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43화 (143/320)

143.

“편의점 다녀오는 데 오래 걸려? 시간 얼마 남았는데?”

“5분 정도는 여유 있어요. 편의점은, 음……. 엘베가 언제 오느냐에 따라? 여기가 층층이 계속 서서 좀 느리더라고요.”

아마 두 사람도 그래서 형을 불러냈겠지. 유찬 형은 내려간 엘베 타고 바로 올라온다고 했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아! 그렇구나. 그, 그런데. 흠흠.”

주한 형이 주저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조심해야 한다는 게…….”

“아! 네, 진짜 별 건 아니긴 한데요.”

나는 주한 형에게 오기 전에 머릿속으로 생각해 둔 내용들을 전달해줬다. 길게 끌 만한 내용은 아니어서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인터뷰 하나도 조심하라는 거지?”

“네. 그리고 인성 논란 날 만한 일은 다 피하셔야 해요. 연습생들끼리 센터 정할 때라던가…. 방송국은 별것 아닌 일도 크게 부풀리는데 귀재거든요.”

“정말 그렇게까지 한다고?”

중얼거린 주한 형은 복잡한 얼굴로 천장을 한번 올려다본 뒤 다시 똑바로 세우며 한 차례 크게 끄덕였다.

“알았어. 조심할게. 그런데 하온이는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았어?”

그래, 물어볼 줄 알았지. 솔직히 주한 형이 아니라 유찬 형이 물어볼 줄 알았지만, 마침 형이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어쨌든 뻔하다면 뻔한 질문이 왔고, 나는 대답을 만들어놨기에 거침없이 물꼬를 텄다.

“경험이요.”

“……경험?”

“저희 리얼리티 찍었잖아요. 방송 나간 거 보니까 아, 악용하려면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긴 한데, 예능 촬영하면서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해? 진짜 대단하다!”

“……그, 런가요.”

“그리고 고마워. 나는 솔직히 네가 날 잊었을 줄 알았거든. 이미 데뷔한 네가, 방송국에서 한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 다른 소속사 연생까지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까.”

“에이, 저 생생하게 기억해요. 형이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데요. 한 번 보면 잊기 힘들죠. 그때 제가 형 댄서인 거 한눈에 알아봤잖아요.”

치트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알아본 건 알아본 거다. 뻔뻔하게 대꾸하자 주한 형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열심히 손부채질까지 해가며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말실수했나? 곰곰이 따져봤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서 눈만 끔벅였다.

“아, 미안. 좀 부끄럽네. 아하…하.”

“네? 뭐가요?”

“비, 크흠, 빛나는, 어우, 그런 수식어 처음 들어서…….”

“아!”

전생의 주한 형은 한줌단이던 팬들에게 ‘빛주한’이라고 불렸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익숙해지세요. 형 팬들은 더 다양하게 불러줄걸요?”

“으어……. 김칫국 사발로 드링킹하기 전에 멈춰줘!”

주한 형은 연신 손부채질하면서 고개를 잘게 저었다. 그렇게 부끄럽나? 그래도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눈을 접었다.

좋다. 인생 2회차를 살게 된 후로는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일들이 많아졌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슴 벅차오르는 그런 기쁨들이 하나, 둘 쌓여갔다.

주한 형도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전생의 인연 중 단 한 번, 단 한 사람과의 관계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선택지 앞에 선다면 주저하지 않고 선택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형을 도울 수 있고, 형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웃을 수 있는 지금이 무척 행복했다.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헉, 김호채 심사위원님! 아,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주한 형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더니 내 뒤쪽을 보고 기합 바짝 들어간 얼굴로 인사했다.

“어? 그쪽은 참가자인가?”

“넵! 코어 엔터 소속 이주한 연습생입니다!”

“……코어.”

인상을 찌푸린 채 야트막하게 중얼거린 소파남은 우리를 똑바로 올려다보면서 계단을 올라왔다.

“뭔데 둘이 밀회하고 있어? 원래 아는 사이였냐?”

나는 몸을 완전히 돌려서 깍듯하게 인사했다. 소파남은 내 인사 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주한 형을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

“아는 사이냐고.”

“네, 친한 형이에요.”

“……그래?”

소파남은 곁눈질로 주한 형을 잠깐 훑더니,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맨날 멤버들이랑 같이 다니더니, 다 어디 가고 혼자야?”

“잠깐 화장실 갔어요. 금방 올 거예요.”

주한 형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체하고 소파남을 내려다봤다. 그 사이 계단을 다 올라온 소파남은 내 앞에 마주 서서는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불쾌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폰 받았겠네? 너희 1위 했잖아.”

“네? 아…….”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신경 쓰였다. 나는 바지 주머니가 보이지 않도록 슬쩍 옆으로 돌아서며 소파남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소파남의 고개가 내 휴대폰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푸흡, 왜 그렇게 긴장해?”

“……이런 곳에서 선배님을 뵈니까 긴장돼서요.”

“그래? 뭐, 그건 상관없고. 번호.”

소파남이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폰 없다는 변명은 이제 통하지도 않는데, 연락처 교환은 죽어도 하기 싫다…….

