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25화 (125/320)

125.

“하온아, 도착했어.”

주차를 끝낸 매니저 형이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는 대본집을 말아서 손에 쥔 뒤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좋아. 할 수 있다!

오디션 장소가 세트장이라서 의아했는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준비된 대기실에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오직 나를 테스트하기 위한 장소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은근한 압박감과 긴장감에 손가락이 차갑게 굳었다. 배어 나오는 땀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면서 심호흡했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라는 뜻이겠지?

이미 대본집이 다 닳도록 외운 대사를 다시 한번 점검하면서 내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움직일 시간이 됐다.

안내받은 곳으로 들어가니 감독님과 승리한, 그리고 형사 역할을 맡은 또 다른 주연 배우 고우진 선배님, 드라마 작가와 원작 소설가까지 보기만 해도 주눅 드는 인물들이 주르륵 앉아 있었다. 특히 유명세만큼 영상화에 까다롭다는 원작가 님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짧은 인사를 끝내자 감독님이 곧바로 시작하자는 사인을 보내셨다.

“먼저 하굣길 씬부터 갑시다.”

“저랑 합을 맞출 테니 제가 같이하죠.”

감독님의 흔쾌한 허락에 승리한이 긴 테이블을 둘러 나왔다.

“연습 좀 했어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만큼은요.”

“기대할게요.”

여전히 기대 따위 전혀 없다는 듯 무심한 말투였다. 준비되면 시작하라는 말에 벽 쪽으로 걸어가 스탠바이 위치를 잡았다.

“시작하겠습니다.”

감독님이 짧게 끄덕이는 걸 큐 사인으로 삼아, 가방끈을 쥔 것처럼 양손을 가슴께로 올려 말아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친구와 떠들 듯이 말하면서 천천히 걸어 나오다가, 몇 걸음 채 걷지 않아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형이 마중 온 걸 발견했다.

친구와 떠들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지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본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달음에 달려가 승리한을 끌어안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형!”

“현아.”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승리한이 조용히 천장을 올려봤다. 이건 대본에 따로 없던 제스처인데? 원래는 ‘널 데리러 올 시간은 있어.’라고 말해야 했다. 이 사람이 날 시험하는 건가? 머리를 굴리며 승리한을 따라 고개를 위로 올린 순간, 나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애드립 대사가 나왔다.

“아! 비 올 것 같아서 왔어? 근데 나 우산 있다? 오늘 일기 예보에서 비 올 확률 50%랬잖아.”

나는 손을 뒤로 돌려 가방 안주머니를 팡팡 두들기는 행동을 했다. 승리한이 야트막한 미소를 띤 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들이 쓰다듬어 줄 때를 떠올리면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승리한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래도 형이 오니까 좋다.”

“아무리 바빠도 널 데리러 올 시간은 있어.”

아, 원래 대사로 돌아왔다. 합격인가? 일단 오디션 보고 있는 씬은 마무리해야 했기에 나도 이어지는 대사를 입에 올렸다.

“그래도……. 그러면 나 때문에 형 피곤할까 봐.”

“네가 웃어주기만 하면 돼.”

“진짜 그걸로 되나?”

“그럼.”

나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웃었다. 늘 든든한, 너무 좋아하는 디아스 멤버들, 그런 우리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보내주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디어리들과 함께 있는 순간을.

그리고 정적 속에서 몇 초의 시간을 보낸 뒤 승리한에게서 떨어져 테이블 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상입니다.”

감독님이 인중에 얹고 있던 펜을 뚝, 떨어트리더니 의자를 밀어 넘어트릴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격하게 박수를 치셨다.

“와! 이야아, 이거 기대 이상인데? 진짜 아이돌 맞아? 원래 배우 지망생 아니었어?”

“연습 많이 했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겸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 번 더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연기 스탯 보정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았다. 혹시라도 건방져 보일까 봐 공손하게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갠 뒤 연신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송 작가는 어때?”

감독님이 가장 끝에 앉아 계시는 원작가에게 물었다. 여성 작가님이셨는데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계속 키보드만 타닥타닥 두들기고 계셨다. 그러자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모두가 숨죽인 채 고요한 시간을 만들었다.

타이핑 속도가 조금씩 늦어지더니, 이내 흘러내린 앞머리를 깔끔하게 귀 뒤로 넘긴 원작가님이 입을 열어 말씀하셨다.

“품에 안겨서 죽는 씬도 연습했어요?”

“네. 두 장면 본다고 하셔서 연습했습니다.”

“보여주세요.”

이번에도 역시 상대역이 필요한 씬이었다. 승리한이 해주려나.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주변 풍경을 그렸다.

비가 내리는 밤의 횡단보도. 건너편에는 내 전부인 형이 있다. 형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하던 나는,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뛰쳐나간다. 쨍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내 몸을 덮쳐온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이 떠오르고, 날 보고 있는 형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내 주위로 길을 건너려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비명과 탄식은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내 시선은 오직, 인파를 헤치고 뛰쳐 들어오는 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디션 볼 씬은 이 직후의 상황이었다. 우산을 떨어트린 탓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온몸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아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눈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빗방울 때문에 간신히 눈꺼풀만 깜박거리다가 그마저도 힘에 부쳐 밭은 숨과 함께 쿨럭, 피를 토했다.

