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정이한에게 집중하느라 매니저 형이 무어라 말한 건 못 들었지만, 어쨌든 연애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말했을 터였다. 일찍이 여러 차례 주의받았던 내용이라 안 들어도 줄줄이 외울 정도였기에 궁금하진 않았다.
“좋아. 그리고 강현이랑 하온이.”
응? 저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안무 얘기가 나올 타이밍에 왜 나를 호명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였다. 내 의문을 뒤로하고, 매니저 형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만든 안무는 거의 그대로 차용할 거야. 하지만 강약 조절이 조금 아쉽다는 평가가 있었어. 그래서 너희를 도와줄 안무가 선생님을 초빙했거든? 오후에 오실 거야.”
일단 매니저 형의 말을 끝까지 들은 다음,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하온이 왜?”
“안무는 강현 형이 만든 건데, 저는 왜요?”
“같이 했다면서?”
“네? 아닌데요? 강현 형이 다 하고 전 숟가락만 얹었는데요?”
그마저도 한참 안무 창작할 땐 드라마 촬영이랑 겹쳐서 많이 돕지도 못했다. 여기서 같이 했다고 이름 올리는 건 무임승차나 마찬가지였다. 매니저 형한테 허위 정보를 흘린 사람이 누군지 뻔했기에 갸름한 눈으로 강현 형을 봤다.
뻔히 눈이 마주쳤는데도, 형은 매니저 형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같이 한 거 맞아요.”
“아니에요. 강현 형 혼자 한 거예요.”
이런 건 어영부영 못 넘어가지.
“같이 한 거 맞아.”
강현 형은 단호하게 대답한 뒤, 내가 뭘 도와줬는지 나열하기 시작했다. 형이 뭘 말하는지 다 기억나는 터라 입술을 삐쭉거리며 들을 수밖엔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한 거라고는 강현 형의 진도가 막혔을 때 옆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보면서 재롱부린 것뿐이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고 안무로까지 발전시킨 건 순전히 형의 능력이잖아.
몸을 돌려 내 쪽을 향한 강현 형은 마지막으로 ‘어때? 같이 만든 거 맞지?’ 하고 물었다.
“제가 창작한 안무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같이 만든 거예요. 그냥 도와준 거죠.”
나는 창작에 재능이 없다. 이건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라 욕심도 없었다.
“하온이가 강현이의 뮤즈가 되어 준 거구나?”
강현 형의 말을 깔끔하게 정리한 유찬 형이 씩 웃었다. 그거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면서 “네! 그거죠!”하고 대답했다. 아우, 개운해.
“그래도 같이 한 건 같이 한 거잖아.”
강현 형이 대꾸하자 매니저 형이 손뼉 치면서 우리의 논쟁을 한 마디로 일단락시켰다.
“그럼 강현이가 메인이고, 하온이를 서브로 전달할게. 이거면 되겠어?”
“네!”
활짝 웃어 보인 나와 달리, 강현 형은 어딘지 불만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끝난 얘기였다. 강현 형, 불만 있어도 곱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 둬.
유찬 형과 정이한은 A&R 팀과의 미팅을 위해 곧장 매니저 형을 따라서 연습실을 나갔다. 우리 멤버들의 능력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폴짝폴짝 연습실 한 바퀴를 돌았다. 너무 좋아서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체력 빼지 마. 또 연습해야지.”
강현 형이 내게 제동을 걸었다. 나는 제 자리에 딱 멈춰선 채 살짝씩 어깨를 흔들며 생각했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어.”
“네!”
강현 형이 제동 걸어줬음에도 넘치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유찬 형의 작곡 재능은 계속 꽃피울 테니, 이번에 인정받으면 자신감이 붙어서 더 무시무시해지지 않을까?
강현 형도 원하는 대로 직접 창작한 안무로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고, 정이한은 원래 잘했으니까!
