“와! 강현 형, 탄산! 탄산 있어?”
이서호가 쪼르륵 달려가 앞에서 기웃거렸다.
“어. 먹어라.”
“……탄산수 말곤 없어?”
“몸 관리 안 해?”
시무룩해진 이서호가 탄산수를 집어 든 채 뚜껑을 땄다. 치익, 하는 청량한 소리가 들렸다. 강현 형은 내게도 차가운 음료수를 건네왔다.
“핫초코…….”
“미안. 그건 매진이더라.”
“이 더위에 누가 핫초코를 먹은 거야, 나 말고!”
분노한 내가 소리치자 강현 형이 픽 웃곤 벤치 위에 음료수를 쏟아냈다. 몇 개의 캔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길래 주워서 다시 가지런히 세워놓았다.
“더워서 안 채웠겠지. 핫은 다 매진이었어.”
“이럴 수가…….”
아쉬운 대로 옥수수 차를 집어 들었다. 시원해서 목축이기 좋긴 하네.
“그런데 우리 셋밖에 없는데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옥수수 차 뚜껑을 따면서 물었더니, 강현 형은 아무렇지 않게 “습관 때문에.”하고 대답했다. 하긴, 우린 어딜 가나 다섯 명이 함께 몰려다녔으니까. 아직 개인 스케줄이 별로 없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나중에 개인 스케줄이 늘어나면 따로 움직일 일도 그만큼 많아지겠지?
그럼 숙소에 혼자 남는 일도 종종 생길 테고….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저나 강현 형.”
“응?”
“서호 형 뒤통수에 왕만 한 혹 났는데, 병원 안 간다고 우겨요.”
“악! 와, 진하온! 진짜 치사하다! 강현 형한테 이르냐!”
뒤통수 맞았다는 듯 격분하는 이서호는 모른 체하고 강현 형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했다. 형이 혼내줘요! 이서호 병원에 데려가 줘!
“혹? 어쩌다?”
“저랑 장난치다가 둘이 같이 넘어졌는데, 서호 형이 저한테 깔렸어요.”
“……하온이 넌 안 다쳤고?”
“네.”
“이서호.”
“어, 어?”
“잘했어.”
“거봐! 나 잘했다잖아!”
이서호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잘난체했다. 이럴 수가……. 이게 칭찬 들을 일이라고? 혹이 났는데도 병원에 안 간다니까요?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어 허망해진 나는 멍하니 허공만 올려다봤다.
“그건 그거고, 일단 좀 보자.”
강현 형이 손짓하자 이서호가 얌전히 뒤통수를 내밀었다. 강현 형은 머리카락을 헤치면서 혹을 확인한 뒤 차가운 캔 음료수를 집어 들어 대뜸 머리에 가져다 댔다.
“와악! 차가!”
이서호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와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쌌다.
“냉찜질하면 금방 가라앉아. 이리 와.”
“잠깐잠깐, 그럴 땐 수건으로 싸서 대는 거 아니었어? 우리 엄마는 그렇게 해주던데?”
“그래?”
강현 형이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끌어 내리려고 하자 이서호가 기함했다.
“형! 그건 땀 닦은 거잖아!”
“그럼 네 거 주던가.”
“우우…….”
그것도 싫다는 듯 이서호가 쌩하니 도망가 버렸다. 순식간에 연습실 안에는 나와 강현 형만 오도카니 남게 되었다.
“형…….”
“…….”
“서호 형 병원 안 가도 돼요?”
“세게 부딪혔어?”
“응, 쾅 소리 났어요.”
“……가야겠네.”
“그렇죠?”
잡으러 가야겠다. 이서호를 쫓아가려고 연습실을 나서는데 마침 연습실로 돌아오던 정이한을 발견했다. 그 순간 번뜩 떠오른 생각에 내 멍청한 머리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성을 들은 정이한이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
“아, 아뇨. 아니에요. 왜 벌써 왔어요?”
정이한에게 성큼 다가가면서 묻자,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되찾은 정이한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가사 컨셉 설명만 듣고 나왔어. 자세한 건 일단 가사 써온 거 보고 얘기 나누자고 하시네.”
“아하.”
“넌 어디 가?”
“서호 형 찾으러요. 혹시 오면서 못 봤어요?”
“샤워실 쪽으로 뛰어가던데?”
“고마워요! 형 이따 봐요!”
“으, 응.”
얼떨떨해하는 얼굴의 정이한을 남겨두고 샤워실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정이한을 마주친 덕분에 떠올린 내 스킬 ‘구원’. 혹도 상태 이상으로 분류된다면, 이걸로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이걸 까맣게 잊었지?
나한테 쓰는 스킬이 아니다 보니까 자꾸 잊어버린다. 게임 할 때는 안 쓰는 스킬들도 다 외우고 있었는데, 현실에 적용되니 그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래저래 정신없이 바쁜 상황들이 많아서 더 그랬을지도…….
샤워실로 들어가 개별 샤워룸을 하나씩 살폈다. 이제 마지막인데? 샤워룸 문을 밀었더니 잠겨 있지 않은 문이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열렸다. 여기도 없나 보네. 아오, 대체 어디 간 거야…….
“어? 진하온?”
“엇. 여기 있었어?”
문이 열리길래 없는 줄 알았더니. 안을 살펴보니 이서호가 축축한 수건을 뒤통수에 댄 채 화장대 앞에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뭐 해?”
“냉찜질하면 좋다잖아. 그래서 하고 있었지.”
“원래 그렇게 물 뚝뚝 떨어지는 거로 하는 거야?”
“……대충 차갑게만 해주면 되지 않을까?”
“그런가…….”
