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28화 (128/320)

128.

강현 형은 귀신 같은 거 안 무서워할 것 같았는데, 되게 의외라 신선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좀 빤히 보고 있었나 보다. 강현 형이 헛기침하면서 카메라 보라고 눈치 줘서 아차 싶었다. 카메라 앞이었지, 참.

얼굴에 화색이 도는 피디님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윙크를 받았다. 그게 마치 공포체험을 쪽지에 적어낸 내게 보내주는 특급 칭찬처럼 느껴졌다.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그런 내 생각을 뒤로한 채, 피디님의 무인도 설명은 쭉 이어졌다. 이 섬에는 우리가 적어 낸 소원을 성취할 만한 최적화된 스팟이 있다고 했다. 소원 성취라는 표현이 맞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결론은 섬에 머무는 동안 다섯 군데의 스팟을 찾고, 멤버들과 다 함께 스팟 앞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오면 미션 성공.

다섯 군데라면 강현 형의 ‘해외여행’ 스팟도 포함인 건지 미심쩍었는데, 심지어 그것도 있단다. 뭔가 해외처럼 보이는 장소가 있나 본데.

일단 미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았고……. 그런데 지금 제일 중요한 설명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지 않나?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내 직감이 틀렸기를 바라면서 피디님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제발, 먹을 건 둘째 치더라도 잠자리만은 보장해 줘…!

“그럼 제일 궁금한 내용이 있으시겠죠?”

“밥이요!”

“저희 잠은 어디서…….”

이서호와 유찬 형이 동시에 물었다. 피디님은 마침 원하는 질문이 나왔다는 듯 시원스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찾은 스팟에서 찍은 사진과 1:1로 교환해 드립니다!”

그래도 물은 기본으로 제공되니 필요하면 얼마든 추가 제공해주겠다는데, 정글의 법규도 물은 준다. 우리가 우우, 하면서 비난하자 피디님이 낚시, 채집, 조리 등에 필요한 각종 장비도 모두 지원해줄 거라면서 우리를 달랬다.

그래, 이게 어디야. 그리고 설마 진짜 굶기기야 하겠어? 열심히 하라고 등 떠밀기 위한 동기부여 장치겠지. 쫄쫄 굶게 생겼으면 미니 게임이라도 시켜서 먹을 걸 줄 것 같았다.

그래야 아이돌 리얼리티지. 아니면 그냥 극한 서바이벌 예능이랑 뭐가 다르냐고. 분명히 우리 디어리는 우리가 굶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주겠지. 줘야 하는데. 주…려나?

***

이동 시간이 꽤 길었던 탓에 새벽같이 촬영을 나왔음에도 벌써 오후 1시를 넘기고 있었다. 다들 배고플 시간이라 그런지 이서호가 빨리 뭐든 하자면서 건네받은 도구함을 뒤적거렸다.

“낚시?”

그러면서 낚싯대와 작살을 꺼내 드는데, 우리가 작살로 뭔가를 잡을 수나 있을까, 싶었다. 물고기도 본능이 있는데 우리한테 잡힐 만큼 멍청한 물고기면 이미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낚싯대는 가능성 있지.

“엥? 미끼가 없는데?”

이서호가 도구함을 전부 뒤집어엎을 것처럼 뒤적거렸지만, 끝내 미끼는 찾을 수 없었다. 미끼부터 직접 잡으라는 건가.

“이한 형! 통발 있는데 이것도 미끼 있어야 하지?”

“응, 그렇지.”

“으아! 그물은 뭐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오고…….”

이서호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단 뭐라도 잡자.”

정이한이 바닷가를 보면서 말했다. 마침 썰물 때인지 조금 전보다 해안선이 넓어져 있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펄을 보니 조개를 줍거나, 작은 게를 잡아다가 미끼로 쓰면 될 것 같았다. 바위에 붙은 굴을 따도 될 것 같고. 운 좋으면 고동이나 소라 같은 게 있을지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텐트였다. 하루 굶는 것보다 잠자리 불편한 게 나한테는 더 치명적이었다. 푹 자야 체력이 가득 찬단 말이야. 형들한테 치대기에는 다들 바쁘게 돌아다닐 것 같아서 그것도 애매해 보이고.

