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하윤이를 재회한 것 외엔 별다른 이슈 없이 첫째 날의 O.D.I 촬영이 끝났다. 둘째 날 소파남이 몇 번 다가오긴 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일상적인 인사만 조금 나누고 돌아갔다.
쉬는 시간에 뻐근한 몸을 풀거나, 화장실에 갈 때도 꼭 형들 중 한 명을 대동하고 다녔기에 소파남과 단둘이 마주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오늘도 지난 이틀 동안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지겹고, 지겨운 촬영이 이어졌다. 그나마 오늘은 오후 7시면 끝날 예정이었고, 대망의 마지막 녹화라서인지 대형 기획사 연습생들이 대거 올라와 무대가 흥미진진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또 한 명, 내가 아는 참가자가 무대에 올라왔다. 주한 형이었다. 하윤이 때와 다르게 얼굴을 보니 그저 반갑게만 느껴졌다. 예전에 딱 한 번, 데뷔 초에 방송국 화장실에서 마주친 적 있었다. 그때 오지랖 부려서 절대 스완은 가지 말라고, 형 입장에서는 수상하기만 한 말을 건넸었는데…….
서바이벌에 나왔구나. 잘 됐으면 좋겠다. 여기서 데뷔하면 금상첨화고, 그게 아니어도 인지도를 쌓아서 스완보다 훨씬 나은 소속사로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안녕하세요, 코어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이주한입니다.”
“……잘해!”
유찬 형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유찬 형이 내 옆에 앉아 있었기에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이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어? 설마?
지금 보니 무대 위의 주한 형 역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눈으로 심사단 쪽을 살피고 있었다.
……헐, 맞는 것 같은데? O.D.I 오디션에 참가한다던 유찬 형의 친구가 주한 형인가 봐!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지?
신기한 마음에 유찬 형과 주한 형을 번갈아 봤다. 한참 헤매던 주한 형의 시선이 마침내 우리 쪽을 향했다고 느낀 순간, 유찬 형이 슬쩍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동시에 주한 형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이거 뭔데? 왜 내가 다 감동적인 건데? 흐뭇한 마음에 자꾸만 입꼬리가 헤죽헤죽 올라가려고 했다. 지금 웃으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입꼬리 단속을 위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주한 형의 무대가 시작됐다. 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댄스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말 그대로 무대를 찢어 놓았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진심에서 우러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 열심히 박수를 쳤다.
무대가 완전히 끝난 뒤 심사단 평가를 위해 멤버들끼리 모였을 때 강현 형이 제일 먼저 운을 뗐다.
“난 합격. 춤 잘 추시더라.”
와, 강현 형한테 인정받은 거면 찐인데? 우리 형 춤에는 양보 없는 사람인데!
“형 눈에도 잘했어요?”
“응. 그리고 앞으로 더 잘할 것 같아.”
“진짜? 진짜야?”
유찬 형이 끼어들면서 얼굴을 바짝 붙이자, 강현 형은 머리를 뒤로 빼서 거리를 두며 “어. 왜? 설마 여기 나온다던 형 친구가 저 사람이야?”하고 물었다. 하여간, 눈치 진짜 빠르다니까.
“응응. 내 연생 동기. 나랑 같은 해에 들어와서 쭉 코어에 함께 있었으니까……. 이번엔 꼭 데뷔했으면 좋겠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저렇게 잘하는 사람인데 전생의 그룹이 망한 건, 역시…….
내 탓이 컸겠지……. 물론 드라큘라 백작이라던가, 인류 최초로 사랑을 발견한 원시인 같은 이상하고 난해한 컨셉만 골라 시킨 문제도 있었었겠지만, 내 지분도 상당히 있었으리란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정말… 잘 됐으면 좋겠는데.
***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유찬 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친구 좀 만나고 올게.”
“유찬 형, 혹시 이주한 씨 만나러 가요?”
“응. 왜?”
나는 유찬 형에게 예전 일을 짧게 설명한 뒤, 형만 괜찮다면 따라가서 인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상 깊게 남았었거든요. 절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닿았으니 어떻게 해야 악편의 희생양이 될 일을 피해갈 수 있는지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이 세계에서 아이돌 오디션은 처음이니까 모를 수도 있잖아. 다른 건 몰라도 시청률을 위한 악편에 희생되는 건 막아야 할 거 아냐.
그래야 살아남아도 살아남지. 그나마 대형 소속이라서 건수만 제공하지 않아도 악편의 희생양이 될 확률은 낮을 것 같았다.
어쩌면 제작진들이 반성해서, 악편 없는 깔끔한 방송…은 절대 안 하겠지. 돈 벌려고 하는 거니까. 소년들의 꿈 따위 누가 이루든 피디는 알 바 아니란 소리였다. 그에게 중요한 건 시청률에 따라오는 후원과 광고니까.
역시 꼭 말해줘야겠어. 항상 어떻게 편집될지를 고려하라고. 멀끔한 대답도 싹둑싹둑 잘라서 이상하게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그랬어? 그럼 같이 가자. 주한이가 좋아하겠다!”
“네!”
유찬 형을 따라 일어났는데, 정이한이 내 옷깃을 잡으면서 올려봤다.
“나도 같이 가도 돼?”
이건 유찬 형이 대답해줘야 할 것 같아서, 유찬 형에게 눈으로 물었다.
“음. 우리 다 같이 가면 너무 눈에 띄어서 주한이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데…….”
“……어? 그런가.”
“응. 진짜 미안!”
