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싫어하는 건 아닌데……. 물론 영문을 알 수 없는 NG 폭탄에 조금, 아주 조금 짜증 나긴 했지만, 이유가 너무 합당해서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배려’란 걸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부끄러움만이 무겁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멤버들끼리 냄비째 뭔갈 먹을 때도 냄비 손잡이는 항상 형들에게 향해 있었던 것 같다. 무한정 받기만 해서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선배님을 싫어하진 않습니다.”
“면전에서 싫다고 말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그쪽 표정에 드러났어요.”
“……아닌데요?”
살짝 콧방귀를 뀐 것 같은데? 내 표정에서 그렇게 싫은 티가 났었나? 안 돼, 이대로 꼼짝없이 오해받을 순 없으니 이실직고해버리자!
“소, 솔직히 아까 NG 내시는 이유를 몰라서 조오금, 짜증 나긴 했는데…….”
나는 얼굴 높이까지 손을 들어 ‘조오금’에 힘을 주면서 엄지와 검지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는 동안에도 승리한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연기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불쾌해하는 것 같진 않아서, 사회생활용 미소와 함께 말을 마무리했다.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잘못이란 거, 설명해 주셔서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정말이에요.”
잠시 나와 마주 보던 승리한이 입을 열었다.
“기대했다는 말, 빈말 아니었어요. 오디션 볼 때 배역에 몰입한 게 느껴졌었거든요. 그래서 하온 씨가 아직 현장 경험은 부족하다는 걸 생각하지 않고 제 기준으로만 본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그 자리에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꽤 친절한 어조로 말하는데 이상하게 내게 벽을 세운 것 같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원래도 친하진 않았지만,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감에서 단숨에 서울과 뉴욕쯤으로 벌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승리한은 본인이 할 말만 하고는 살짝 묵례한 뒤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한숨 쉬곤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평가절하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까 승리한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던 건, 내가 눈치껏 알아채 주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는 크게 심호흡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정받고 싶다. 승리한에게 인정받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내게 도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호승심이 차올랐다.
연기로 잃어버린 신뢰를, 연기로 되찾고 싶다.
굳은 결심을 하고 세트장 뒤쪽에서 빠져나오자 도라이 선배님이 날 기다리고 계셨다.
“뉴삐야. 승리한이랑 얘기 잘했어? 뭐래? 이유 알려주디?”
역시 선배님의 입김이 있었구나. 아까 이야기하실 때 승리한에게 넌지시 내 이야기를 하신 모양이었다. 원인을 듣고도 곧장 승리한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했었으니, 선배님께는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더 NG를 내면서 민폐 끼쳤을지 몰랐다.
“……아. 네. 알려주셨어요. 형이 도와주신 거죠?”
“중요한 씬도 아닌 것 같은데 쩨쩨하게 구니까. 그래도 들으니까 왜 NG 냈는지 알겠지?”
“네. 너무 당연한 거였는데 제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더라고요.”
도라이 선배님은 뒤통수에 깍지 낀 양손을 대고 기대듯 고개를 젖히셨다.
“그래서 화를 못 내겠다니까? 항상 반박할 수 없는 이유가 있더라고.”
“……라이 형.”
“응?”
“형도 처음에 승리한 선배님이랑 촬영할 때 NG 이유 안 알려주고 그랬어요?”
도라이 선배님이 승리한과 첫 연기 합을 맞춘 건 2년 전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친한 사이가 아니었을 테니 어땠는지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아니? 나한테 엄청 틱틱거리면서, 걷는 거 하나까지 조목조목 따지고 들면서 알려줬었지. 아이돌 출신이라고 날 엄~청 싫어했거든.”
우리 이서호한테도 그랬었는데. 예전부터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나 보다. 도라이 선배님은 한쪽 입꼬리를 쭉 땅겨 올렸다.
“출신만으로 무시당하는 게 빡쳐서 미친 듯이 연기 훈련해서 발라줬지. 그랬더니 다음부터는 종종 칭찬도 해주고, 유해지더라고.”
아하. 그래서 인정받으면 잘해준다는 걸 아셨던 거구나. 딱히 승리한과 사이 좋은 선후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인정은 받고 싶었다. 연기를 진심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어서 그런 걸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어떻게 연습했는지 알려줄까? 우리 뉴삐한테는 진짜 꿀팁까지 탈탈 털어서 알려줄 수 있는데.”
나는 도라이 선배님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고개 저었다. 이건 내가 직접 생각하고, 연구해서 알아내고 싶었다. 그래야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제가 생각해보고 싶어요.”
“오~ 우리 뉴삐, 진정한 연기돌로 거듭나는구나!”
도라이 선배님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나를 응원해주셨다. 그나저나 선배님, 손이 조금 맵네요……. 등이 따끔거린다…….
***
그 일이 있고 며칠이 더 흘러갔다. 하루 만에 실력이 쑥 늘 수는 없는 일이라서 연속으로 이어지는 촬영 도중에도 몇 번 더 NG를 내야 했다. 그때마다 승리한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방금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줬다.