스팟을 먼저 찾아봐야 하나…….

“얘들아, 일단 모여봐!”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우리를 불러 모으는 유찬 형의 목소리에 일단 형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동그랗게 모여 선 우리에게 유찬 형이 말했다.

“일단, 지금 딱 썰물 때거든? 그래서 말인데, 인원을 좀 나눴으면 해. 베이스캠프 탐색, 먹거리 채집, 스팟 탐사. 이렇게 세 팀으로 나눠서 움직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역시 우리 유찬 형. 극한 상황에서도 리더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모두 만장일치로 찬성하자 형은 곧바로 인원수까지 나눠줬다.

“이한이가 바닷가에서 자랐댔지?”

“응.”

“그럼 이한이는 나랑 펄에서 먹을 만한 것 좀 찾자. 체력 좋은 서호랑 강현이는 스팟 찾으러 가고, 하온이는 텐트 설치할 만한 곳을 찾아줘. 숲으로는 들어가지 말고, 밀물 때 침수되지 않게 조금 지대가 높고 평평한 해안가 근처면 돼.”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지시를 내리는 유찬 형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줬다. 내게 주어진 역할이 제일 몸 편한 일인 것 같아 못내 미안했지만, 그런 만큼 완벽한 잠자리를 찾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좋아, 그럼 바로 움직이자. 다치지 말고, 안전제일 알지? 다들 무리하지 마.”

응! 우리가 힘차게 대답하자 유찬 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이한과 유찬 형은 곧장 도구함에서 장화, 플라스틱 통, 과도, 모종삽을 하나씩 들었다. 강현 형도 숲에서 먹을 거 발견하면 채집해 오겠다면서 큰 주머니와 정글 칼을 챙겼다.

스팟 탐사팀은 곧장 오솔길을 따라 사라졌고, 나는 해안가로 내려가는 정이한과 유찬 형을 배웅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실 아까까지 우리가 서 있던 장소가 텐트 치기에 제일 좋아 보이기는 했다. 바다와 가까웠고, 부서진 방파제와 이어지는 시멘트 길이라서 지대도 높은 데다 평평하기까지. 하지만 낭만은 없지!

이왕 경치 좋은 섬에 왔는데, 디어리들에게 예쁜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번 자리 잡고 나면 텐트에서 지내는 장면이 카메라에 제일 많이 잡힐 텐데, 시멘트 바닥 위에 있는 것보다는 예쁜 곳이 좋잖아.

어디가 좋으려나. 왼쪽은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는 절벽 지형이길래, 오른쪽을 따라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해안선을 따라 쭉쭉 걷다 보니 몇 군데 괜찮은 곳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일단 최대한 둘러볼 생각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바닷가에 적응한 코는 비린내 대신, 싱그러운 풀 냄새와 어디에 피어 있는지 모를 꽃향기를 좇았다.

근처에 꽃밭이 있는 걸까? 문득 이는 호기심에 숲 안쪽을 기웃거리면서 지나가다가 유찬 형이 적어낸 쪽지 내용이 생각났다. 형은 별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솔직히 여기라면 어디에 있든 밤만 되면 은하수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굳이 한 곳을 스팟으로 지정해 놓았다면, 그만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하늘이 아름답다는 소리 아닐까?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거나, 로망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 근처에 자리 잡으면 예쁜 장면이 나올 것 같은데. 가는 길이 험난하지 않고, 경사가 심하지 않다면 평탄화 작업을 해서라도 베이스캠프로 삼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곧장 장소 선정 기준을 바꿔 평평한 바닥 위주로 찾는 대신, 주변 경치를 더 집중해서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색 깃발을 발견했다. 언뜻 봤을 때 새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높은 지점이었다. 곧장 무릎까지 자란 무성한 풀을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곧 깃발이 왜 저렇게 높은 곳에 꽂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깎아 지른 절벽의 밑동, 아파트 2층 높이 정도 되는 언덕 위에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있었다. 깃발은 그 동굴 입구 바로 옆에 꽂힌 채 나부끼는 중이었다.

