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18화 (118/320)

118.

교주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신호음이 흐르는 동안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찬 형한테 언질 줘달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이 사람 의외로 조심성 없나? 사생이면 어쩌려고 덥석덥석 전화를 받네?

나야 형을 통해 전화번호 전달하는 중간 과정을 생략해도 되니까 편하고 좋지만.

- 네, 선배님. 준재혁입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 서호한테 번호 받아뒀어요. 연락하실 것 같아서요.

덥석 받은 게 아니라 나인 줄 알고 받은 거였군.

- 퇴원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다행이에요. 정말 걱정했는데…….

교주가 마음에도 없을 소리를 떠들어대는 동안 나는 상태 창의 체력 칸을 확대해 눈에 잘 보이게 배치해놨다. 혹시라도 체력이 많이 떨어진다 싶으면 가차 없이 끊어버려야지.

“병문안 오셨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 늦게나마 인사드리려고 연락했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엿듣고 있는 멤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가식적인 인사를 하면서 방문을 살폈다. 특히 이서호가 귀를 딱 붙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슬쩍 문손잡이를 내려 문을 열어보자…….

“에헤, 헤…….”

이럴 줄 알았지. 이서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허공을 향해 아주 어색한 휘파람을 불어댔다.

“어우, 집이 좀 더운 거 같네. 어? 하온아. 전화 끝났어?”

참 자연스럽기도 하다. 얘 진짜 연기 재능 있는 거 맞아? 역시 지난번에 확인했어야 했어. 그동안 스케줄이 워낙 하드했던 탓에 좀처럼 50이나 되는 큰 체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이 되었다.

이번에 일주일이나 되는 휴가를 받았으니, 형들 집에 가기 전에 갱신해놓자고 마음먹으면서 이서호를 향해 손짓했다. 모른 척 시치미를 떼던 이서호가 결국 터덜터덜 다가와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이따 또 확인한다?”

“우우……. 그거 좀 들으면 어때서!”

“안 돼. 부끄러워.”

“별게 다 부끄럽네!”

뻔뻔하게 나오는 이서호를 향해 생글생글 웃어주자, 입술을 삐죽거리던 이서호가 결국 제 방을 향했다. 방문을 닫기 직전, 머리만 쏙 내밀어 나를 향해 혀를 내밀고 메롱 하고는 후다닥 들어가 버렸다.

이거……. 예전에 내가 했던 짓이잖아! 역시 애들 앞에서는 뭐든 조심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돌려받을 줄이야.

나는 다시 방문을 닫고……. 흠. 혹시 통화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잠그자. 정이한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만 밖에 있어 달라고 해야지.

문이 잘 잠긴 걸 확인한 뒤, 가능한 방문에서 가장 먼 구석으로 가서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아, 죄송해요. 잠깐 멤버들이랑 얘기하느라.”

- 멤버들 다 집에 있어요? 천천히 전화 주셔도 되는데.

“불편한 거 오래 끄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 제가 불편하세요?

“편하겠어요?”

당연한 걸 물어보네. 휴대폰 너머에서 교주가 너무하다며 칭얼거리는 게 들렸다. 미친 사람 아닌가. 나는 휴대폰을 조금 멀찍이 떨어트려서 내 소중한 체력을 보호했다. 역시 전화로 하길 잘한 거 같아. 직접 만났어 봐.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다.

- 듣고 있어요?

한참 반응이 없자 교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휴대폰 너머로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그제야 다시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뇨. 이상한 소리 하시길래 좀 떼어놨어요.”

- 아아,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에요? 서운하다~

“이한 형 오기 전에 통화 끝내야 해요.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체면치레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본론만 얘기해도 될까요?”

- 우리 사이. 음. 우리 사이 되게 특별하지 않아요?

이거 농담인가? 진담은 아닐 텐데.

- 뭐야아……. 그렇다고 해줘요. 생각해봐요. 나는 하온 선배님을 만난 덕분에 회귀자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요. 이 정도면 특별하지 않나?

“……그런 종류의 특별함이라면, 전 딱히 달갑지 않은데요. 그보다 왜 저한테 그쪽 정체를 밝힌 거죠? 말 안 했으면 몰랐을 텐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편안하게 대화하자고 주절대는 걸 전부 무시했더니 그제야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 형평성 때문이죠. 저는 선배님의 비밀을 아는데, 선배님은 모르시면 좀 억울하지 않겠어요?

정확하게는 원하는 대답이라기보단, 예상한 그대로의 헛소리였지만.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사람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거야.

“원하는 게 뭐예요?”

- 도와주실 거예요?

“앞으로 우리 형들한테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요.”

-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유찬이랑 서호가 절 많이 의지하거든요. 이제 와서 또 갑자기 연락 끊으면 좀…….

