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24화 (124/320)

124.

“진하온! 나 잘했냐?”

제 뒤에 누가 있는지 알 리 없는 이서호가 환하게 웃으면서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칭찬을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 같은 녀석에게 눈짓으로 다급히 뒤쪽을 가리켜 보였다.

“헙.”

그제야 고갤 돌려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한 이서호가 재빠르게 내 옆으로 와 섰다. 그리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승리한은 대뜸 이서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당황한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 서, 선배님?”

“죄송했어요.”

“……네? 무, 뭐가요?”

허둥거리는 이서호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영문을 모르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승리한이 허리를 세운 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잘하시던데요. 확실히 연습 많이 하신 티가 났어요.”

“아, 큰 역할도 아닌데요……!”

승리한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이서호 씨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건 쉽지 않아요. 솔직히 열 번 이상 NG 나올 각오 했거든요.”

“으아, 그렇게까지요?”

이서호가 질겁하면서 되묻자 야트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 연기하는 아이돌이 오면 으레 그러거든요. 대사도 제대로 숙지 안 하고 오는 건 놀랍지도 않고, 표정 연기는 딱딱하고, 걸음걸이도 어색하고. 그러면서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승리한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숨 쉬었다. 한 맺힌 게 많은 모양이네. 우리가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어색한 반응만 보이자 그도 조금 민망해진 듯한 얼굴로 우릴 보고 웃었다.

“죄송해요. 푸념 같은 걸 해버렸네요. 사실 도라이 씨가 워낙 잘하시니까, 거기에 편승해서 끼워 넣기로 배역 받아 가신 줄 알고 오해했어요. 그 점 사과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오해……가 아니긴 하지. 그래도 이서호가 잘한 덕분에 아이돌 출신을 향한 일방적인 오해도 풀고, 진심 어린 사과도 받았다. 괜히 내가 다 뿌듯해져서 이서호를 대견하게 보고 있는데, 승리한이 지그시 내 쪽을 보며 물었다.

“그쪽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진하온입니다. 선배님.”

“진하온 씨. 연기에 관심 있어요?”

“……저요?”

왜 갑자기 나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서호도 의아한지 나와 승리한을 번갈아 봤다.

“아무래도 그쪽한테도 곧 섭외 갈 것 같아서요.”

“저… 한테요? 왜요?”

“이미지가 딱 맞거든요. 정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촬영 씬은 많지 않겠지만, 중요한 역할이에요. 연기에 관심 없으시다면 제가 따로 감독님께 말씀드려서 컷 하려고요. 대충하면 곤란한 배역이라.”

이서호는 인정하겠지만, 나는 인정 못 해주겠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네. 연기에는 뜻도 없고, 굳이 나까지 승리한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시스템: 서브 미션 완료! 보상으로 데우스 랜덤 박스x1를 획득하셨습니다!>

<시스템: ‘연계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연계 미션? 이건 또 뭐지? 타이밍이 오묘하길래 고민하는 척하면서 재빠르게 미션 창을 불러냈다.

<서브 미션-연계>

─ 배역을 거머쥐고, 성공적으로 촬영하세요!

O 성공 시 디아스의 인지도 대폭 상승

O 실패 시 개선 불가능한 적대 관계 형성

인지도 대폭 상승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머릿속에 꽂혀 들어왔다. 적대 관계라는 건 아마 승리한을 말하는 걸 테니 그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연기 스탯은 이미 A-였다. 어떤 역할이 들어오든 제대로 해낼 자신은 있었다. 우리 그룹의 성공이 걸려 있는 일이라면 뭐든 못 하겠어?

우리 그룹의 인지도를 빠르게 늘리면 좋은 이유야 차고 넘쳤지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교주. 교주는 디아스가 크는 게 제게 도움 될 거라고 했었다. 그 말은 꼭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스멀스멀 퍼지는, 장마철 반지하에 피는 꿉꿉한 곰팡이 같았다.

