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23화 (123/320)

123.

치미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억지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승리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기가 무섭게 주변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고요한 서늘함과 압도적인 위압감에 소름이 돋았다. 잠깐 굳어 있는 사이 대뜸 내 턱을 잡아 올린 승리한이 이리저리 감상하듯 돌려봤다.

눈매는 웃고 있었으나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정상적인 사람이 저런 눈을 할 수 있나?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여러 사람을 해친 연쇄살인범을 맞닥뜨린 것 같았다.

본능적인 공포감이 엄습해왔지만, 내가 주춤거리면 이서호가 불안해할까 봐 두 다리에 힘을 딱 주고 버텨 섰다. 싸늘하게 와닿아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얼굴 근육을 움직여 짙은 미소를 만들었다.

“…저, 선배님?”

나를 관찰하던 눈동자에 돌연 이해할 수 없는 먹먹함과 따스함이 서서히 차올랐다. 바로 그때, 이서호가 갑자기 승리한의 팔목을 잡아챘다. 내 턱을 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시커멓게 번뜩이는 안광이 물어뜯을 듯이 이서호를 향했을 때였다.

감독님이 갑자기 승리한의 넓은 등판을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그러자 영혼이라도 바뀐 것처럼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어떻게 들으면 어린애 같은 느낌마저 드는 비명이 들렸다.

“악! 아, 감독님! 아프잖아요!”

승리한이 등을 어루만지면서 투덜거렸다. 버튼이라도 눌린 사람처럼 180도 달라진 분위기에 슬그머니 이서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승리한을 잡고 있던 손은 놓았지만,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이서호가 나를 보호하려는 듯 팔로 내 가슴팍을 가로막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정준이~ 빠져나갔나?”

“아……. 네, 덕분에요.”

“이번엔 뭐 때문에 씐 건데?”

승리한이 정확하게 나를 보면서 말했다.

“저 친구요. 정현이가 떠올라서.”

그 말에 감독님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나를 봤다. 아까 인사드릴 때 대충 흘겨보던 것과 달리 꼼꼼하게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네. 이미지가 꼭……. 가만. 그렇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낸 감독님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졸지에 승리한과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둘 다 연기는 처음이랬죠?”

“네, 처음입니다.”

이서호가 답지 않게 격식 차린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조금 전까지 꼬리 흔들던 강아지는 어디 갔는지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게 이상했다.

“그쪽은요?”

나를 지그시 보며 물어오는 승리한은 아까 그 날짐승 같던 분위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저 우리에게 별 관심 없는 탑 배우로 돌아와 있었다.

“저는 그냥 응원차 따라왔어요. 드라마 출연은 안 해요.”

“연기 경험 없어요?”

내 말을 뭐로 들은 건지.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다.

“네. 없어요. 드라마 촬영하러 온 게 아니라 응원하러 온 거예요.”

미취학 아동도 이해할 수 있게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줬다.

“촬영 전까지 연습 많이 하세요. 말했다시피 재촬영하는 거 싫어하거든요. 몰입 깨지는 거 질색이라.”

또 이러네?

입술을 말아 문 이서호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꿀렁였다. 긴장하고 있는 티가 역력해 괜히 지켜보는 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오늘이 첫 촬영인 신인인데, 굳이 이렇게 부담 줄 필요 없잖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댔다. 하지만 내가 안 참는다고 해서 진짜 사람을 죽일 것도 아닌데, 굳이 참을 필요가 있나?

“NG를…….”

내가 운을 떼자 승리한이 내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인 것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고 싶어서 내는 건 아니죠! 자꾸 그렇게 겁주시니까 우리 서호 형, 연기 잘하는데 긴장해서 실력 발휘 못 할까 봐 걱정되네요.”

내 말을 들은 승리한의 매끄러운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말 그대로 그린 듯한 미소는 이대로 화보에 실려도 될 것처럼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제 말이 서운하세요?”

너무 티 나게 말했나. 단번에 속내를 간파당해 버렸다. 나는 최대한 웃는 낯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서운할 게 뭐가 있어요. 처음 뵈었는데요!”

“음. 사실 베스트 샷을 위해 여러 번 촬영하는 건 문제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쪽들은 어차피 얼굴 팔러 나온 거잖아요. 열정도 없고, 간절함도 없고, 아이돌이니까 당연히 연기에 뜻도 없을 거고. 안 그래요?”

……아, 그런 거였구나. 배우라는 걸 과시하면서 이서호의 기를 누르려던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우리가 싫은 거였다. 정확하게는 얼굴 팔러 나온 아이돌이. 어떤 느낌인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누군가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돌 한 번 해볼까, 하고 내 앞에서 되지도 않는 춤을 대충 추면서 깔짝거리면 나도 누구 놀리나 싶어 화날 거다. 그동안 당한 게 있어서 생긴 편견일 테지만…….

하지만, 당하는 대상이 우리 멤버가 되면 상황이 또 달라진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싸잡아 매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짧은 촬영을 위해 이서호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데. 이서호의 시간과 노력을 폄하 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서호 형, 연습 많이 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회사에서 시키니까 나온 게 아니라요.”

“그래요? 그럼 기대할게요.”

