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22화 (122/320)

122.

까메오 출연이라 딱 하루만 촬영하면 되는 건데, 하필이면 그 하루가 겹쳐버렸다. 데뷔를 앞둔 세화 형이 바쁜 스케줄 쪼개서 내준 시간이었다. 날짜를 미룰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발을 뺐다.

유찬 형과 정이한 모두 아쉬워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서브 미션이 떠 버렸거든.

<서브 미션>

─ 드라마 촬영장 견학하기

O 보상: 데우스의 선물상자 x 1

그것도 개꿀 미션이!

이런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해야 한다. 어차피 작곡팟은 나 없이도 잘 굴러갈 테니 나는 미션을 하러 가는 쪽을 택했다.

“세화 형도 하온이 보고 싶어 하던데.”

“다음에 같이 가면 되죠. 오늘은 형이 제 몫까지 많이 배우고 와요. 세화 형 곡 진짜 잘 만든다니까요?”

“알지. 열심히 할게. 하온이가 팍팍 밀어주니까 의욕이 막 샘솟는다?”

유찬 형이 두 팔을 안으로 구부리며 힘을 꽉 줬다. 크게 도드라지지도 않은 알통을 자랑하는 듯한 포즈에, 나는 놀리는 듯한 얼굴로 팔뚝을 꾹꾹 눌러봤다.

“근육 없는데요?”

“아, 있어! 기다려 봐. 흡!”

주먹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을 준 형의 팔뚝을 다시금 꾹꾹 눌러봤지만, 부드럽기만 했다.

“없어요.”

“……하나도?”

“하나도.”

“아, 운동 좀 해야겠네…….”

유찬 형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게 귀여워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이한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마구 털어대며 욕실에서 나왔다.

“정곤 형 아직 안 왔지?”

“어어. 5분 뒤에 올걸?”

“으아!”

정이한은 큰 보폭으로 거의 뛰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오 분이 지났고, 시간 약속이 칼 같은 매니저 형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호 아직도 자?”

“네. 조용해요.”

“어이구. 애들 데려다주고 바로 다시 숙소로 올 테니까 하온이는 푹 쉬고 있어. 내가 와서 서호 깨울게.”

“에이, 그 전에 일어나겠죠.”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었다. 허겁지겁 준비를 마친 정이한과 유찬 형을 배웅해주고 나니 숙소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서호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집에 간 강현 형은 오늘 밤에야 돌아온다.

적막 속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 방에서 패드를 들고나왔다.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는 자세로 소파에 앉아, 다리 사이에 패드를 올려둔 채 너튜브를 유영하던 중이었다.

[디아스 막내 미모에 넋 놓은 서호갱얼쥐ㅋㅋ]

디어리가 올린 팬메이드 영상인 것 같은데, 우리 자컨 영상들을 잘라서 편집한 것 같았다. 썸네일은 스칼렛의 루비 선배님으로 여장한 내가 중앙에 박혀 있고, 그 너머로 이서호가 멍한 얼굴로 날 보는 장면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저거 찍은 직후에 이서호가 엄청 부끄러워했었지? 이유를 궁금해하던 내게 유찬 형이 나중에 자컨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었는데, 깜박 잊고 있었다.

우리 채널로 이동해서 확인해 보니 마지막 화까지 전부 업로드되어 있었다. 그중 영상 미션을 찍는 내용이 담긴 에피소드를 찾아서 틀었다.

하루종일 스칼렛 선배님들의 ‘mine’ 연습만 하는 우리의 모습이 빠른 배속으로 재생되고, 화면 아래에서는 [연습에 진심인 디아스]라는 자막이 통통 튀었다. 점점 해가 기울고, 급기야는 한밤중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체육관에서 연습만 하던 우리를 두고 긴급회의에 들어간 제작분들의 모습이 이어서 등장했다.

