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저렇게 무서워하는데도 혼자 냅다 튀지 않은 이서호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훌쩍거리는 목소리가 듣기만 해도 너무 안쓰러워서, 두 사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단 진정시키고 이야기해야겠다.
이 정도면 제작진분들이 원하는 장면은 충분히 뽑았을 테니까 내가 진실을 말해도 되겠지. 장식장 위의 무언가를 관찰한 결과 나는 그게 사람이라는 확신을 내린 상태였다.
일단 투명하지 않았고, 손전등을 비췄을 때 그림자가 졌다. 그렇다면 사람이지. 사람이라면 누구겠어? 스태프다. 우리를 놀리기 위해 전설이랍시고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고, 지하실로 유도한 것이다.
1층으로 올라온 다음 밝은 데서 보니 유찬 형과 이서호의 몰골이 엉망이었다. 유찬 형은 그나마 좀 사람 같았는데, 이서호는 제발 나가자며 목 놓아 엉엉 울어댄 통에 얼굴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근데 형들, 아까 우리가 본 거 귀신 아니라 스태프인 것 같아요.”
고민한 끝에 사실대로 털어놓자, 오들오들 떨던 유찬 형은 “지, 진짜야?”하고 되물었다.
“그게 어떻게 사람이야아아……. 흐어어엉……. 빨리 가자, 그냥 나가자. 응? 제바알, 저주받으면 어떡해…….”
“아니, 아까 손전등으로 비췄을 때 그림자가 생겼거든요. 귀신은 그림자 안 생기잖아요.”
“아, 나도 봤어. 그림자 지는 거.”
정이한이 내 말에 신뢰성을 보탰다. 유찬 형은 가만히 서서 눈을 끔벅거렸다.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정도로는 이성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형은 “으아아!”하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쪽팔려.”
코를 훌쩍거리면서 울던 이서호도 그제야 눈물을 뚝 그친 채 코맹맹이 소리로 내게 물었다.
“……진짜야? 진짜 스태프야?”
“응. 아마 분장하신 스태프분이신 것 같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이서호는 유찬 형처럼 부끄러워하는 대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피휴우우우, 하고 긴 숨을 내쉬더니, 귀신이 아니라 천만 다행이라면서 안도했다.
“귀신이 그렇게 무서워?”
“……어! 당연하지!”
“그런데 용케 혼자 도망 안 쳤네?”
이서호는 자길 뭐로 보냐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비명 소리 들으면 사람이 다친다는데 어떻게 나 혼자 가냐? 형들이랑 너 다치면 어떡해……. 그건 싫단 말이야.”
헐. 뭐야? 이서호 되게 기특하네? 본인 무서운 것보다 우리 다치는 게 더 싫어서 아까 그렇게 울면서도 버틴 거야?
“서호 형. 의리파네.”
“우리 멤버들은 소중하니까!”
“나도?”
“나 참, 그럼 너 빼고 소중하겠냐?”
“푸흐흐.”
“웃, 웃기는 왜 웃어!”
“형 얼굴이 웃겨서.”
“아악!”
뒤늦게 제 몰골을 떠올렸는지 이서호는 황급히 손등으로 제 눈과 코를 벅벅 문질렀다. 저래서 제대로 닦이기나 하겠어?
“서호 형, 나 봐봐.”
반팔을 입은 탓에 나는 옷소매 대신, 셔츠 밑단을 쭉 당겨 올려서 이서호의 얼굴을 닦아줬다. 내 행동을 예상 못 했는지 이서호는 착한 아이처럼 차렷 자세로 서서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줬다.
“됐다. 우리 형, 잘 생겼네.”
“윽, 이, 이제 알았냐!”
“그리고 형은 울 때가 제일 귀엽더라.”
“…아! 진하온! 가만 보면 마무리가 항상 이상해, 너!”
나는 크게 웃어 젖힌 뒤 진정했으면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자고 말했다. 씩씩대던 이서호가 그 말에 입을 합, 다물었다. 조금 전처럼 바들바들 떨지는 않았지만, 지하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이서호는 연신 지하실 입구를 힐끔거리면서 여러 번 심호흡한 뒤에야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일부러 텐션을 끌어 올리려는 듯 “오케이! 준비됐어!”하고 힘주어 외쳤다.
유찬 형 또한 아까보단 두려움이 훨씬 가셨는지, 그런 이서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강현 형의 표정도 한결 편안하게 바뀌어 있어서 내 마음도 놓였다. 그러자 뒤늦게 목이 뻐근해졌다. 멤버들이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나까지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목을 돌리면서 스트레칭을 한 뒤, 다시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밟았다. 멤버들이 전부 나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갔다. 아까는 길게만 느껴졌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깊은 것 같진 않았다.
지하실에 도착하자마자 아까 그 장식장 위를 손전등으로 비쳤다. 하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스태프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위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 이동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뻔하지. 뒤에서 누군가 한 명 잡으려고 들겠지? 형들에게 뒤 조심하라고 주의 주려던 순간이었다.
“아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길고 긴 비명이 들렸는데…….
우리 멤버의 비명이 아니다.
“아, 아파요! 아야, 아야야!”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손전등을 틀었다. 그곳에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강현 형이 치렁치렁한 귀신 분장을 한 스태프를 무려 호신술로 제압하고 있었다.
강현 형은 스태프의 한쪽 팔을 뒤로 꺾고, 목을 꾹 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형에게 제압당한 스태프는 허리를 숙인 채 끙끙 앓았다.