유찬 형이 두 손을 짝 붙인 채 고개를 숙이자, 당황한 정이한이 괜찮다고 웃으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서호가 잽싸게 끼어들면서 정이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럼 이한 형은 나랑 마실 거 사러 편의점 가자!”
“또?”
“이거 너무 맛없어…….”
이서호는 PPL 상품인 음료를 검지로 톡톡, 쳐서 굴리며 울상지었다.
“서호야. 나 레쓰베 좀 사다 줘.”
“오케이! 유찬 형이랑 진하온은? 뭐 사다 줄까?”
“난 괜찮아.”
“나도 괜찮아, 그보다 하온아 서두르자. 주한이 기다리겠다.”
“넵!”
나는 유찬 형을 따라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
우리는 스튜디오가 있는 층의 비상계단을 통해 한 층을 걸어서 올라갔다. 반 층을 올라와 방향을 틀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주한 형이 보였다. 형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자세를 바로 했다.
“유찬아! 진하온 선배님!”
……호칭 정리가 좀 필요하겠네.
“주한아!”
유찬 형이 남은 계단을 두, 세 칸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 주한 형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고 등을 팡팡 두들기면서 재회의 반가움을 표현했다.
“임마! 너 진짜 잘하더라. 강현이도 너 잘한다고 바로 인정하더라!”
“헐, 진짜? 강현 선배님이? 계 탔다!”
주한 형이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 이 형한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전생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난꾸러기 기질이 엿보여서 신선했다.
그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는데, 그 순간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륵 불타오른 주한 형이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
“죄, 죄송합니다……. 못 볼 꼴 보인 것 같네요…….”
“앗, 아니에요! 저도 무대 정말 잘 봤습니다! 진짜 잘하시던데요? 멋있었어요! 아, 그리고 합격 축하드립니다!”
주한 형은 팔을 똑바로 내려 몸에 착 붙이더니, 폴더폰처럼 허리를 숙여 감사합니다! 하고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덕분에 비상구에 난데없는 메아리가 울렸다.
“야야, 누가 들었으면 후배 기합 주는 줄 알고 놀랐겠다.”
“그, 그러게. 크흠.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오버를…….”
주한 형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데 저,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서 슬쩍 말 놔도 괜찮다고 운을 뗐다.
“에이, 안 되죠. 선배님이신데 데뷔도 못 한 연생이 어떻게 그래요.”
손사래까지 치면서 거절하는 형에게 나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유찬 형 친구잖아요. 저는 형 동생이고. 그런데 형 친구가 저한테 선배님이라고 하면, 저도 불편하고 유찬 형도 불편한걸요?”
“어어, 그럼 그럼. 편하게 해 주한아, 편하게.”
“……그래도.”
“대신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하지만…….”
주한 형은 좀처럼 오케이를 하지 않았다. 어떻게 설득하지? 마땅한 선택지가 없어 고민하는데 나의 솔로몬 유찬 형이 나서줬다.
“너 그러는 게 오히려 하온이 불편하게 하는 거다? 정 맘에 걸리면 우리끼리 있을 때만. 어때?”
“어? 엇, 그럼 그렇게 할…까?”
내 쪽을 힐끔 보면서 주저하는 형의 말을 내가 덥석 받았다.
“네, 주한 형!”
주한 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그래!”하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호칭 정리가 끝나니 훨씬 마음이 개운해졌다.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난 상태에서 형들이 회포를 푸는 걸 지켜보다가 유찬 형이 전화 왔다면서 받으러 간 사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주한 형.”
“응?”
“사실은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어? 뭔데?”
“합숙할 때 카메라 24시간 도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응응.”
주한 형이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이 들려온 이름에 고개를 휙 돌렸다.
“강현이는?”
뭐지? 이서호? 정이한? 둘 중 한 사람인 것 같은데…….
“아오, 일단 알겠어. 하온아, 하려던 얘기 뭐야? 오래 걸려?”
“아뇨, 별 건 아니고 그냥 합숙 촬영할 때 조심해야 할 것들 몇 개만 짚어드리려고요.”
“아, 그런 건 중요하지…….”
유찬 형이 가벼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형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서호는 폰, 지갑 다 놓고 갔고, 강현이도 지갑 안 가져갔는데 걔는 스마트 페이 같은 것도 안 쓰잖아. 갔다 오면 계산할 시간 부족할 것 같다고 나더러 내려와 달라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여유 시간은 8분 남짓이었다. 남은 시간은 부족하고, 그렇다고 같이 이동하다가 주한 형이랑 함께 있는 목격샷이라도 뜨면 우리가 합격 버튼 누른 이유가 왜곡되어 이상한 루머가 돌 수도 있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주한 형이랑 둘이 남아도 되지 않을까? 일단 혼자는 아니잖아. 무엇보다 나는 꼭 악마의 편집을 조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럼 유찬 형 다녀와요. 저 여기서 주한 형이랑 있을게요.”
“괜찮겠어?”
“그럼요. 어차피 긴 이야기도 아니니까 5분 정도면 끝날 거 같아요. 전 따로 얘기하고 돌아갈게요.”
잠시 고민하던 유찬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어. 애들 엘베 앞으로 오라고 하면 금방 카드만 주고 올 수 있으니까 시간 촉박해지기 전까지는 기다려. 그리고 주한아.”
“응?”
“나 돌아올 때까지 하온이랑 여기 꼭 같이 있어 주라. 우리 막내 절대 혼자 두면 안 되거든?”
“어! 알겠어!”
주한 형은 내막도 모르면서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고, 맡겨 두라면서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그제야 좀 안심된다는 듯 웃어 보인 유찬 형이 최대한 빨리 오겠다면서 엘리베이터를 잡으러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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