열심히 하는 우리를 서포트하기 위해 촬영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해주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진 다음 날, 오전부터 옹기종기 모여서 또다시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진짜 뭐에 홀린 듯이 연습하는 우리 모습이 빠른 배속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사실 우리가 좀 독하게 연습하긴 했지. 저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흥미롭게 보던 중이었다.

본 촬영에 앞서 본격적인 여장을 시작하는 장면이 나왔다. 메이크업하기 전에 옷부터 먼저 갈아입고 나온 우리는, 얼굴은 그대로인데 옷만 바뀐 위화감에 서로를 보면서 낄낄대고 있었다.

“푸핫! 저 때 강현 형 진짜 웃겼는데.”

불끈불끈한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달라붙는 소재의 스판 원피스를 입은 강현 형의 모습이 화면 가득 나오고, 뒤이어 그 모습에 경악하며 고개를 젓는 멤버들이 나왔다. 결국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근육 때문에 강현 형만 바지와 허리를 조이는 블라우스로 갈아입었다.

영상으로 보니까 추억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별거 아닌데도 웃음이 픽픽 터졌다. 이윽고 화면 속의 내가 메이크업 받을 차례가 되었다. 눈을 감고 메이크업을 받는 사이 근처에 있던 이서호가 자꾸만 내 쪽을 훔쳐보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화면에 나타났다.

멍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넋을 놓고 있던 이서호는 유찬 형이 옆구리를 툭 쳤을 때야 화들짝 놀라서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촬영할 때는 몰랐는데, 화면으로 보니 이서호가 메이크업을 끝낸 나를 눈에 띄게 피해 다니고 있었다. 어쩌다가 가까워지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서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데도 시선은 나한테 콕 박혀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멍하니 보다가 혼자 정신 차리려는 듯 뺨을 쳐대는 것도 잠시, 그 뒤에 또 나를 보고 넋 놓는다. 누가 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인 줄 알겠다. 저랬으니 부끄러워서 도망을 다녔지.

이서호를 놀려 줄 아이템이 생긴 것 같아서 히죽, 웃고 있었는데…….

“으악! 진하온! 너 뭐 보는 거야!”

“악!”

갑자기 등 뒤에서 쑥 뻗어 나온 손 때문에 놀라서 소리 질러 버렸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으면 이서호가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오는 소리도 못 들었지? 와, 진짜 깜짝 놀랐다.

“이, 이, 이런 거 왜 봐!”

이서호가 티 나게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리며 내게서 뺏어간 패드를 꺼버렸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눈웃음 치면서 슬그머니 이서호의 손등에 내 손가락을 깍지낄 것처럼 겹쳐 올렸다.

“형아~ 내가 그렇게 예뻤어?”

“미, 미, 미친, 미친, 미쳤냐?”

이서호가 나한테 잡힌 손을 잡아 빼 탈탈 털면서 기겁했다.

“으하하하!”

날 놀린 벌이다. 아주 속이 다 시원했다. 자컨 영상에서처럼 나를 피해 슬금슬금 도망쳐다니는 이서호의 주위를 얼쩡거리며 “형아~ 나 예뻐?”하고 물었다. 급기야 이서호는 진저리치면서 방으로 뛰쳐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아예 잠가 버린 건지 안 열리길래 문틈에 대고 “형아~ 나 피하지 마아~”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내가 한 짓이지만 소름이 돋아서 팔뚝을 문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서호가 항복을 선언했다.

“잘못했어! 내가 졌어!”

“응? 뭘 잘못했는데?”

“그, 그냥. 다? 그러니까 그거 하지 마라. 엉? 진짜. 진심.”

“왜~ 다른 형들은 다 귀엽다던데?”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 밑에 가져다 댄 나는, 뻔뻔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 귀, 귀엽기는 한데,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으아악! 내가 뭐라는 거야!”

횡설수설하던 이서호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주저앉았다. 아, 재밌었다. 다음에 또 놀려야지.

“이제 그만 놀릴게. 밥 먹자.”

“……진짜지?”

“응. 김치찌개 끓여줄까?”

“어!”