더 잴 것도 없이 서둘렀다. 풍경이 아무리 예뻐도 진입로가 험난하면 베이스캠프로 삼긴 어려울 텐데, 생각보다 올라가는 길이 완만하고 넓었다. 그리고… 뽑아 든 깃발에는 ‘유찬의 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맞췄다!

도대체 어떻길래? 호기심에 동굴로 들어가자마자 입이 쩍 벌어졌다. 동굴 중앙에 신비로운 빛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빛기둥을 따라 고개를 든 순간 삐뚤빼뚤한 별 모양으로 뚫려 있는 천장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와아…….”

절로 탄성이 나왔다. 밤이 되면 저 너머로 은하수가 보이는 걸까? 유찬 형의 깃발이 꽂힐 만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대가 높은 건 물론이고, 동굴 바닥 또한 평탄하고 반대쪽 면이 막혀 있어 바람이 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천장이 뻥 뚫려 있는 만큼 불을 피워도 연기가 자욱해지지 않을 거고, 박쥐도 없다! 동굴치고는 크게 습하지 않아서 뱀도 없어 보이고.

게다가 안쪽으로 갈수록 천장이 낮아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동굴 벽 쪽으로 텐트를 설치하면 좋을 것 같았다. 대충 이쯤이려나. 위치를 잡아볼 겸 시험 삼아 앉아봤는데, 눈 앞에 펼쳐진 경치가 너무 예뻤다.

아치형으로 된 동굴 입구가 한 폭의 풍경화로 바뀌어 있었다. 빽빽하게 찬 풍성한 나무,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지평선까지. 그리고 에어컨 튼 것처럼 시원해! 이렇게까지 완벽할 수 있나?

나는 들뜬 마음으로 깃발을 쥔 채 서둘러 유찬 형과 정이한이 있는 갯벌로 돌아갔다. 이따금 뒤를 돌아 내가 어떻게 왔는지 꼼꼼히 주변 경관을 기억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가는 길 잃어버리면 곤란하니까.

부서진 방파제 근처까지 오고 나니, 거기서 유찬 형과 정이한을 찾는 건 쉬웠다. 두 사람은 각자 흩어진 채 열심히 먹거리를 채집하고 있었다.

깃발을 흔들며 두 사람을 불러 보았지만, 거리가 멀어서인지,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잠깐 망설이던 나는 곧 결심과 함께 물이 빠지고 있는 갯벌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처음에는 걸을 만했는데, 점점 바닥이 질척거려 균형 잡는 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유찬 형을 향해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형!”

아직도 안 들리나? 조금 더. 딱 열 걸음만 더 가자.

“유찬 혀엉!”

드디어 유찬 형이 나를 돌아봤다.

“어? 하온아~”

유찬 형이 해맑은 얼굴로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형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정이한도 뒤늦게 날 발견하고는 유찬 형처럼 ‘하온아~’하고 나를 불렀다.

잠깐 정이한에게 고개 돌린 순간이었다. 운동화에서 발이 쏙 빠지는 느낌과 함께 몸이 앞으로 기우뚱거리면서 흔들렸다.

“하온아!”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내게 대답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여기서 넘어지면 대형 참사다! 어떻게든 균형을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잠깐 사이 반대쪽 발도 깊숙이 박혀 버리는 바람에 제어할 수 없게 된 몸이 크게 기우뚱거렸다.

파닥거리면서 넘어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노력은 무참히 나를 배신했다. 결국 엉덩방아 찧으며 펄에 처박히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엉망이 된 나는 주저앉아서 허망하게 하늘을 봤다.

이거 어떻게 씻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