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30화 (130/320)

130.

“악!”

갑자기 뒤통수를 공격당한 유찬 형이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일어났다.

“아으, 아파……. 갑자기 왜 그래?”

유찬 형이 다그치다 말고 정이한을 따라 시선을 옮겨 나를 봤다. 그러더니 똑같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왜, 왜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들의 반응에 뭔가 문제라도 있나 싶어서 아래를 내려봤다. 별거 없는데……. 그런데 갑자기 유찬 형이 부리나케 뛰어오더니 날 감싸듯 품에 안고는 질질 끌고 갔다.

“형?”

유찬 형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시멘트벽 뒤쪽으로 날 끌고 간 뒤에야 놓아줬다. 그리곤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 숙였다.

분위기를 보니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알 수 없어서 입술을 말아 물고 눈치만 살피는데…….

“하온아.”

유찬 형이 진지하게 내 이름을 부르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형의 상체에 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형, 저 뭐 잘못했어요?”

“그, 아으.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유찬 형은 달라붙은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곤혹스러워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평소와 다른 태도 때문에 괜히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너 야해.”

“네?”

“야하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막 훌렁훌렁 벗지 마. 알았어?”

야, 야하다고? 내 어디가? 솔직히 우리 멤버들 중에 내 몸이 제일 별 볼 일 없잖아. 그냥 말라빠진 밋밋한 몸. 그게 나였다. 아, 혹시 매력 스탯 때문인가? …매력 스탯이 원인이면 그럴 수 있을지도.

“일단 여기 있어. 갈아입을 옷 갖다 줄게.”

“씻지도 않고 옷만 갈아입으라고요? 그건 좀….”

아직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라 찝찝했다. 이대로 갈아입는 건 죽어도 싫어서 나도 모르게 거부 반응이 튀어나왔다.

“씻을 수 있게 준비해 줄게.”

유찬 형은 여기서 딱 기다리라면서 엄포를 놓은 뒤 혼자 가버렸다.

***

한편,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린 정이한은 제 이름이 여러 번 불리는 것도 듣지 못하고 아까 본 잔상만을 곱씹었다. 평소에도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무방비하게 드러난 뽀얀 살결이 자꾸만 망막에 맺혀 떠돌았다.

얇은 목덜미에서 어깨로, 그리고 가슴을 지나 허리로 떨어지는 완만한 곡선은 그린 듯이 아름다웠다. 함께 숙소 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지만, 진하온은 멤버들 앞에서조차 한 번도 대놓고 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쿵. 쿵. 쿵.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정이한은 가슴을 꾹 누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진하온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감정으로. 그건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깨달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이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그날 밤에도 그랬다. 왜 갑자기 진하온의 이마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돌이 들었는지, 충동의 대가처럼 뒤따라 온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그가 제 행동을 단순한 안부 키스로 치부했을 때 몰려온 실망감의 정체도 그때는 몰랐다.

그저 소중하고 애틋하기만 해서,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언제나 곁에 있고 싶었다.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미소가 예뻤고, 체온을 나눠주는 온기가 사랑스러웠고, 뚜렷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나는 하온이를…….’

그저 조금 더 특별하게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첫사랑을 하고 있었다.

언제 바뀌었지? 어느 날 갑자기 암전 상태였던 제 인생에 껑충 뛰어 들어온 빛. 따듯하고 환하게 빛나는 이정표를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는데, …이젠 아니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가던 갈증의 원인을 알아차려 버렸다.

‘너무 웃기잖아. 리얼리티 촬영하다가 이게 무슨…….’

벗은 몸을 보고서야 자각한 감정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정이한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면서 깨달음과 동시에 휘몰아치는 격정을 내리눌렀다.

제 욕심을 앞세워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서 해사하게 빛나는 미소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가 자신이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고 잡아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끝내 말라 죽어버리게 된다 해도.

평소처럼 하자. 정이한은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한아~?”

박유찬이 등을 퍽 치자 그제야 매몰된 사고에서 벗어난 정이한이 고개를 들었다.

“몇 번을 불렀는데 왜 그렇게 멍 때려? 하온이 씻게 물 담을 만한 통 찾으러 가자.”

“아, 응. 알았어.”

박유찬은 우리 하온이 너무 야해서 못 쓰겠네, 라면서 가볍게 투덜거렸다.

“…형 눈에도 그래?”

“응. 와, 나 아까 진짜 깜짝 놀랐어.”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정이한의 셔츠를 확 들어 올렸다. 미세하게 갈라진 근육을 들여다보던 박유찬이 혀를 차면서 셔츠를 내려줬다.

“네 몸은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지.”

“……나도 마찬가지거든.”

정이한의 소심한 투덜거림에 박유찬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유찬 형과 정이한은 내가 편하게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며, 어디선가 드럼통을 구해와 물을 날라줬다. 바디워시는 없었지만, 깨끗한 물로 펄을 닦아내는 것만으로도 꽤 개운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강현 형과 이서호가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에게 합류하려고 했는데 메인 작가님이 슬그머니 나를 불렀다. 사전 협의 없이 카메라 앞에서 절대로 벗지 말라고 당부한 후에 멀어지는 메인 작가님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정말 매력 스탯 때문인가 봐. 평소에는 잊고 사는데……. 취향이 아니어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스탯의 힘을 이런 식으로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좀 놀랐다. 조심해야겠어.

“뭐야? 다들 뽀송뽀송하네?”

흙투성이가 된 이서호가 우리를 보더니, 자신도 등목하겠다면서 자신 있게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강현 형도 땀으로 푹 젖어서 질척거리는 셔츠를 벗었는데…….