단순한 이서호가 해맑게 웃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도와주겠다면서 김치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내왔다.

“어떻게 깨우지도 않았는데 잘 일어났네?”

“……어, 그냥. 점심시간이잖아. 형들도 없고, 너랑 나뿐이니까.”

“알람 맞춘 거야?”

“아니? 어쩌다 그냥 일어난 거야.”

고개를 휙, 돌린 이서호는 비닐장갑을 낀 내 손이 김치 한 포기를 꺼내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김치통을 들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설마, 내 생각해서 같이 밥 먹어주려고 일부러 지금 일어난 건가?

그러고 보니 혼자 점심 먹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던 내가 선뜻 나서서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이서호가 일찍 일어나 준 덕에 외롭지 않은 점심이 될 것 같았다.

“서호 형.”

“어?”

“고마워.”

“무, 뭐, 뭐가? 난 그냥 일어난 건데? 너 때문에 일어난 거 아닌데? 진하온이 혼자 밥 먹든 말든 상관없는데?”

“뭐래, 난 김치통 갖다 줘서 고맙다고 한 건데? 설마…….”

잡았다, 요놈! 장난스레 눈을 접은 채 눈썹을 들어 올렸다.

“힉?!”

“뭐야~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난 거 맞구나?”

“아악!”

이서호의 새된 비명과, 녀석을 신나게 놀려대는 내 웃음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

드라마 촬영장에 도착한 우리는 매니저 형만 쭐레쭐레 따라다녔다. 감독님과 작가님, 그 외 스태프분들과 출연진분들께 인사하러 다니는 것만 해도 체력 소모가 은근 심했다. 이서호와 함께 열심히 허리를 접어가며 인사하고, 대기실 대신 촬영장 구석에 비치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촬영장 분위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지던 매니저 형이 휴대폰을 두고 왔다며 얌전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뒤, 잠깐 주차장으로 갔을 때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독보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남자가 촬영장에 나타났다.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헐! 우와, 헐…….”

이서호가 그러잖아도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 채 남자를 봤다. 주연 배우인 승리한이었다. 정이한이랑 이름이 비슷한 데다가 워낙 특이해서 이름 외우는 데 쥐약인 나도 금방 외울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이름에 전부 특이점이 있다면 나도 살기 편할 텐데…….

“와, 승리한 선배님 실물이 더 대박이다…….”

이서호가 연신 감탄하면서 승리한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어디로 보나 우리 강현 형이 더 잘생긴 것 같았다. 감독님이 친밀하게 웃으면서 승리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더니 둘이서 같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길래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다시피 벌떡 일어났다.

“자자, 인사해. 이쪽은 우리 주연 배우. 승리한이. 그리고 이쪽은 오늘 까메오 출연하는 아이돌. …누가 나온댔지?”

아까 인사했는데 그사이 잊어버리신 모양이었다. 팔을 툭툭 쳐서 신호를 보내자 멍하니 승리한을 올려보던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접니닷! 안녕하세요! 디아스의 이서호입니다! 저 선배님 진짜 진짜 팬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테오스의 도라이 씨 후배분들이라고 들었는데.”

“넵! 맞아요!”

이서호의 대답을 들은 승리한은, 말끔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정중한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말을 뱉었다.

“열심히 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방해만 하지 말아 주세요.”

“……네?”

“한 번 할 때 똑바로, 잘하시라고요. 여러 번 재촬영 하는 거 싫어하거든요, 저.”

“아,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해맑은 이서호는 기합을 바짝 넣어서 대답할 뿐이었지만, 나는 표정 관리하느라 애써야 했다. 배우와 가수로 각자 활동 영역이야 달랐지만, 데뷔 날짜만 놓고 보면 승리한 쪽이 까마득한 대선배님이었다. 아역 때 데뷔해 지금껏 단 한 번도 하락세인 적 없던 승리한은 이름값 제대로 하는 배우였으니까.

…아니, 그럼 뭐 해. 재수 없는데. 초면에 우리 애 기죽이려고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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