내 아픔보다는 형이 더 중요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형의 얼굴이 보였다. 잔뜩 찡그린 눈썹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눈동자는 몸 안의 수분이 싹 다 메말라 버린 사람처럼 뻑뻑해 보였다.

승리한의 손이 내 뺨을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벌벌 떨렸다.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하염없이 정현의 이름만 부르는 절절한 목소리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팠다.

“혀, 혀엉, 나, 괜, 컥, 쿨럭, 켁, 괜찮, 아…….”

자꾸만 바닥으로 추락하려는 팔을 가까스로 들어 형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제야 손이 피투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새하얗고 단정한 얼굴에 묻은 핏자국이 선연해서 소매로 닦아주려고 하는데, 팔이 잘 들리지 않았다.

승리한이 내 쪽으로 얼굴을 숙였다. 그제야 겨우 닿은 뺨을 소맷자락으로 닦아내 보았으나, 오히려 더 더러워지기만 했다.

“미안, 내가, 더럽혔…….”

“괜찮아, 하나도 안 더러워. 현아, 현아. 내 동생……. 죽지……마. 죽으면 안, 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내 손을 덥석 붙잡은 채 기도라도 올리듯 손목에 이마를 대고,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는 괜찮아, 라고 말해주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한 채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점차 의식이 희미해지고, 전신의 힘이 빠져나갔다.

힘없이 떨어지는 팔을 승리한이 꽉 움켜잡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내 손을 잡은 체온이 움찔, 떨렸다. 동시에 승리한이 벌떡 일어나 “여기요! 여기 있어요, 우리 현이 살려주세요!”하고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구급차가 나타나면서 컷이었다.

충분한 공백을 둔 후, 슬그머니 눈을 떠서 연기가 완전히 끝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벌떡 일어났다. 솔직히 혼자 했으면 허공에 대고 허우적대는 내 모습이 떠올라 집중하기 어려웠을 텐데, 승리한이 상대 배역을 해준 덕분에 더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가슴 한쪽이 먹먹해서, 그저 형에게 미안한 감정만 가득 차 있었다.

“질문할게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원작가 님이 먼저 운을 뗐다. 바짝 긴장한 채 작가님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나를 훑고 있었다.

“정현이 지문에는 정준의 뺨을 닦아주는 행동 지문이 따로 없었거든요. 왜 그렇게 하셨어요?”

“승리한 선배님의 연기 때문에요.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제 눈에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어요?”

“네.”

내내 첨예한 표정으로 내 연기를 지켜보던 작가님은, 그 말에 돌연 눈 녹듯이 청량하게 웃으셨다.

“좋네요. 그분보다 이미지도, 연기력도 좋네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감독님.”

“크으. 그렇지? 찰떡이라니까. 하온아?”

“넵.”

“정현이 잘 부탁한다.”

합격인가? 이렇게 바로? 나는 무의식중에 승리한을 쳐다봤다. 승리한은 봄 햇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잘 부탁해요. 내 동생.”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인정받았네. 승리한에게 인정받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라고 좀 기뻤다. 숙소로 돌아가서 형들한테 들려줄 이야기보따리가 한 움큼 생겼네.

촬영 일정은 소속사랑 연락해서 조율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오디션이 마무리되고, 나는 인사와 함께 곧장 방을 나섰다. 그러자 문 앞의 좁은 복도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는 중인 매니저 형이 보였다. 형은 나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춘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면서 브이를 치켜세웠더니 매니저 형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와락 안은 채 내 등을 팡팡 두들겼다.

“잘했어! 너무 잘했어, 우리 아티스트! 아구 기특해!”

만개한 잇몸이 형의 기쁨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

숙소로 들어서기 무섭게 네 쌍의 고개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다들 눈짓으로 결과 물어봐? 말아? 네가 물어봐! 아니, 더 궁금한 사람이 물어봐야지. 형이 해! 하면서 눈치 보는 게 뻔히 보였다. 결과가 궁금하긴 한데 혹시라도 내가 오디션에 낙방해 실망한 상태일까 봐 차마 묻지 못하는 것 같았다.

떨어진 것처럼 굴어서 조금 놀려줄까 했는데, 그러잖아도 내 걱정이 산만한 사람들이라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합격했어요. 촬영 일자는 회사랑 조율한대요.”

“우와아아!”

“와! 진하온! 와아!”

“하온아! 잘했어!”

“고생했다.”

형들이 동시에 내게 달려들어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어깨를 두들기고, 등도 토닥여주고, 심지어 포옹까지 해줬다. 이게 이렇게까지 축하받을 일인지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아무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내 드라마 오디션 합격 기념 파티를 열자는 이서호의 제안에 모두가 찬성했다.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주머니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우리 패턴을 꿰고 있는 매니저 형이 맛있는 거 실컷 사 먹으라고 쥐여준 법카였다.

어쩌다 한번 생기는 치팅 데이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소식에 이서호가 가장 기뻐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배달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오늘 오디션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승리한 배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이한이 오묘한 기색을 보였다. 눈을 깜박이는 횟수가 늘어났고, 눈썹이 팔자를 그리면서 찡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더니, 은근히 속삭여왔다.

“다음에 촬영갈 때 나도 꼭 데려가 줘, 하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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