그걸 들을 때마다 오히려 속상함만 가중되었다. 그래서 우리 신곡 작업을 하는 틈틈이 드라마를 챙겨봤다. 그러다가 정현과 유사한 캐릭터가 나오면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집중해서 관찰했다.
그와 동시에 정현이라는 캐릭터의 몸에 밴 몸짓과 습관 같은 걸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알고 움직일 수 있다면 편했겠지만, 누군가를 모사하는 일은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배우는 건데 나는 고립된 삶을 살아왔잖아.
환생한 다음에야 남들과 어울리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주로 함께 있는 형들은 나를 워낙 과보호하는 탓에 내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게 고맙기는 하지만…….
으아, 복잡해.
벤에서 끙끙 앓으며 뒤척였더니 정이한이 힐긋 날 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킨 뒤 다시 휴대폰에 집중했다. 무선 이어폰을 타고 등장인물의 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내 휴대폰 위로 커다란 손이 끼어 들어와 화면을 가렸다.
“이한 형?”
“오늘 ODI 종일 촬영이잖아. 피곤할 텐데 미리 눈 좀 붙여. 그러다 또 쓰러질까 봐 겁나…. 요즘 잠도 많이 안 자지?”
그야, 하루 중 내가 내 시간을 온전히 가질 수 있는 때는 연습실에서 돌아온 다음뿐이니까 어쩔 수 없다. 새벽이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때였으니까. 잠 좀 못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체력이 5% 미만으로 떨어지면 잔다.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단 뜻이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정이한은 내게서 휴대폰을 빼앗은 뒤 반대쪽 주머니에 쏙 넣어버렸다. 뺏을까 했지만, 이른 시간부터 시작되는 촬영 때문에 대부분 잠들어 있어서 참았다. 정이한은 나를 반강제로 시트 등받이에 붙이고는 손으로 내 눈을 가려줬다.
“오늘 엄청 피곤할 거야. 미리 쉬어놔.”
“……형도 쉬세요.”
“너 잠들면.”
“지금 잠 안 오는데…….”
“눈 감고 있으면 잘 거야.”
단호한 대답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체력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누적된 정신적인 피로가 미처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잠든 걸 보면 말이지.
***
촬영장소에 도착했다. 선배님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기에 여기저기 인사 다니기 바빴다. 그 덕분에 소파남과 스치듯 마주쳤을 때, 아무런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헤어질 수 있었다.
이대로 평생 이별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종일 촬영하는 강행군이 사흘 동안이나 이어질 예정이었다. 생각보다 참가자가 많은가 봐…….
우리는 합격, 불합격 버튼을 누르는 “현역 아이돌” 심사단 역할로 출연한 것이었기에 모든 오디션 참가자들의 무대를 봐야만 했다.
심사위원석을 지나 안내받은 자리에는 디아스 명찰, 마이크, PPL 상품임이 분명해 보이는 낯선 음료수가 올라가 있었고,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버튼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초록색은 통과, 노란색은 애매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을 때, 빨간색은 탈락이었다. 음료수는 가급적이면 방송 중에 따서 먹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뒤 준비된 자리에 착석했다.
아침 일찍부터 새벽까지 이어질 촬영이었다. 그런데도 심사단 섭외에 예산을 다 쏟아붓기라도 한 건지, 자리가 썩 편하지 않아서 벌써부터 엉치뼈가 아팠다.
정이한의 말대로 자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고마운 마음이 무럭무럭 커져서 연신 정이한을 보며 방긋거렸다.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내가 웃으니 좋다면서 생글거리는 정이한이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를 일이다.
***
잠깐의 대기 끝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당장 데뷔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하는 참가자, 촬영만 아니었어도 인상을 쓰며 귀를 막았을 참가자, 잘하는 것 같은데 뭔가 임팩트가 부족한 참가자, 잘 못 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 순식간에 몰입시키는 참가자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다.
처음에는 재밌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졌다. 어쩌다 한 명, 이따금 나오는 실력자 무대만 흥미로웠을 뿐이었다. 이래서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심사위원들이 지루해하다가 눈 번쩍 뜨는 장면이 꼭 들어가는 거구나, 싶었다.
그게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진짜 반응이었다니…….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탈락으로 편집될 게 확실한 참가자가 나오면 무대는 뒷전인 듯 곳곳에서 작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고 다르지 않아서 점점 딴생각에 빠져, 이번 ODI 촬영이 끝난 뒤 다시 돌아가야 하는 드라마 촬영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나는 무대에 올라온 사람을 보자마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몇몇 사람들은 대놓고 뒤를 돌아 내 쪽을 흘깃대고 있었다.
“헐! 미쳤다! 진하온이랑 엄청 닮았어!”
이서호가 신기하다는 듯 나와 참가자를 번갈아 봤다. 당연히 닮았겠지. 닮을 수밖에 없지. 쟤가 왜 여기 있어? 어째서?
나는…….
나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안녕하세요, 개인 연습생 진하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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