어느 정도 수준의 성장을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어버리면 건드리기 어려워지겠지. 교주와 우리 멤버들이 안전 이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할 거다.

게다가 내내 잠잠했던 서브 미션이 주어진 타이밍도 무척 좋았다. 마치 데우스가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그래,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음. 저도 연기는 안 해봐서 어떨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섭외가 들어온다면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그래요.”

승리한은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고저 없는 대답을 했다.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까처럼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느 쪽이야? 컷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어어, 거기 얘들아!”

그때, 감독님이 우리를 부르면서 허둥지둥 달려오셨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스태프분들을 쭉 훑어보시는 게 매니저 형을 찾으시는 것 같았다.

“매니저 형은 다른 멤버들 데리러 갔어요. 곧 돌아올 거예요.”

“아, 그래? 그럼 매니저 오면 감독이 찾았다고 전해줄래?”

“넵.”

감독님은 짧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승리한도 다음 장면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양해를 구한 뒤 메이크업을 수정하러 가버렸다.

“오오, 진하온 캐스팅 되는 건가?”

친구 따라 오디션장에 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나 혼자 합격한 꼴인데, 이거……. 그런데도 이서호는 질투나 시샘 따위 모르는 사람처럼 나보다 더 기뻐하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뭐…….”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너도 연기 수업받지! 히히, 신난당!”

……아무래도 기뻐하는 포인트는 내 캐스팅 사실보단, 연기 수업인 것 같았다. 혼자 하기 외로웠나?

***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라마 캐스팅은 반만 긍정적이었다. 프로필 사진을 요구해서 줬다고 하던데, 일단 내 외모가 주는 이미지가 감독과 원작가의 심금을 울리긴 한 것 같았다. 승리한과 함께 카메라에 잡혔을 때 형제라는 느낌이 들도록 비주얼적으로 꿀리지 않으면서, 병약하고 낭창한 느낌이 있는 미소년.

하지만 연기 경험 없는 아이돌이라는 점 때문에 비주얼만 보고 덜컥 캐스팅하기엔 우려가 된다며 오디션을 보고 싶다는 반쪽짜리 섭외가 들어왔다. 갓혜미 실장님은 다시 없을 좋은 기회이니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면서 넌지시 연기 트레이닝에 대한 의사를 물어보셨다.

올해 가장 기대되는 드라마이자 서스펜스 추리 스릴러라는 코어 시청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장르, 거기에 흥행 보증 수표인 승리한이 주연이다. 여기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도라이 선배님까지 합세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팬덤을 끌고 다닐 테니, 시청률 고공행진을 예약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기, 그것도 내 촬영분이 송출될 거로 예상되는 시기가 우리의 컴백 예정 일정과 정확하게 겹쳤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지만, 컴백 준비만으로도 빠듯할 텐데 드라마 촬영까지… 나 진짜 죽어나게 생겼네.

그나마 다행인 건 컴백 전에 모든 촬영이 끝난다는 거였다. 컴백 후에는 온전히 활동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야, 진하온! 회사 가자!”

이서호가 싱글벙글한 낯으로 나를 불렀다. 오늘부터 나도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게 되었다.

“기다려. 우리도 갈 거야.”

유찬 형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야구 모자를 뒤집어썼다. 정이한도 외출 준비 끝냈고, 편안한 츄리닝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강현 형까지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따라 나왔다.

“강현 형도 가요?”

“응. 러프 곡 나왔으니 나도 슬슬 시작해야지.”

강현 형이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유찬 형이 “악악!” 소리를 지르면서 귀를 틀어막았다. 못 불러서 그런 게 아니라, 유찬 형이 작곡한 곡이라서 그랬다. 자기 노래가 뭐 그렇게 부끄럽다고, 적응을 못 하네.

“그거 부르지 말랬지!”

“왜. 좋은데.”

“맞아요. 진짜 좋아요.”

