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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144화 (144/320)

144.

유찬 형은 굳은 얼굴로 계단 아래를 훔쳐봤다. 소파남이 아래층 문으로 빠져나간 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크게 한숨 쉬면서 돌아봤다.

“나갔어.”

형은 곧장 다가와 내 양팔을 꼭 움켜쥐고는 나를 살피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하온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번호만 뜯겼어요.”

“아, 미치겠네.”

유찬 형이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미안해……. 내가 늦는 바람에…….”

“아니에요, 형. 형이랑 있었어도 똑같았을 거예요. 번호 달라는 선배님 말을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이건 사실이다. 매니저 형이 옆에 있었어도 번호는 뜯겼을걸. 거절할 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잖아. 하다 못 해 여자 선배였다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거절할 수 있었겠지만, 동성이니 더더욱.

제일 불쾌한 건 그동안 스튜디오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땐 아무런 내색하지 않다가, 이런 밀폐되고 인적 드문 곳에 있는 걸 보고선 귀신같이 접근해 왔다는 거였다.

생각하니까 또 기분이 더럽네. 나는 소파남에게 잡혔던 팔을 문질렀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이런 곳에서 마주쳤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얌전히 번호만 받고 돌아갔을까? 절대 아닐 것 같았다. 그나마 주한 형이 있어서 얌전히 번호만 받고 돌아간 걸지도 모르지. 본인 이미지 관리는 나름 하는 모양이니까.

유찬 형은 잔뜩 우울해하면서 “일단 정곤 형한테 상담할게…….” 중얼이곤 휴대폰을 들었다. 바닥을 향해 축 처진 눈꺼풀을 보니 오랜만에 순두부 멘탈이 제대로 뭉개진 모양이었다. 통화 끝나면 괜찮다고 말해줘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인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주한 형, 고마워요.”

“어? 아니, 내가 뭐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나야말로 고맙지.”

주한 형도 눈치가 탑급이라 눈에 보이는 몇 개의 조각들을 맞춰서 그런 결론을 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눈치 빠르게 나를 보호하고 나선 거겠지. 하지만 상대는 심사위원이다. 밉보이면 서바이벌에서 무척 불리해질 텐데…….

주한 형에게 나는 고작 두 번 만난 사람일 뿐인데, 그런데도 나를 위해서 나서줬다. 그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나 때문에 괜히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전생에도 민폐 끼쳤는데 이번 생에도 그럴 순 없었다.

연락……. 한 번쯤은 받아야 하나. 교주랑도 통화했는데 소파남과 통화나 톡 한 번쯤은 주고받을 수도 있지. 아니면 매니저 형이나, 멤버들을 대동하고 만나줄 순 있을 것 같았다. 그 더러운 성격에 엄한 분노가 주한 형을 향하지 않도록 처신 잘해야겠어.

“아니에요. 형한테 불리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저 도와주려고 하셨잖아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눈 밖에 났으면 어떡하죠…….”

“아니야. 나 실력 있다면서? 하온이가 알려준 대로 악마의 편집 경계하고 실력 키우면 되지!”

주한 형은 그렇게 말한 뒤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심사위원 세 분 중에 제일 잔바리잖아. 다른 두 분 눈에만 잘 보이면 돼. 아무리 생각해도 밸런스가 이상하다니까, 밸런스가. 이런 데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을 실력은 아닌데. 그렇지?”

주한 형은 가벼운 어투로 나한테만 들리게 속닥이며 윙크를 보내왔다.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도 형에게 맞춰주기 위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래요.”

동의한다는 듯 눈웃음 짓자, 주한 형이 밝게 미소 지었다.

「안녕? 내가 형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잘 부탁할게, 하온아.」

그 순간, 전생에서 데뷔 조에 들어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보았던 주한 형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형은 그때도 저렇게 아무런 근심이 없는 사람처럼 밝게 웃었다. 저 미소가 차차 굳어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불안해하다가, 끝끝내 내쳐졌을 땐 밤새 울었었다.

노력해도 안 된다는 그 말은 가까스로 끌어안고 있던, ‘사랑받고 싶다’는 희망을 부수기에 충분했으니까.

“주한 형.”

“응?”

“…이번에는 우리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무언가에 홀린 듯 머리를 거치지 않고 불쑥 나온 말이었다. 주한 형이 고개를 기울이면서 “어? 이번?”하고 되물었을 때야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나는 그럴듯해 보이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 두 번째!”

“어?”

“두 번째 만남이잖아요. 지난번에는 그렇게 어영부영 헤어졌지만, 이번 기회에 친하게 지내고 싶다… 뭐, 그런 거죠.”

“아! 나야 당연히 좋지!”

“그럼 됐네요. 친하게 지내요, 우리.”

나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번에는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형 번호 알려주세요.”

“아, 그래! 찍어줄게.”

휴대폰에 주한 형의 번호가 한 자리씩 찍히는 걸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통화 버튼까지 눌러 본인의 번호를 기록에 남긴 형은 너도 내 번호 저장해줘, 하며 내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유찬 형은 이미 통화를 끝낸 뒤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쾌활해 보이게 웃으면서 유찬 형의 손을 꼭 잡았다.