갈라진 근육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바닥부터 설계해 올린 유명 건축물처럼 섬세하게 짜 넣은 듯한 근육은 야성적인 매력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와…….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형과 내 몸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버리고 말았다. 강현 형처럼 완벽한 몸은 나랑 어울리지 않으니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너무 여리여리한 느낌을 주지 않는 정도로만, 배가 좀 단단해지면 충분할 것 같은데. 체력, 체력. 그놈의 체력이 문제였다.

부러움과 동경심에 강현 형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정이한이 주춤거리면서 다가왔다. 아까 내가 벗은 뒤로 언젠가의 이서호처럼 나만 보면 얼굴 붉히면서 회피하기 바빴던 정이한이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봐?

“강현이를, 되게 유심히 보네….”

“아, 네. 멋있잖아요.”

“……어디가?

”근육? 얼굴도 잘생겼고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정이한이 근육 있는 사람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어쩐지 질문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하게 당연히 좋죠. 동경하게 되잖아요, 라고 대답했더니 정이한은 “그렇구나.”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제 배를 쓰다듬고는 갑자기 얇은 긴팔 바람막이 재킷을 꺼내 입고 지퍼까지 잠가버렸다.

“…이한 형?”

“어? 아, 좀 추워서.”

설마 내가 강현 형이랑 비교할까 봐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속상해하는 티 내면 무슨 생각 하는지 눈치 못 챌 리 없잖아. 나는 마이크에 소리가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정이한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형은 형만의 매력이 있어요.”

“……그게 뭔데?”

“든든함.”

“……내가?”

“네. 저한테는 그래요.”

“그래…?”

영 자신 없다는 듯한 물음이 돌아왔다. 나는 눈꼬리를 접어 웃으면서 “그럼요.”하고 확신을 담아 대답해주었다. 그제야 정이한이 슬그머니 웃으면서 꽉 채운 지퍼를 쭉 끌어 내렸다.

“춥다면서요?”

“……지금은 또 괜찮네.”

나는 풉,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속으로 삼키곤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

강현 형과 이서호의 탐사 결과는 스팟 한 군데와 산딸기, 두릅, 고사리, 깻잎이었다. 요섹남 강현 형이 매의 눈으로 나물을 찾았고, 이서호는 개 코 같은 후각을 동원해 달달한 산딸기를 찾아냈다.

위치를 헷갈릴까 봐 깃발을 두고 왔다는 말에 우리는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서둘렀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유달리 반듯하고 쭉쭉 뻗은 자작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원형 공터였다. 공터 중앙에 나무 밑동 몇 개와 통나무가 듬성듬성 있어서 산림욕 하기 좋아 보였다.

두말할 것 없이 정이한의 스팟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싱그러운 자연의 소리를 연주했다. 무성한 잎이 햇빛을 막아주는 동시에 드리운 그늘은 선선해서 기분 좋았다.

기분 탓인지 이 장소의 공기가 유독 좋아서 힘껏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내쉬었다. 솔직히 무인도에서 무슨 힐링인가 생각했는데, 여기만 놓고 보면 충분히 힐링이 되는 것 같아서 자존심도 좀 상했고…….

심지어 우리가 베이스캠프로 삼을 동굴이랑도 가까웠다. 여기에 해먹 하나만 걸어 두면 좋겠는데……. 그러면 돌아다니다가 한 번씩 휴식 취하러 오기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해먹 같은 게 있을 리가. 조금 아쉬워서 괜히 튼튼한 나무만 손으로 두들겨 보고 있는데, 강현 형이 “왜?”하고 물었다.

“아, 해먹. 그거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요?”

“기다려 봐. 만들어 줄게.”

아니, 어떻게? 너무 궁금해서 자신만만하게 나선 강현 형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형은 우리 도구함이 있는 곳까지 와서 칼, 밧줄, 그리고 그물을 꺼냈다. 재료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느낌표가 딱 섰다.

“눈치챘어?”

“네! 도와줄게요!”

나는 품 안 가득히 그물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강현 형이 내게서 그물을 빼앗아 간 뒤, 내 손에 칼과 밧줄을 쥐여줬다.

“무거우니까 이거 들어.”

“괜찮은데요?”

“내 힘 뒀다가 뭐해.”

나는 이미 형의 근육을 봤으므로 반박할 수 없었다. 덕분에 훨씬 무게가 가벼워진 짐을 멀뚱멀뚱 내려보는데, 가자는 한 마디와 함께 형이 쿨하게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현 형을 놓칠세라 바삐 쫓아갔다.

걷다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여느 때처럼 백야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강현 형이 관심을 보였다.

“그 멜로디 자주 부르던데 뭐야?”

“아! 백야라고, 이한 형이 선물해줬어요.”

“이한이가 작곡한 거야?”

“네, 자작곡!”

강현 형은 정이한 스타일의 곡이 아니라 의외긴 하지만, 멜로디가 좋다면서 신기해했다. 그 말에 괜히 내가 자랑스러워서 이 곡이 얼마나 좋은지 열심히 떠들었다.

“꽤 마음에 드나 봐.”

“그럼요!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 봤거든요.”

“…도… 해줘……네.”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탓에 띄엄띄엄 들려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

“아니야, 아무것도.”

어깨를 으쓱여 보인 강현 형이 날 보면서 옅게 웃었다. 헉, 또 이런다! 이거지 이거, 사람 홀리는 미소! 이번에는 카메라에 잘 담겼겠지? 믿어요. 강현 형 담당 카메라 감독님! 이 장면이 송출되면 디어리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벌써 우리 디어리들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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