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15화 (115/320)

115.

교주는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지 않는 방향에서 속삭이고는 숙였던 허리를 세우며 매끄럽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교주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인생 2회차?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동시에 디어리의 함성도, 수상소감을 전하는 이서호의 울음 섞인 목소리도 음소거가 된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귓가에 파고드는 소리라곤 교주의 숨소리와 낮고 야트막한 웃음소리뿐이었다. 마치, 내가 들어야 하는 소리를 누군가가 선별한 것처럼.

모든 게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던 찰나, 교주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등지는 방향으로 얼굴을 감춘 채였다.

“고마워. 반신반의했었는데.”

언뜻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교주는 일이 잘 풀려 기쁘다는 듯 산뜻한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같은 말을 남기고 유유히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반신반의했다고? 날 떠봤다는 뜻이야? 인생 2회차는 어떻냐고, 그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물어와 놓고?

“하온아! 그렇게 좋아? 아예 넋을 놓고 있네.”

유찬 형이 멍하니 서 있던 내 주의를 환기하면서 웃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이서호를 가리키면서 “서호는 또 엄청 울어.” 하면서 방긋거리는 형은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일단은……. 잊자. 교주 때문에 멘탈 흔들려서 생방송 중에 이상한 태도를 보일 순 없었다. 나는 연기 스탯을 A-까지 올려놓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게요. 너무 좋아서 현실성이 없어요.”

***

앵콜 무대를 하면서 그렇게 뛰어다닌 것 같지도 않은데,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숨이 거칠어졌다.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리면서 헐떡거리는 내 소리가 인이어를 타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나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디어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앵콜 무대가 끝나고, 이제 무대에서 내려갈 시간이었다.

무대에서 등 돌리자마자 무리해서 웃고 있던 입술을 끌어 내렸다. 동시에 아까 교주에게서 들은 말이 온통 머릿속을 잠식했다.

무대에서 내려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잠깐 기다려주던 형들이 앞장서 걸었다. 여느 때처럼 무대의 여운에 잠겨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 됐어.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교주에게 발각되었다는 거였다. 내가 두 번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하필이면 교주에게.

……교주는 어떻게 안 거지?

분명 무언가 있다. 평범한 사람은 ‘누군가가 인생 2회차를 살고 있다.’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농담 식으로 던지는 말이라면 몰라도, 아까 교주의 태도는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 애초에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니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어서,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만 그나마 그럴듯해 보이는 가설을 세워봤다. 이를테면…….

교주는 나와 마찬가지로 인생 2회차를 살고 있다. 죽은 후에 다른 차원에서 새 삶을 시작한 나와 달리, 어쩌면 교주는 같은 차원에서 2회차를 시작한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첫 번째 생에서 듣도 보도 못한 ‘진하온’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등장해 수상쩍어하던 중 단둘이 될 기회를 틈타 나를 떠봤다? 그리고, 당황한 내가 너무 솔직하게 반응해서 확신했다?

하지만 데우스가 환생자는 한 차원에 한 명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앞서 세운 가설대로라면 데우스가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교주가 나와 다른 종류의 신들의 게임에 참가 중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신은 많다고 했으나, 게임이 하나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이 세계 어디에선가 데우스가 배팅 중인 게임판이 아닌, 또 다른 신들의 게임판이 굴러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교주 또한 신들의 게임에 참가 중이다.’라는 가설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전제 조건인 ‘회귀시킬 수 있는 존재는 신뿐이다.’가 틀렸다면…….

데우스는 악마는 없다고 했지만, 우리 인간들이 상상하는 ‘악마’라는 존재가 없을 뿐이지 그와 유사한 힘을 구사하는 존재는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교주는 신들의 게임에 장기말 자격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들에게 선택받은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럼 나를 떠본 이유는 뭐지?

교주가 나를 떠보는 바람에 나 또한 교주에게 ‘무언가’ 있으리란 걸 눈치채게 된 거였다. 굳이 비밀을 드러내면서까지 내가 인생 2회차를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각자 자기 인생 살면 그만인 거 아닌가?

어디 가서 ‘디아스의 진하온이 인생 2회차입니다!’하고 소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봤자 내가 받을 타격은 제로고, 교주만 이상한 사람 될 테니까.

교주의 의뭉스러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딱 한 번만 낚여볼까? 아까 유찬 형과 이서호가 교주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걸 떠올렸다. 단둘이 만나는 건 꺼려지지만 전화는 괜찮겠지.

무엇보다 이대로 무시하기에는 영 찝찝해서 앞으로의 아이돌 활동에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앵콜 무대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지 않았나.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낼 순 없어.

나는 앞서가는 유찬 형을 따라잡으려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그거 조금 빨리 걸었다고 갑자기 숨이 차면서 다리가 무거워졌다. 온몸의 기운이 싹 빠져나간 것 같았다.

