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터는 사이 유찬 형이 허둥지둥 다가왔다. 그 걸음새가 뒤뚱거리는 펭귄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푸흡, 아하하!”
“넌 진짜…! 어디 다친 덴 없어?”
“네, 아픈 덴 없어요.”
다행히 날카로운 돌은 하나도 없는, 질척하고 무른 펄만 있는 곳이었다. 그 덕에 긁힌 곳 하나 없었고, 그저 넘어간 충격에 엉덩이가 살짝 아린 게 전부였다.
“뒤돌아봐. 확인해 보게.”
진짠데……. 유찬 형이 꼭 확인해야겠다면서 다시 한번 뒤돌라고 시켰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빙글, 몸을 돌렸는데 순간 나를 담고 있는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 생각해 보니까 다 찍혔겠네. 안 넘어지려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던 내 모습이 얼마나 추했을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거 그대로 나가면 디어리들 다 도망갈지도…….
편집되려나?
편집은 카메라 감독님의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카메라에 대고 멋쩍게 웃으면서 “편집……. 꼭 해주세요.”하고 손가락으로 가위 모양을 만들어 싹둑, 자르는 시늉을 했다. 이 정도면 해주겠지?
감독님이 날 보고 슬그머니 웃으셨다. 그런 감독님을 마주 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을 때였다.
“하온아, 넘어진 데 괜찮아?”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면서 다가온 정이한이 날 살폈다. 그 사이 유찬 형은 확인을 마쳤는지 내 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치고는 정이한에게 말했다.
“다행히 다친 덴 없어.”
“조심하지…….”
“운동화가 빠질 줄은 몰랐어요.”
나는 여전히 펄에 처박혀 있는 운동화를 빼내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어차피 온몸이 진흙 범벅이 된 터라 그냥 손을 넣어서 운동화를 잡아당기는데, 이거 꼭 펄이랑 줄다리기하는 것 같다. 운동화가 뽑혀 나오는 순간, 또 한 번 보기 좋게 뒤로 발라당 나자빠질 것 같은 미래가 그려졌다.
“또 넘어지겠다. 내가 해줄게.”
옆으로 비켜서자 정이한이 펄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요령이라곤 없는 나와는 달리 크게 힘주지 않고 꼼지락거리더니 금방 운동화를 쏙 빼냈다.
“헐, 어떻게 했어요?”
“부드럽게 해야 해. 힘주면 오히려 더 안 빠져.”
정이한이 펄에서 꺼낸 운동화를 내 앞에 놓아 주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제 어깨를 잡도록 유도하고는 내가 신발 신는 걸 도와줬다.
”도구함에 장화 더 있었을 텐데 갈아 신고 오지.”
아……. 그러게, 도구함이 있었네?
괜히 아까운 옷이랑 운동화만 버렸다. 날씨 좋으니 바닷물에라도 닦아내고 말리면 될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나였다. 덕지덕지 묻은 펄을 어디서 어떻게 씻어야 할지 막막했다. 생수를 몸에 퍼부을 순 없잖아.
“난 장화 신어도 똑같던데…….”
유찬 형은 뒤뚱거리면서 걷게 된다며 영 불편하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장화에서 발이 쏙 빠져나왔는데,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는지 펄을 한 번 디뎠다가 장화에 발을 꾸겨 넣는 폼이 꽤 익숙해 보였다. 잠깐 드러난 유찬 형의 발과 다리는 양말은 물론이고, 종아리까지 펄로 시커메져 있었다.
“형도 엉망이네요.”
“응. 양쪽 다 그래……. 맞다, 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해탈한 것처럼 웃던 유찬 형이 내가 들고 있던 깃발에 관심을 보였다.
“아! 맞아요! 이거!”
형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방긋방긋 웃으며 깃발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깃발에 묻어 있던 펄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앗, 죄송해요.”
“이미 더러워져서 괜찮아.”
그 말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유찬 형은 뺨에 묻은 펄을 손등으로 슥슥 문지르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뭔데? 설마 스팟 찾았어?”
“네! 이거 유찬 형 깃발이에요.”
“내 깃발이라고?”
활짝 웃으면서 형에게 깃발을 내밀었다.
“네! 아예 우리 베이스캠프로 삼아서, 텐트 설치해도 좋을 것 같아요!”
유찬 형과 정이한이 모두 관심을 보이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다들 얼마나 좋길래 그러냐고 궁금해했지만 내가 동굴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감동을 두 사람도 직접 보고 느끼길 바라서 입을 다물었다.
“비밀이에요! 기대하세요!”
어떻게 졸라대도 내 입에 채운 지퍼를 열 순 없었다.
“으, 궁금하네.”
“헤헤.”
유찬 형은 픽 웃고는 플라스틱 통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아직 좀 부족해서 더 잡아야 할 것 같은데, 하온이는 밖에서 기다릴래?”
“어? 아뇨. 저도 해볼래요!”
“조심히 다녀, 또 넘어질라.”
“네!”
정이한이 건네준 모종삽을 손에 꼭 쥐고 천천히 돌아다니는데, 바다에서 뭔가를 줍는다는 게 생각보다 재밌었다. 정이한이 알려준 대로 숨구멍이 있는 펄을 파서 조개를 줍고, 바위틈에 소라나 고동이 붙어 있나 살피던 중 바위 사이에 고여있는 바닷물 속에서 매우 수상쩍고, 미끈거리는 뭔가를 발견했다. 생긴 게 꼭 돌멩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되게 징그럽게 생겼네. 이것도 먹는 건가? 꿈틀거리는 게 껍데기 없는 돼지 달팽이 같기도 하고……. 손으로 만지기 찝찝한 생김새라 모종삽 끝으로 콕콕 찔러 봤다. 그러자 계속 내 근처에서 맴돌던 정이한이 슬쩍 다가와 군소라고 알려줬다. 보통 안 먹는다길래 바로 관심을 끊었다.