모르는 척 의뭉 떨기는. 나는 코웃음 치면서 교주가 한 실수를 정확하게 짚어줬다.

“‘나를 믿어.’ 당신 그렇게 말했잖아. 내 손 잡았을 때.”

저릿했던 감각과 함께 머릿속에 박히듯 내리꽂히던 말. 분명히 또렷하게 들렸던 말은 귀로 들은 게 아니었다. 일종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의식의 경계 아래로 침투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건강검진 받으면서 대기 시간에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가까스로 수면 위로 떠올린 말. 틀림없었다. 그게 교주의 능력이었다.

거의 종교처럼 교주에게 의지하던 유찬 형, 고작 연습생 신분으로 교주의 이탈을 막아 달라며 실장님한테 대들기까지 했던 이서호, 그리고 스스로를 밑바닥까지 몰아붙인 채 동굴 안에 갇혀있던 정이한…….

내가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교주에게도 어떤 스킬이 있으리라 확신했던 순간이었다. 그것도 타인의 마음을 조정할 수 있는 종류의 스킬이.

- 아~ 어떻게 눈치챘지?

“나도 당신이랑 비슷하니까. 그러니까… 내 멤버한테 허튼짓하면 금방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야.”

당연히 내게 그런 능력은 없다. 하지만 교주는 내 스킬이 뭔지 정확하게 모를 테니까 이런 허풍이 먹힐지도 모르잖아.

- 그래요? 그럼 너는 건드려도 된다는 뜻?

“할 수 있으면 해봐.”

곧장 교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지하게 하는 얘기에 저렇게 실성한 듯이 웃어대는 걸 보니 정신이 조금 돌아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좋은 정신 병원을 소개해 줘야 할 것 같은데…….

- 아, 진짜 재미있네. 하온아.

“…….”

내가 먼저 존댓말을 집어치우긴 했는데, ‘하온아.’하고 불러올 줄은 예상 못 해서 순간 당황했다.

- 우리 서로 도와가면서 살자. 너나, 나나 이 관문을 통과해야 다음이 있는 거잖아.

무슨 소리지? 관문?

“어.”

뭔 소린지 아직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냥 아는척했다. 교주가 뭘 착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말을 맞춰보자. 내 정보는 최대한 숨겨가며 교주의 정보를 빼낼수록 내게 유리할 테니까.

- 그래서 넌 몇 번째야? 두 번? 세 번? 몇 번이나 남았으려나.

“그쪽 먼저 말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교묘하게 회피할 줄 알았는데, 질문을 받은 교주는 의외로 선뜻 제 비밀을 밝혔다.

- 마지막. 나는 마지막이야. 다음은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꽤 절박하게 살아왔거든, 지금까지.

라스트원. 교주의 그룹명. 그게 그런 의미였나? 교주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룹명 정도야 본인 입맛대로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형들한테 이상한 짓만 안 한다면, 어떻게 살든 방해 안 해. 당신한테 신경 끄고 살 거야.”

- 그렇게 자꾸 네 약점 알려주지 마. 내가 진짜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교주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언젠 착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 나 정도면 선량하지.

“……어디가?”

- 반대로 내 어디가 나쁜데?

“남의 마음을 그쪽한테 유리한 대로 조종하고 있잖아, 당신.”

교주는 하핫, 하고 짤막한 웃음소리를 흘린 뒤 조곤조곤 말했다.

- 힘이 있으면 써야지. 안 그래?

“남의 마음을 망가트리면서 죄책감 가진 적도 없지?”

교주는 ‘망가트렸다.’라는 말을 몇 번 곱씹어 보더니 이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 내가 누굴 망가트렸는데?

“우리 멤버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던데?”

- 아, 그건 미안해. 다들 날 많이 따라서 네가 좀 힘들었지? 근데 하온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짜 놓은 판에 겁도 없이 기어들어 온 대가지. 따지자면 피해자는 오히려 나야.

이건 또 신박한 개소리네. 어디까지 가나 좀 들어보자는 생각에 입 다물었더니 교주가 나불나불 떠들었다.

- 나는 오랜 시간 디아스 멤버들에게 공들여 왔어. 그런데 내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 네가 나타나서는 다 망쳐놓은 거야, 전부 다…. 원망할 사람은 나지. 너 때문에 내 몇 년이 날아갔는데.

이야……. 정말 말 하나는 기깔나게 잘했다. 순진한 사람이었다면 어, 내가 그랬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

“네가 처신 잘못해서 쫓겨난 걸 내 탓으로 돌리면 곤란하지.”

근데, 난 순진한 사람이 아니거든.

- 뭐, 사정이 있었어.

알게 뭐람. 관심 없었다. 다만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있었다. 유찬 형과 이서호는 능력껏 휘둘러서 자신을 따르게 했다고 치자, 그럼 정이한이랑 강현 형은?