아, 이상하게 자꾸 숨이 차네. 결국 얼마 못 가 자리에 멈춘 나는,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가쁜 호흡을 골랐다.

앵콜 끝나갈 무렵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도대체…… 아, 망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다급히 내 체력을 확인했다. 남은 체력이 0이라는 걸 확인하고 경악한 순간이었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교주 때문에 다른 생각에 골몰하느라 체력 관리해야 한다는 걸 까무룩 잊고 있었다. 평소라면 큰 문제 없었을 텐데, 하필 오늘…….

눈앞에서 빠르게 상태 이상 돌림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 대기실에 도착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상태 이상이 터지면 곤란했지만 이제 와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불찰이야.

<시스템: 상태 이상 ‘빈혈’에 걸렸습니다.>

상태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면서 무릎이 푹 꺾였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어 벽을 붙잡은 채 사정없이 덮쳐오는 어지럼증과 싸워야 했다. 바닥이 위로 튀어 오르고, 눈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일었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벽에 의지해 가까스로 버티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지나가던 스태프분이 놀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앞서가던 형들이 헐레벌떡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하온아!”

“으, 죄송, 해요. 어지러워서…….”

아, 미치겠네. 하필 걸려도 요란한 것 중 하나가 걸렸어.

“어지러워? 못 걷겠어?”

유찬 형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올랐다.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는 건가, 생각했는데 강현 형이 나를 번쩍 안아 든 거였다.

“머리 내 가슴에 기대.”

강현 형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받쳐준 팔을 더 높이 들어줬지만,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서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으…….”

“혼자 못 하겠어?”

“내가 도와줄게.”

정이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 또 걱정 끼쳤네.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고개가 강현 형의 어깨에 차분히 올려졌다. 정이한이 내 머리를 받쳐준 덕분이었다.

“저, 정곤 형한테 전화할게!”

이서호가 다급히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무대에서 막 내려온 우리에게 휴대폰이 있을 리 없었다.

“헉, 맞다! 두고 나왔지……. 그, 그럼 나 먼저 대기실로 갈게!”

이서호가 나를 들여다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우다다 뛰어갔다. 강현 형도 서두르는 모양인지 보폭이 커져서 어지럼증이 극심해졌다.

아, 하늘이 돈다. 세상이 돌아. 무중력 상태에서 정처 없이 부유하는 듯한 불쾌감 때문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강현 형의 옷을 꽉 움켜잡은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염려 섞인 형들의 탄식과 함께 부드럽게 등을 쓸어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구의 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꽤 기분 좋아서 강현 형 어깨에 머리를 푹 파묻은 채 어지럼증과 맞서 싸웠다.

지나가던 스태프분이 걱정스럽게 괜찮냐고 묻는 말이 들렸다.

“괜찮아요. 조금 어지럽대요.”

유찬 형이 웃으면서 스태프분들에게 설명했는데, 자칫하면 방송국 밖으로 이야기가 새나갈까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멀쩡하게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그게 가능하면 상태 이상이 아니지.

***

대기실에 도착한 직후,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매니저 형이 당장 병원으로 끌고 가려는 걸 겨우겨우 뜯어말렸다. 나는 지금 소파에 누워서 형들의 걱정과 극진한 간호 속에 상태 이상을 견디는 중이었다. 이거 되게 부담된다…….

“아직도 어지러워?”

나는 팔을 눈에 얹은 채 눈을 감아도 뱅글뱅글 도는 세상 속에서 힘겹게 대답했다. 누워있는데 왜 자꾸 선 채로 고꾸라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지.

“조, 금이요…….”

“조금은 무슨!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이서호가 짜증을 팍 내면서 툴툴거렸다.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짜증이야?

“서호야, 속상한 건 알겠는데 하온이한테 화내지 마.”

정이한이 부드럽게 타이르자 이서호도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윽. 자꾸 아프니까 그렇지! 비실이가 진짜, 걱정되게……. 씨이.”

“앞으로 하온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잠 푹 자기.”

유찬 형이 앞으로 매일 푹 자는지 감시할 거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정이한도 본인이 룸메니까 책임지고 재우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전부 날 걱정해서 하는 소리고, 체력 관리 못 한 건 내 불찰이었기에 쓰게 받았다. 나도 앞으로 꼬박꼬박 시간 맞춰 잘 거야…….

그렇게 30분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대기실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교주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왜 또…….

“하온 선배님, 아까 복도에서 쓰러지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교주가 좋은 사람인 척하는 껍데기로 저를 포장한 채 내게 다가왔다. 이제 곧 상태 이상이 끝날 텐데, 그럼 체력 0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무조건 안정을 취하며 체력을 끌어 올려야 할 타이밍에 교주와 대면은 이로울 게 없었다. 교주랑 만나기만 하면 체력 뚝뚝 떨어지는데, 이러다가 자칫하면…… 상태 이상 2연타야.

상태 이상 끝나기 전에 빨리 쫓아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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