뒤늦게 정체를 파악한 강현 형이 황급히 스태프를 놓아줬다. 제 팔목을 붙잡고 신음하는 스태프를 향해 강현 형이 당혹감 서린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고고… 아뇨, 아닙니다. 그나저나 강현 씨 운동했어요? 엄청나네.”
스태프는 팔목을 탈탈 털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지. 하필이면 골라도 강현 형을 골랐네. 강현 형은 무서워할 때조차 형다워서 과묵하게, 혼자서만 무서워했다. 피디님이 그게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강현 형을 놀라게 하라고 지목했나 봐.
“호신술을 조금…….”
“조금이 아니신데요? 어우, 대단하십니다!”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나는, 별안간 스태프의 목에서 달랑거리는 깃발 모양 목걸이를 발견했다.
“어! 표식!”
“아, 네! 맞습니다! 표식이에요.”
스태프가 흰 소복 깃 사이에서 목걸이를 꺼내서 우리에게 건네줬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깃발 모양 팬던트 뒤에는 ‘하온의 소원’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우리는 지하실을 배경으로 단체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미션을 마무리했다.
위로 올라오니 조금 전과 달리 바람 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뻥 뚫린 창을 뚫고 빗줄기가 사선으로 들이쳤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피디님께 반쯤 현상된 폴라로이드 사진을 내밀었다. 피디님은 얼른 사진을 받아서 조끼 안 주머니에 넣으시곤 근심 어린 어조로 말씀하셨다.
“기상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기서 비가 더 내리면 완전히 고립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 하산하시죠.”
그 말에 우리는 일제히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까진 빗줄기가 그리 세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이 거셌다. 여기에 빗줄기까지 거세지면 정말 꼼짝 못 하고 고립될 것 같았다.
“헉! 그럼 빨리 가요!”
이서호는 절대 폐가에서 자고 싶지 않다면서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폐가 입구까지 나서서 뒤를 돌아보더니 빨리 오라면서 손짓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우리도 얼른 폐가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지하에 내려가 있던 사이 이미 한바탕 폭우가 쏟아졌었는지, 바닥은 온통 질척질척했다. 게다가 비가 완전히 그치지 않아서 맨살에 맞는 비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서호 형,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어!”
저만치 앞에서 경보하듯 걸어가고 있는 이서호에게 소리쳤다. 조명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지만, 바닥은 시냇물처럼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걷기 편하게 만들어진 길이다 보니, 인근 지대보다 낮아서 물이 죄다 이쪽으로 흘러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비가 더 많이 내리면 그대로 물길이 될 것 같았다.
“하온아, 춥지?”
정이한도 내가 아니라 바닥을 더 주의 깊게 봐야 할 텐데……. 정이한은 나와 보폭을 맞추는 데에만 집중하며 계속 날 힐끔거리면서 보고 있었다.
“형, 내려갈 땐 땅을 봐야죠.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으응. 너 걱정돼서 그러지.”
“전 괜찮아요.”
나는 정이한의 등을 살살 두들겨 준 뒤 웃어 보였다. 올라올 때는 금방이었던 것 같은데 여건이 안 좋아서 그런지 하산하는 속도가 영 더뎠다. 그 사이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흐르는 물의 양이 늘어나, 이제는 미니 급류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어느새 물이 발목까지 차오른 탓에 바닥이 거의 안 보였다.
“위험하니까 다들 긴장하시고, 다리에 힘주고 내려가세요!”
피디님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예상치 못한 기상악화였다. 우린 짐이라도 없지, 스태프분들은 그나마 비를 막아줄 수 있는 비닐류를 죄다 끌어모아 촬영 장비에 내어준 채 맨몸으로 비바람을 다 맞고 있었다. 피디님은 우리와 스태프를 챙기고, 장비들까지 신경 쓰느라 특히 정신없어 보였다.
“하온아, 너 입술이 파래졌어…….”
정이한이 내 안색을 보면서 인상을 굳혔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춥다. 그래도 추운 건 참을 수 있는데……. 빗물의 양이 이제는 종아리까지 차올라 버린 게 문제였다. 추위와 더불어, 물에 집어 삼켜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빨리 내려가고 싶은데…….”
나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해하면서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 젖은 천이 올라왔다.
“다 젖어서 도움 하나도 안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막아.”
정이한이 하나뿐인 셔츠를 벗어서 내 머리에 덮어 씌워준 것이다.
“형…! 감기 걸려요.”
“난 괜찮아. 너 감기 걸리면 그게 큰일이지. 게다가 어차피 젖어서 입고 있으나 벗으나 똑같아.”
정이한은 젖은 옷을 입고 있어봤자 오히려 체온만 더 뺏기는 거라면서 돌려주려는 셔츠를 거절했다. 그리곤 그 대신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 이렇게 체온 좀 나누자. 훨씬 따듯하지?”
“그렇긴 하네요…….”
맞닿은 부위에서 온기가 퍼져나갔다. 이건 거절하기 아쉬워서 앞뒤 재지 않고 정이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딱 붙은 채 쏟아지는 비를 뚫고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
비는 밤새 지겹도록 쏟아졌다. 동굴 벽에 딱 붙여 놓은 텐트 덕에 우리의 잠자리만큼은 침수되지 않고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습기는 피해 갈 수 없었다. 밤새 피운 모닥불로는 이도 저도 안 됐다. 무엇보다 피로에 짓눌려 잠들 만하면 동굴을 부술 듯이 내리치는 천둥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다.
덕분에 내 체력 상태가 하루 사이에 처참해졌다. 고작 30%밖에 안 남았거든……. 체력이야 채우면 되는데, 문제는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으슬으슬 떨리는 게…….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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