우리 디아스의 작곡돌, 마에스트로 유찬 형은 정말 재능러였다. 정이한과 함께 공동 작업 중이었는데, 세화 형의 도움까지 받아 점점 재능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곡이 너무 좋아서 우리 미니 앨범 1집의 수록곡으로 싣고 싶은 욕심이 퐁퐁 솟았다.

그래서 메인 활동은 회사에서 정해주는 타이틀곡으로 하되, 우리 멤버들의 손으로 작사, 작곡, 안무까지 직접 프로듀싱해서 실장님께 보여드리는 건 어떠냐고 슬쩍 제안해봤는데, 다들 의외로 쉽게 휘말려 들었다. 역시, 말은 안 했지만 하고 싶었던 거야.

지난번에 정이한에게 선물할 화분 사러 같이 갔을 때, 강현 형을 넌지시 떠봤는데 직접 창작한 안무로 무대에 서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덕분에 강현 형의 목표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고.

좋아하는 것에 파묻혀 하루가 다르게 자존감을 회복 중인 정이한, 최상의 컨디션으로 작곡에 대한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유찬 형, 원하는 대로 안무를 창작할 기회가 주어진 강현 형까지.

엿보기 스킬로 본 멤버들의 재능 개화 조건은 이로써 모두 만족했다. 이서호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거니까 예외로 치자…….

그래도 연기 한 번 해본 뒤 빠르게 흥미를 붙인 건 신기했다. 드라마 촬영이 끝났으니까 당장 연기 수업 그만두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서호의 머릿속에 연기 수업을 그만둘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듣는다고 좋아했겠지.

***

그렇게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 주가 훌쩍 지났다. 마침내 찾아온 대망의 오디션 당일, 나는 오디션장으로 가기 위해 막 밴에 오른 참이었다. 응원하겠다고 따라나서려는 멤버들을 모두 떨쳐내느라 꽤 애를 먹었다.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대며 겨우 혼자가 된 나는 대본집에 적힌 드라마 제목을 손끝으로 문지르면서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그저 서브 미션 성공 보상 때문에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인데, 막상 전체 대본을 받아 읽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드라마 제목처럼 등장인물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열정을 잊고, 타성에 젖어 뇌물을 받았던 형사는 그에 대한 처절한 대가를 치르듯 아내와 아이를 죽인 연쇄살인범을 쫓고 있었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고 감정을 잃어버린 연쇄살인범은 살인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연쇄살인범이자, 사이코패스 정준이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무한한 애정을 퍼부은 사람. 정준의 동생이자 유일한 애착의 대상이었던 정현이 바로 내가 오디션을 치르게 될 역할이었다.

나는 과거 회상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형을 너무 좋아하는 몸이 약한 동생, 오직 동생을 위해 의사가 된 형. 그게 과거 회상을 통해 묘사되는 나와 승리한의 관계였다.

하지만 어느 날 정현은 음주 운전 차량에 휘말려 정준의 품속에서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범인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나고, 정준은 동생의 복수를 시작한다.

정현의 사망에 직간접적으로 얽힌 사람들의 가족까지 모두 죽인 거로도 모자라, 비뚤어진 연쇄살인범은 동생을 돌려받고 싶다는 광기에 사로잡혀 신을 믿는 사람의 사신이 되었다.

「나는 갈 수 없으니까… 천국에 가거든 우리 현이 좀 보내 달라고 전해주세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호경 앞에 붙는 정준의 기도는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진다.

「현이가, 내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동생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았다면 나는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었을 거에요.」

취조실을 울리는 덤덤한 목소리, 그리고 엔딩.

승리한이 말한 대로 ‘정현’은 드라마의 분기점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사이코패스의 흉포함을 잠재워주었던 진정제이자, 남들 눈엔 보잘것없기만 할 일상에서조차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밝은 인물. 조건 없이 형을 사랑하는 동생.

가족의 사랑이라…….

내게는 낯선 단어였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연기엔 충분히 녹여낼 수 있을 거야.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절로 미소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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