“그건 나랑 상관없잖아. 네 사정이니까. 역시 난 너랑 사이좋게 지낼 순 없을 것 같은데. 그쪽이 이한 형한테 한 짓만 생각하면 화가 나거든.”

- 정이한? 아…… 그게 기분 나빴구나? 그건 화낼 필요 없어. 단순히 신뢰도를 쌓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야. 네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결국엔 지금의 이한이처럼 만들 생각이었거든.

감정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도구를 대하는 것 같은, 태연자약한 교주의 태도에서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이한이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당신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데.

모든 사람이 교주를 용서해도,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나 내 팔 안의 사람이 소중한 건 당연한 거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교주는 훌륭하게 낚싯바늘을 집어삼켜 내게 큰 힌트를 투척했다. 교주가 제 능력을 발휘해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쥐고 흔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필요하다는 거. 신뢰를 얻지 못하면 성공률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나한테 들켰잖아.

나뿐만 아니라 강현 형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났을 때 형은 한창 타인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을 테고, 그 때문에 당시 교주도 강현 형에게만은 좀처럼 신뢰를 얻지 못해 입맛대로 주무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신뢰를 잃는 순간 스킬 효과가 무효화 될지도 몰라.

가교 역할 하는 척 강현 형을 멤버들이랑 갈라놓은 이유가 세 사람의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지금까지의 추론만으로도 그럴싸한 퍼즐이 완성된 것 같았다. 나는 슬슬 발을 뺄 준비를 했다.

“…당신이랑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내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방해하지 말라는 거.”

- 에이, 내 말 제대로 안 들었구나? 서로 도울 수 있으면 돕자고 했잖아.

“나는 당신한테 도움받을 것 없어, 돕고 싶지도 않고.”

-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나도 상처받아~

유들거리면서 하는 말이 어이없었다. 라이브 방송 중에 인생 2회차냐고 떠볼 만큼 비브라늄 급 강심장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약한 척하는 꼴이 별로라서 “우웩.”하고 구토하는 소리를 들려줬다. 그러자 교주가 신나게 웃어젖혔다.

- 하온이 너 진짜 재밌다. 누구랑 이 정도로 즐겁게 대화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그동안 몰랐는데 나한테 이런 편안한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하… 나는 불편하거든. 빨리 끝내자니까?”

- 그럼 질문에 대답을 해줘야지. 진하온, 넌 앞으로 몇 번 남았어?

“죽고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기회야. 남은 기회는 없어.”

거짓말로만 둘러댔다간 나중에 헷갈려서 들통날지도 모르니 적절히 진실을 섞었다. 그러자 교주가 흥미를 보였다.

- 기회가 한 번뿐이야? 너도 참 각박한 신한테 걸렸네. 회귀 목표는 뭔데?

신, 회귀. 이번에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궁금했던 정보를 다 얻었다.

교주에게 힘을 준 건 신이고, 그는 나처럼 환생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회귀자였다. 몇 번의 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고. 환생자가 아니기에 나랑 같은 차원에서 문제없이 회귀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모르겠어.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전 생을 다 바쳤음에도 실패한 거라면, 회귀 목표가 직관적이지 않거나,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종류일 것 같아서 일단 모른다고 잡아뗐다.

교주도 내게 ‘각박한 신’한테 걸렸다고 했으니까 신이 여러 명인 것쯤은 안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회귀자마다 회귀 조건이 다 다르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 흐음. 그래? 일단 알겠어. 다음에는 서로에게 좀 더 유익한 대화가 오고 갔으면 좋겠다.

“난 이제 할 말 없는데.”

- 에이, 같은 회귀자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도 네 도움 좀 받고.

“싫어. 또 나한테 스킬 쓸 거잖아.”

- 이제 안 써. 통하지도 않는 거 써서 뭐 해. 디아스 멤버들도 안 건드릴게. 너희 그룹이 크는 게 나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거든.

“……무슨 도움?”

교주는 그 말엔 답을 주지 않고, 다음에 같이 밥이나 먹자는 인사치레를 끝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우리가 크는 게 교주한테 도움이 된다고? 회귀 조건이 대체 뭐길래?

교주가 너무 순순히 물러난 데다가, 우리 그룹의 성장이 제게 도움 된다는 발언 때문에 찜찜함만 커지던 와중 정이한이 샤워를 끝낸 듯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발열하는 휴대폰을 대충 침대 위에 던져두고 얼른 가서 문을 열어줬다. 머리에 수건을 얹은 정이한이 날 보고 방긋 웃었다.

교주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했을 정이한이 애틋해서 충동적으로 꼬옥 안아 줬더니, 잔뜩 당황해 몸을 움츠리곤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이한도 슬그머니 내 등에 팔을 둘러서 나를 마주 안아왔다.

“갑자기 왜 그래?”

“싫어요?”

“아니… 나는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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