내가 한 건 없지만 내 일인 것처럼 기뻐서 자꾸만 광대가 승천했다. 그런데 그때, 연습실 전신 거울을 통해 구석에서 혼자 열심히 몸을 흔들고 있는 이서호가 보였다. 웬일로 혼자 연습하고 있지? 평소였으면 같이 하자고 엉겨 붙어서 귀찮게 했을 텐데, 이상했다.
“서호 형, 왜 혼자 연습해?”
“헉, 헉.”
이서호는 팔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의 이서호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뒤편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만, 허억, 뭐 하나 특출나게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잖아……. 그래서 춤이라도 더 잘 춰 보려고 연습하고 있었지.”
“오……. 뭐야? 갑자기 철들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나?”
“뭔 소리래. 난 옛날에 철들었거든?”
“내가 아는데, 그거 아니야. 형 철 안 들었어.”
“아오, 진하오온! 좀 진지하게 해보려니까 와서 초를 치냐?”
이서호가 억울해하면서 나한테 달려들었다. 나는 낄낄 웃으면서 가뿐하게 상체만 틀어가며 이서호를 피했다. 흥분하면 일단 직선으로 달려들고 보는 이서호는 소나 마찬가지였다.
끼끽, 운동화 밑창이 만들어내는 마찰음과 함께 이서호가 방향을 틀었다. 나는 투우사가 깃발을 흔드는 것처럼 동작을 취하면서 검지를 까딱였다.
“덤벼!”
“오냐, 후회하게 될걸!”
이서호가 커다란 눈을 번뜩이며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야, 잠깐! 점프는 반칙이지! 날다람쥐처럼 팔, 다리를 활짝 펼친 채 날아드는 이서호가 유달리 커 보였다.
내가 피하면 속도를 줄이지 못한 이서호가 거울에 머리를 박을 뻔했기에 다리에 힘을 딱 주고 버텨 섰다.
“잡았다!”
“악!”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서호가 날아든 충격이 장난 아니라 몸이 순식간에 뒤로 떠밀렸다. 두 쌍의 다리가 한 데 엉켜 주춤거리다가 균형을 잃는 건 순식간이었다. 몸이 뒤로 넘어가는 걸 느낀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아버렸다.
공중에서 방향이 틀어지는 것 같더니 곧장 바닥에 닿았다. 바닥에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몸에 느껴지는 충격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좀 푹신한 느낌?
“으어어……. 엄청 아파…….”
이서호가 내 밑에 깔려서 끙끙 앓고 있었다.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을 때야 이서호가 내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헉. 서호 형! 괜찮아?”
“안 괜찮아…….”
이서호의 커다란 눈꼬리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급기야는 우웩, 하고 헛구역질하길래 얼른 일으켜서 등을 두들겨줬다. 그러자 내 팔을 막으면서 다급하게 고갤 저어 보인다.
“야, 우윽, 내가 여기서 토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아…. 그런가? 그럼 화장실 갈래?”
“이제 괜찮아. 아, 놀랬다. 순간 숨이 안 쉬어졌네…….”
나는 이서호의 등을 두들기는 대신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머리를 몇 번 흔든 이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말고 크게 휘청거렸다. 놀라서 이서호의 팔을 잡아챈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 다친 거 아니야? 그러게 왜 그렇게 폴짝 뛰었어!”
“으… 아냐, 잠깐 어지러웠는데 이제 괜찮은 듯?”
이서호는 재차 머리를 흔들어보더니, 이내 꼿꼿하게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병원 가서 뇌 검사받아보자.”
“뭐? 뭘 그렇게까지 오버하냐? 그냥 넘어진 것뿐이잖아.”
나는 내 머리를 검지로 두들기면서 이서호를 올려봤다.
“그럼 내 머리는 왜 감싸준 건데?”
“그거야, 나한테 깔릴 줄 알고 그랬지. 너 나한테 깔리면 응급실행이야.”