대화하면 할수록 우리 두 사람의 밑천만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리 줘봐. 내가 해줄게.”
“괜찮아!”
“괜찮긴. 혼자서는 잘 보이지도 않잖아.”
안으로 들어가서 샤워룸 문을 닫아버렸다. 젖은 수건을 움켜잡자 비틀어 짜지도 않았는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덕분에 이서호는 어디 가서 비라도 맞고 들어온 사람처럼 머리부터 등까지 다 젖어 있었다.
“상의라도 벗고 하던가. 이게 뭐야? 다 젖었잖아.”
“나름 짠다고 짠 건데…….”
“그냥 병원 가면 될걸. 그렇게 싫어?”
나는 반투명한 샤워 부스 문을 열고 들어가, ‘냉’ 쪽으로 끝까지 당겨진 수전을 올려 물을 틀었다. 한 번 더 수건을 적시고, 꾹 짜낸 뒤 네모반듯하게 접었다.
“어. 싫어.”
“왜 싫은데?”
“목격담 뜨면 디어리가 걱정하잖아.”
그냥 병원이 싫은 줄 알았더니……?
이서호는 내가 감기 때문에 병원 갔을 때도 디어리들이 많이 걱정했다면서, 이런 거로 걱정 끼치기 싫다고 했다. 그 마음은 나도 알지만…….
“그렇게 아픈 거 숨기고 꽁꽁 싸매다가 나중에 진짜 아프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러면 디어리들이 더 속상해할걸?”
“혹 좀 난 거 가지고 뭔 일 나겠어?”
어우, 진짜 고집불통이네. 답답함에 이서호를 나무라려다가 이내 관뒀다. 솔직히 나였어도, 머리에 혹 좀 난 것 가지곤 병원 안 가도 된다고 우겼을 것 같으니까. 나도 디어리들한테 걱정 끼치는 게 싫거든.
디어리들은 우리를 보고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고, 행복하고 포근한 것들만 품 안 가득 안겨주고 싶었으니까.
나는 조용히 이서호의 뒤통수를 찜질해주면서 구원 스킬을 발동시켜 보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신체 접촉으로 안 쳐주는지 거부당했다.
그래서 슬쩍 이서호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면서 구원 스킬을 발동시키자, 다행히 이번에는 스킬이 제대로 사용되면서 내 체력이 조금씩 깎여 나갔다. 많이 빠지진 않은 걸로 봐서 정말 혹 말고는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알았어. 그럼 이번만 봐줄게.”
스킬로 상처를 확실히 치료해주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건을 치우고 육안으로 보이는 상태가 어떤지 확인했는데, 여전히 혹이 볼록 올라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슬쩍 눌러봤는데 호들갑 떨던 아까완 달리 이서호는 잠잠했다.
“안 아파?”
“응? 어? 그러게, 뭐냐? 안 아프네?”
이서호가 제 뒤통수를 더듬더듬 헤집다가 손가락 끝에 걸리는 혹을 꾹 눌렀다. 그러더니 해맑게 웃으면서 하나도 안 아프다고 좋아했다.
“봐! 별일 아니랬지?”
“그래그래.”
“히히. 이제 연습하러 가즈아!”
순식간에 되살아난 이서호가 튀어 올라오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호 형.”
“응?”
“……고마워.”
“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돌아온 물음에 나는 이서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형 말대로 내가 다칠 거였는데, 나 대신에 다쳐서 난 혹이잖아. 지켜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아까 속상하다고 괜히……. 화낸 거 미안해.”
순식간에 이서호의 얼굴이 잘 익은 딸기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칭찬해 달라고 빽빽댈 땐 언제고, 막상 고맙다고 하니까 부끄러워하기는. 이럴 때 보면 이서호는 부끄러움이 많은 건지, 없는데 괜히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래도!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마. 그냥 내가 다치게 내버려 둬. 나는 형들 다치는 게 너무 싫어.”
부끄러워하던 이서호의 얼굴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었다. 뭔가… 화가 난 듯한 느낌인데? 얘 이렇게 정색하는 거 오랜만에 보네……. 나 방금 뭔가 말실수했나?
“싫어.”
“뭐?”
“나도 너랑 형들 다치는 거 싫어. 특히 진하온 너. 나는 네가 조금만 아파도 심장이 막, 요동친단 말이야. 혹시, 진짜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얼마나 불안한지 알아? 다음에도 막을 거야. 차가 덤벼도 달려들어서 네 앞을 막아설 거라고.”
이서호답지 않은 진지한 어조였다. 달려들면 뭐, 차랑 싸워서 이길 수나 있고?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지만, 진지한 이서호 앞에 농담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매번 기분이 간질거리면서 행복해졌다. 내가 실실 웃으니까 이서호가 아랫입술을 내밀곤 삐죽거렸다.
“뭐야? 왜 웃냐?”
“아니, 이번 사고는 전적으로 형 잘못이었잖아.”
“그, 그렇긴 해…….”
이서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하…. 진짜 흥분하면 앞뒤 분간 못 하는 성격 좀 고쳐야겠다. 이상하게 진하온 너랑 있으면 자꾸 선 넘게 되는 것 같아.”
“괜찮아. 그게 형 매력이니까. 아, 근데 철은 좀 들었으면 좋겠다!”
“아, 진짜. 진하온! 잘 나가다가도 꼬옥 마지막 한 마디가 문제라니까?”
“아하하!”
잽싸게 도망쳤더니 이서호가 씩씩거리면서 따라왔다. 마음이 가뿐해진 채로 달려서 그런가, 연습실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연습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매니저 형의 얼굴은 우리와 정반대로 심각했지만.
……무슨 일이지? 어쩐지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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