“뭐 해? 빨리 찍어.”

소파남이 눈앞에 대고 제 휴대폰을 흔들면서 종용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었는데, 휴대폰 액정에 뜬 시간을 보니 녹화 시작까지는 고작 4분 남은 시점이었다.

“헉.”

변명이 아니라, 진짜 서둘러야 할 때였다. 원래 우린 시작 5분 전에는 무조건 자리에 앉아 대기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진짜 녹화 시작 4분 전이다. 차라리 잘 됐다 싶어서 소파남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어? 선배님, 저희 녹화 시간……! 죄송해요.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순순히 휴대폰을 받아 드는 걸 확인하곤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팔이 붙잡혔다. 소파남이 내 팔을 꽉 움켜쥔 채 불길하게 웃고 있었다.

“장비에 문제 생겼다고 20분 연장됐어. 시간은 충분하니까 서두르지 마.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짐짓 다정한 척 말했지만, 끈적거리는 점액질 같은 시선이 내 몸을 찐득하게 훑고 있었다. 꽉 잡힌 팔에서부터 소름이 번져나갔다.

“그, 그런 연락 못 받았는데요…….”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

여유만만한 투로 대꾸한 소파남이 번호나 찍으라고 다시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팔을 놓아주지 않아서 은근슬쩍 뒤로 물리자, 날 놓는 대신 내가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성큼 다가왔다.

“뭘 그렇게 오들오들 떨고 있어? 귀엽게.”

네가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야. 오한이 들 정도로 기분 나쁜 거지. 체력 떨어지잖아! 팔이라도 좀 놓고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질척대는 걸까.

“자.”

소파남은 끈질기게 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기어코 번호를 얻어야 팔을 놓아줄 것 같아서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내 번호를 줄 생각은 없어서 나는 자릿수 하나를 일부러 틀리게 입력했다.

나중에 걸리면 실수했다고 발뺌할 수 있도록, 휴대폰 자판의 바로 아래 칸을 누르고는 모르는 척 돌려줬다. 이 번호 맞냐고 내 앞에 휴대폰을 들이밀어서 한 번 더 확인시키는 소파남에게,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제야 내 팔을 잡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틈을 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서 소파남과 거리를 벌렸다. 주한 형이 전화를 받은 건 그때였다.

“어어, 유찬아. 어. 아, 그래? 알았어. 지금 데리고 갈게. 하온아, 유찬이가 매니저 형이 소집해서 엘베 눌러놨다고 바로 나오라는데?”

와, 주한 형 눈치 무슨 일이야. 이렇게 지원 사격해준다고?

“선배님, 저…….”

소파남이 주한 형을 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 알았어. 가 봐.”

주한 형과 함께 도망치듯 비상구를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소파남이 “잠깐.”하고 우리를 불러세웠다.

“너 전화 안 울리네?”

“……네?”

소파남은 턱짓으로 내 바지 주머니를 가리키더니 휴대폰 액정을 보여줬다. 발신한 휴대폰 번호는 내가 조금 전 입력해 준 그 번호였다.

“아…….”

이 자식 의외로 똑똑하잖아? 내가 너무 얕봤나? 이렇게 바로 확인해 볼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내 주머니에 휴대폰 있는 것도 안다.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 연기를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어? 진짜네요?” 하고 정말 몰랐다는 듯 의뭉을 떨었다.

“선배님, 제가 다시 한번 봐도 될까요?”

소파남은 영 미심쩍다는 얼굴을 하곤 아무 말 없이 내게 휴대폰을 보여줬다. 나는 번호 하나를 잘못 누른 것 같다고, 얼른 틀린 숫자를 정정해주면서 고개를 숙였다.

소파남이 그 자리에서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에도 내 휴대폰은 조용했다. 소파남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가는 걸 본 나는 느릿하게 휴대폰을 들어서 보여줬다.

“전화 오네요.”

촬영 중인데 당연히 무음으로 해놨지. 소파남이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음에 밥이라도 먹자. 형이 사줄 테니까 전화하면 나와.”

나는 뭐 스케줄이 없는 줄 아나? 전화하면 나와? 내가 갭니까? 그쪽이 오라고 하면 가게? 소파남이 나를 개로 본다면 나도 기꺼이 광견이 되어 줄 용의는 있다만.

우리 디아스만 얽혀 있지 않다면 그랬겠지만…….

“네, 감사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소파남은 아직 내게 시커먼 저의를 제대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당당하게 소파남을 피할 만한 건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건수 만들기 위해 아가리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었다. 일단 연락은 다 씹어야지.

그런데 그때 비상구 문이 벌컥 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등장한 유찬 형이 소파남을 발견하고는 흠칫, 굳었다가 재빠르게 낯을 바꿔 미소를 만들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소파남은 유찬 형을 한 번 본 뒤 미련 없이 왔던 계단을 되돌아 내려갔다. 아, 이거 당했네. 우연히 만난 거라면 돌아갈 필요가 없잖아.

……저 사람, 진짜 나 미행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독사를 코앞에서 마주친 것 같은 서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내 생각보다 더 음습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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