이 자식이. 못 알아들은 척하는 거야? 진짜 모르는 거야.
“아, 그러니까. 머리 부딪히면 위험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맞는데, 내 머리는 튼튼해!”
“장난하냐! 사람 머리가 다 똑같지!”
내가 빽 소리치자, 이서호가 조금 놀란 듯 목을 뻣뻣하게 굳혔다. 장난도 적당히 쳐야지. 이서호는 매번 적당히란 걸 모른다. 맨날 장난치다가 다칠 뻔해서 사람 심장 철렁하게 하고.
속상한 마음에 강하게 힘을 실어 이서호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버틸 줄 알았던 이서호가 순순히 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서호를 연습실 구석의 벤치까지 데려가 앉혔다.
“고개 좀 숙여 봐.”
“괜찮다니까?”“얼른.”
“엄마처럼 굴기는…….”
이서호는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숙여 내게 뒤통수를 보여줬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면서 어디 다치진 않았나 만져 보는데, 갑자기 아프다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벌써 혹 났잖아!”
“아, 진짜?”
뒤통수를 더듬어 보려는 이서호의 팔을 확 잡아 내리곤, 혹여나 아플까 봐 살살 문지르면서 혹의 범위를 파악했다.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볼록하게 부어 있었다.
“……속상하게 왜 다치고 그러냐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서 동동 뛰었는데, 순식간에 기분이 저기 저 바닥까지 치달았다. 이 멍청한 자식이…….
“어? 미, 미안.”
혹 났을 땐 어떡해야지? 병원 가야 하나? 혹시 머릿속이라도 다쳤으면 어떡해? 그럼 큰일 나는 거잖아! 내 얄팍한 의료 지식으로도 운이 나쁠 경우 외상에 의해 뇌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확실히 검사하고 넘어가야지. 안 되겠어. 매니저 형한테 전화해야겠다. 머쓱한 얼굴로 제 뒤통수를 쓰다듬는 이서호를 힘껏 째려봐주며 가방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냈다. 내 눈빛 공격에 일어서려던 이서호가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다친 주제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주 싱글벙글한다. 얄미운 뺨을 확 꼬집어 버리려다가 혹 때문에 참았다.
“야, 그래도 나 잘하지 않았어?”
“뭘.”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너 안 다쳤잖아.”
황당한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이서호를 내려봤다. 나만 안 다치면 되는 게 아니잖아.
“형이 다쳤잖아.”
“에이~ 이런 건 침 바르면 나아. 병원 갈 필요도 없어.”
능글맞게 대꾸한 이서호가 내 손에서 휴대폰을 쏙 빼가며 눈꼬리를 접었다.
“내놔라!”
“아~ 괜찮대도~”
이서호가 내 휴대폰을 아예 제 엉덩이 밑에 깔아서 감춰버렸다.
“아, 이서호! 냄새나게!”
이서호의 상체를 마구 밀어대면서 휴대폰을 구출하려고 하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벤치를 양손으로 짚은 채 버티는 힘이 장난 아니었다.
“야, 나 냄새 안 나거든! 향긋한 남자거든! 그리고 형은 또 어따 갖다 팔았냐? 어?”
“그럼 말을 잘 듣던가.”
“…으어헉, 헉!”
그때, 갑자기 이서호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엉덩이 한쪽을 들어 올렸다. 이서호의 손에 들린 내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너 전화 왔다.”
“…….”
받아야 하는데 내 휴대폰이……. 왜 더러워 보이지?
“안 받아?”
“냄새날 거 같아서 고민 중이야. 잠깐만.”
“아! 냄새 안 난다고!”
이서호가 씩씩거리면서 제 가방에서 휴대용 물티슈를 꺼내 휴대폰을 벅벅 닦아 건넸다. 훨씬 낫네. 만족스럽게 휴대폰을 받아든 것도 잠시, 발신자를 확인한 나는 순식간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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