정이한과 유찬 형의 플라스틱 통이 어느 정도 채워졌을 무렵 바닷물도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 내가 기준으로 삼아뒀던 멀리 있는 바위의 밑부분이 절반 가까이 잠겼다.
뭐 이렇게 빨라? 이거 은근히 무섭네.
바닥만 보고 걸어서 그런가,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해안가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걷기 힘든 펄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물이 차는 속도가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전신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저희 안 나가요?”
바로 옆에 있는 정이한의 셔츠 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면서 물었다. 그러자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편 정이한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나가야겠네. 유찬 형!”
50미터쯤 떨어져 있던 유찬 형이 우리 쪽을 봤다. 정이한이 큰 소리로 나가자고 외치자, 곧장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이한은 앞장서 걸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바닷물에 쫓기는 느낌이 들어서 좀 무서웠던 터라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정이한을 따라 나가면서도 자꾸만 뒤가 신경 쓰였다.
“무서워?”
그걸 또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물어온다. 앞만 보면서 걷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조금요. 생각보다 물이 빨리 차네요.”
“응. 원래 밀물은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빨라. 멀어 보여도 순식간에 코앞까지 오거든.”
“으아…….”
넘실거리며 차오르는 바다 한가운데 서서 옴짝달싹 못 하는 나를 떠올렸다가 진저리를 쳤다. 정이한이 그런 날 보고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상체를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너한텐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어……. 또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네. 정이한은 드높고 파란 하늘을 닮은 미소와 함께 “나 수영 잘해.”하고 덧붙였다.
뭔가, 되게 든든하네. 생각해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안에서 정이한은 불안한 어린애 같은 이미지였다. 금방 고꾸라질 것 같은 위태위태함이 자꾸 신경 쓰여, 멤버로 함께 가는 이상 얘 만큼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멤버.
그런데…….
이제 제법 형처럼 구네. 신기하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정이한 만큼은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단 말이야. 깊숙하게 뿌리 내린 거목처럼 언제나 이 자리에 서서 나를 든든하게 지켜봐 줄 것 같은, 그런 느낌.
***
드디어 단단한 땅을 밟았다. 갯벌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바닥에 철퍽, 주저앉은 유찬 형은 거침없이 장화를 벗어 던졌다. 펄로 잔뜩 더러워진 양말까지 벗어 던진 형이, 무인도와 어울리지 않는 캐리어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씻지?”
유찬 형과 나는 엉망이었고, 상대적으로 멀쩡한 건 정이한 뿐이었다. 하지만 정이한도 여기저기 펄이 잔뜩 묻어있어서 우리 셋 다 씻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진흙에 절어 자꾸만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옷을 펄럭거리면서 피디님을 찾았다. 그러자 잘 찾아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씻을 만한 곳이 있긴 있나 본데. 도대체 어디에 그런 곳, 아……!
“오른쪽 해안가 따라가면서 보니까 부서진 집이 몇 채 있더라고요. 보통 집 근처에 우물 있을 확률이 높지 않아요?”
“그럼 그쪽으로 가보자.”
“……폐가야?”
유찬 형은 조금 떨떠름해 하는 기색으로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먼저 물었다. 그래서 철근이 다 드러날 정도로 부서진 집이 두 어채 있었다고 본 그대로 말했다.
“으아…….”
나는 별생각 없었는데, 유찬 형 반응을 보니까 어쩌면 거기에 내 공포체험 깃발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가라는 말에 우물쭈물하는 유찬 형에게 해지면 더 무섭지 않겠냐고 묻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형이 빨리 가자면서 역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정확하게 다섯 채의 집이 반파된 상태로 있었지만, 아쉽게도 내 깃발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물은 찾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무척 깊어서 괴물의 입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씻을 수 있는 물이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새 꾸덕하게 말라버린 펄이 움직일 때마다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게 신경 쓰이던 차였다. 심지어 소금기까지 있어…….
빨리 씻기 위해 셔츠를 벗으려고 했는데, 카메라가 신경 쓰였다. 이거 아무래도 몸 좋은 멤버들 겨냥한 상황이었나 본데……. 별 볼일 없이 납작한 내 배를 드러내도 되는 건가?
그, 그래도 상의 탈의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아직 찍지만 않았지, 언젠가 수영복 촬영 씬도 있을지 모르잖아! 여름을 겨냥한 시즌 송 뮤비에서는 충분히 들어갈 법한 컨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못 할 것 없긴 한데…….
이미 유찬 형은 상의 탈의 후 등목 자세를 취한 채였고, 정이한이 등에 물을 뿌려주고 있었다. 시원하게 등목하는 유찬 형을 보면서 나도 결심을 굳혔다.
벗자.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옷 벗는 일 자체가 처음이라 부끄럽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카메라가 신경 쓰여서 최대한 카메라를 등진 채 우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딱 달라붙은 옷이 잘 벗겨지지 않아서 꼼지락거리다가 겨우겨우 머리를 빼냈는데, 그것만으로도 개운해서 주저했던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알았다. 아오, 진작 벗을걸.
“이한 형, 저, 도…….”
뭐, 뭐지? 유찬 형에게 물을 뿌려주던 자세 그대로 굳은 정이한이 입을 벌린 채 날 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양동이가 툭 떨어지면서 유찬 형의 머리를 제대로 가격하곤 까랑까랑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굴렀다.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