승리한은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다는 듯한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한 뒤 멀어졌다. 우리한테는 냉랭하기만 하더니 촬영장 안에 들어가서는 스태프 분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서호 형.”

“응?”

“잘할 수 있지? 본때를 보여주라고!”

“……무, 뭐?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나는 승리한 쪽을 눈짓으로 격하게 가리켜 보이곤 이서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이서호가 날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뭐야! 왜 그런 반응이야? 자신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보여주기에는 너무 단역이지 않나…?”

그, 그건 그렇긴 해…….

***

우리는 구석에 마련된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촬영 순서를 기다렸다. 단역이라 금방 촬영하고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기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앞 장면의 촬영이 끝나지 않아서였다.

재촬영하는 거 싫어한다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건지, 카메라 앞에는 베스트 샷을 위해 몇 번이고 다시 하는 건 상관없다고 말하던 배우 승리한만이 있었다. 괜히 천만 배우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아까 날 내려다보던 승리한의 눈빛 너머로 보았던, 사람 여럿 해쳤을 것 같은 살인마의 분위기. 그 분위기의 출처를 촬영을 지켜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아까 감독님이 언급한 ‘정준’은 승리한이 이번 작품에서 맡은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의 이름이었다. 짧은 망치를 손에 쥔 채 이미 숨이 끊긴 시체 위로 몇 번이고 내리치는 승리한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했다. 색채가 전부 빠져나간 흑백 영상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유리를 베어 문 것같이 날카롭고 예리한 목소리. 아까 우리와 인사할 때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승리한은 익숙한 동작으로 살해 도구를 가방에 정리해 넣은 뒤, 한동안 가만히 서서 시체를 내려봤다. 시선을 내리깐 얼굴에 짙은 우울함과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꼭 전해주세요.”

승리한은 신발 끝을 적신 피가 물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로 십자가를 그린 뒤 눈을 감고 묵념했다. 그 모습에서 살인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건함이 느껴졌다. 소름 돋는 간극에 팔을 문지르는 사이 감독님의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순식간에 정준에서 승리한으로 돌아온 그가 산뜻한 미소를 지은 채 피해자 역할을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기에 진심으로 임하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잘해주는 건지, 엑스트라에게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잘하시던데요.”

“어휴, 과찬이십니다. 승리한 배우님 연기가 워낙 좋아서 잘 묻어간 거죠.”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쁜 듯이 웃었다.

“아니에요. 박철원 님, 정말 잘하셨어요. 덕분에 좋은 장면을 뽑았습니다.”

엑스트라에게 진심 어린 독려의 말을 전한 승리한은 매니저가 건네준 수건으로 가짜 피를 닦아내면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촬영한 영상 확인. 이번에는 제발 오케이 좀 해라. 마음에 드니 이대로 픽스하자는 감독님의 말에도, 승리한 쪽에서 거듭 재촬영을 요구한 게 벌써 다섯 번째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재촬영을 요구한 이유를 납득할 수밖에 없는, 조금씩 다른 연기를 선보인 탓에, 어이없게도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매번 빠져들어서 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잘하긴 진짜 잘하네.

전생에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 실수할까 봐 샅샅이 조사하고 나왔지만, 프로필이랑 정보만 찾아봤지 연기하는 모습은 여기 와서 보는 게 처음이었다.

솔직히 분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기 하나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구나. 억울할 정도로 완벽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연기를 향한 그의 열정과 진심이 느껴졌다. 저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면 아이돌들 얼굴 팔러 나온다는 이유로 싫어한다고 해도 화 못 내잖아.

“이제 서호 형 차례인가?”

“으으, 응.”

“잘해. 다들 깜짝 놀라게 만들어 줘!”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이서호가 황당해하면서 나를 봤다. 누가 승리한처럼 하랬나? 그냥 아이돌이라는 편견을 깨부술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달란 말이다. 연기 수업받았잖아. 그리고 너 재능있다고.

“서호 형.”

“어어.”

“형 진짜 연기에 재능 있어. 내가 보증할게. 그러니까 주눅 들지 말고, 배운 대로만 해.”

이서호가 나를 멀뚱멀뚱 보다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곁들인 채 턱을 치켜세우는 걸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어! 당연하지! 디아스 이름에 먹칠할 순 없지!”

“아자아자!”

“화이팅!”

드디어 이서호의 출격이다. 사실, 이서호가 맡은 역할은 기합을 넣기도 민망할 만큼 작은 단역이긴 했다. 피해자 아들의 친구2. 하굣길에 살인을 저지른 후,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가던 살인마 승리한을 목격하는 친구 옆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다.

“레디, 액션!”

감독의 큐 사인에 아들, 친구1, 이서호. 세 사람이 골목길을 걸어갔다. 동시에 맞은 편에서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승리한이 후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유유히 걸어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피해자 아들의 곁을 스치는 순간, 승리한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해자 아들이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이서호가 회심의 대사를 꺼냈다.

“왜?”

“어? 아냐. 아무것도.”

“컷! 오케이!”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곧장 방금 촬영된 영상을 모니터링한 승리한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오래 대기한 것치고는 짧은 촬영이었다.

이서호가 밝은 얼굴로 내 쪽으로 총총 뛰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승리한이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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