“형, 이제 우리 돌아가요. 녹화 시작하겠다.”

“……으응.”

“주한 형, 다음에 또 봐요!”

“어! 또 보자!”

잠잠한 유찬 형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 찔렀더니, 그제야 주한 형에게 인사했다. 입꼬리를 당겨 웃고는 있었지만, 내버려 두면 금방이라도 시름에 잠길 것처럼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주한 형은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고,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유찬 형.”

“……응.”

“형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왜 그렇게 우울해해요? 그러면 저 속상해요.”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어. 간식이고 뭐고 알아서 하라고 해야 했었는데……. 아니, 주한이를 만나는 게 아니었어. 하다못해 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이건 아니지. 땅굴을 어디까지 파 내려가는 거야?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멈춘 걸 눈치채지 못하고 두어 칸을 더 내려간 유찬 형이 뒤늦게 멈춰 섰다. 한쪽 팔이 뒤로 당겨진 유찬 형은 상체를 비스듬히 돌리면서 날 올려봤다.

“형은 친구 만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웃음기를 빼고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입을 우물거리던 유찬 형이 한참 만에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그건 아니긴 한데…….”

“형이 주한 형 만나러 간 건 잘못한 게 아니죠?”

“……그렇지.”

“제가 따라가고 싶다고 한 걸 허락해 준 것도 잘못한 게 아니고요.”

“…….”

“주한 형한테 용건 있었던 건 저고, 그래서 형 보낸 것도 저예요. 이한 형이랑 서호 형은 당연히 저희 둘이 같이 내려갈 줄 알았겠죠. 형 혼자만 갈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거예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얘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거잖아. 나 때문에 하온이 네가 불쾌한 경험을…….”

“아니죠.”

단호한 목소리로 도중에 말을 끊고 나서자 유찬 형의 동공이 흔들렸다. 빠르게 깜박거리는 눈꺼풀을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잘못한 건 소파…가 아니라 김호채 선배님이에요. 저한테 못된 맘 먹은 당사자는 형이 아닌데 왜 형이 미안해해요?”

“리더로서 멤버들을 책임져야 하잖아. 그리고 나는 네 형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널 지켜주고 싶었는데…….”

나는 딱딱하게 굳혔던 얼굴 근육을 부드럽게 풀었다. 정이한이 내게 지어 보이던 상냥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나도 그렇게 보일 수 있게끔, 따라 웃었다.

“형은 항상 절 지켜줘요. 저도 가끔 무서울 때도 있고, 그냥 이유도 없이 외로울 때도 있는데요. 그럴 때마다 형은 항상 제일 먼저 ‘하온아, 괜찮아?’하고 물어봐 줬어요. 하나도 괜찮지 않다가도, 형이 그렇게 물어보면서 걱정해 주면 전부 괜찮아지더라고요.”

유찬 형은 입을 열었다가 다급하게 입술을 꽉 물었다. 내가 더 높은 곳에 있던 덕에 나는 두 팔을 쭉 펼쳐서 유찬 형의 목을 감싸 안을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유찬 형이 어정쩡하게 내 가슴에 뺨을 댄 자세가 되었다.

“형은 제 마음을 지켜줘요.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게 어디 있어요? 고마워요. 항상 저 걱정해 주고, 소중하게 여겨줘서.”

조용히 있던 유찬 형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형은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내 가슴에 묻고는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줬다.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줬더니 내 옷에 입술이 막힌 덕에 짓눌린 단어가 듬성듬성 들려왔다.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짤막하게 웃음을 터트리곤 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온기만 나누었다.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서 한참을 비비던 유찬 형이 목덜미를 붉게 물들인 채 바닥을 보고 말했다.

“내가 널 지켜준다고 말했지만……. 아니야.”

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올려봤다.

“내 마음을 지켜주는 건, 항상 너였어. 하온아.”

“그럼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는 거네요. 그게 더 좋다. 마음에 들어요.”

활짝 웃으면서 대꾸하자 유찬 형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번졌다.

***

스튜디오로 돌아가자마자 유찬 형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서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영문도 모르고 공격당한 이서호가 억울한 눈빛을 발사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뭐, 뭐야? 왜 때리는데!”

“뭘 사러 갈 거면 지갑이나 폰을 잘 챙겼어야지.”

이서호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치만……. 난 당연히 주머니에 폰 있는 줄 알았지!”

“너희한테 카드 주려고 내려가 있는 동안 그 사람이 하온이 쫓아왔어. 아무래도 미행했던 것 같아.”

놀란 이서호가 눈을 크게 뜨고 날 휙 돌아봤다. 정이한은 달싹이던 입술을 하얗게 핏기가 가실 정도로 꽉 깨물었고, 강현 형은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자식이 기어코…. 가만 안 둘 거야.”

흉흉한 기세가 뭔가 사고라도 칠 것 같았다. 이 형이 갑자기 왜 이래? 기함한 나와 유찬 형이 강현 형을 붙잡고 늘어졌다.

“번호만 받아 갔어요, 번호만!”

강현 형은 심사위원석을 노려보면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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