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세, 세이프…….”
강현 형이 손으로 황급히 휴대폰 카메라를 가리며 읊조렸다. 동시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왜 이런 반응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잠깐 생각한 뒤에야 원인을 알아차렸다.
아, 내 옷 때문이었구나.
아까 정이한에게 상체 숙이지 말라고 주의받았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렇게 큰 옷을 처음 입어 봐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떻게 찍을지 미리 정해놨었기 때문에, 그냥 구상한 대로 찍으려던 내 잘못이었다.
“……깜박했어요.”
“아! 별일 아니에요, 디어리들!”
“하온이가 방송 심의에 걸릴 짓을…….”
“서호야! 디어리 오해하시잖아.”
스크린을 보니까 채팅창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사고는 이서호가 아니라 내가 쳐 버렸네.
“에이, 형. 농담인데 뭘.”
이서호가 가벼운 어조로 말하면서 웃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강현 형에게서 휴대폰을 가져가서는 한 바퀴 빙 돌며 우리 모습을 비췄다.
“디어리 여러분! 잠깐 화면 조정 시간이 있었는데, 이해해 주세요! 보시다시피 아무 일 없었어요! 진하온이 엔! 쥐! 낸 거예요!”
그래, 지금은 가볍게 넘어가는 게 좋은 것 같다. 나는 얼른 휴대폰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우리 디어리들은 전부 이해한다며 하트를 마구마구 쏘아줬다.
으, 어떡해. 우리 디어리……. 너무 좋아!
이렇게 사랑스러울 필요는 없지 않나. 행복감이 마구마구 차올라서 미소 짓는 사이 이서호가 태연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럼! 남친 모닝콜 진하온 버전, 다시 찍을게요!”
그리고는 강현 형에게 휴대폰을 넘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원래 대기하던 자리로 돌아갔다. 강현 형은 다시 내가 원하던 대로 앵글을 잡아줬고, 나는 상체를 숙이는 동작을 대체할 자세를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강현 형에게 무릎을 세워 앉아 달라고 한 뒤 씩씩하게 외쳤다.
“디어리 여러분, 다시 찍을게요!”
보지 않아도 “네!”하고 대답해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앞부분은 똑같이, 잠에서 깬 내가 아직 자는 연인을 발견한 것처럼 연기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이번에는 조금 더 경쾌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형 앞에 섰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나는, 강현 형의 양쪽 무릎 위에 팔을 접어 올리고, 내 오른쪽 팔에 뺨을 기대어 비뚜름하게 카메라를 올려봤다.
“디어리, 아직도 자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깨워 주는 것처럼, 최대한 꿀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연기 스탯 안 올렸으면 절대 도전하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자신 있었다.
“일어나요. 응? 일어날 시간이야.”
조금은 칭얼거리듯 말한 뒤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속으로 초를 셌다. 그렇게 3초가 지나고서야 “끝입니다!”하고 벌떡 일어났다. 오글거렸나……. 괜찮아. 연기는 꽤 자연스러웠으니까.
마지막 타자로 나서서 그런가, 유찬 형이 마구마구 박수치면서 너무 완벽했다고 나를 치켜 올려줬다. 괜히 부끄러워서 뺨을 살짝 긁적이다가 메이크업한 상태라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내렸다.
강현 형은 조금 큰 소리로 마른기침을 하다가 나와 시선이 부딪히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거치대 쪽으로 가 버렸다. 강현 형이 휴대폰을 다시 설치하는 사이 소파로 모여들었는데, 정이한이 슬쩍 내 옆자리를 차지하면서 말했다.
“하온이 진짜 사랑스럽다. 나도 갖고 싶어…….”
정이한은 몽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게 꼭 진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침에 이렇게 깨워줘요?”
하고 물었다. 정이한이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리면서 조금 흥분한 듯한 어조로 반문했다.
“진짜 해줄 거야?”
“……정말 원해요?”
“응!”
“그, 그럼. 내일 깨워 줄게요.”
“좋아!”
함박웃음을 짓는 정이한이 너무 예뻤다. 아주 가끔 나오는, 어린 시절의 정이한이 겹쳐 보일 정도로 앳된 이 웃음을 나는 참 좋아했다. 우리 디어리들도 좋아해 주겠지? 지금 정이한의 모습을 카메라가 잘 잡아주길 바라면서 정면을 봤다.
─ 아.... 일어날게, 일어...아니, 더 잘... 게속 잘테니까 계속 깨워줄래...하온아...
─ 아 엄마 10분만 더 잘게 울 하냥이가 깨워 주러 올 거라고~~!
─ 이한이 미소 무슨이류ㅠㅠㅠ
─ 뭐야뭐야! 방금 뭐라고 속닥거렸길래 이한이가 저렇게 좋아해???
─ 하온아! 나도 나한테도 귓속말해줘억ㅠㅠㅠㅠㅠㅠㅠ
“디어리들, 저희 남친 버전 모닝콜 마음에 들어요?”
묻지 않아도 이미 디어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눈으로 열심히 채팅창을 훑던 유찬 형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즐거워하시니까 저희도 너무 좋은데요! 그렇지?”
“네!”
“그럼 이 기세를 몰아서 ‘디아스에게 궁금해!’ 시간입니다! 평소 저희에게 궁금하셨던 내용이 있다면 뭐든지 물어봐 주세요!”
멘트가 나가고 방송 딜레이 시간이 지나자마자 질문이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채팅창이 너무 훅훅 올라가서 한 문장 정도의 짧은 질문만 겨우 읽어낼 수 있었다.
“음, 룸메가 궁금하다고 질문 남겨주셨네요. 저희 룸메는……!”
유찬 형이 먼저 질문 하나를 골라서 운을 뗐다.
“숙소 옮기기 전에는 저랑 하온이, 그리고 나머지 셋이 한방을 썼어요. 그러다가 새 숙소로 이사 오면서 룸메 구성이 완전 달라졌는데……. 자세한 건 디아스 리얼리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을 나머지로 취급한 유찬 형의 발언에 채팅창이 디어리들의 ‘ㅋㅋㅋㅋㅋㅋㅋㅋ’로 도배되었다. 거세게 반발해오는 이서호에게 유찬 형은 자기 기준엔 하온이 빼면 다 나머지이지 않겠냐며 장난쳤다.
“어, 그리고 또. 누가 제일 크냐고요?”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제일 크지!”
물론 작은 건 절대 아니지만, 이건 무척 주관적인 의견이고,
“누가 봐도 이한이 아닌가?”
이게 정답이다. 정이한은 멤버들 사이에 서 있어도 정수리 끝이 삐죽 솟을 만큼 큰 키를 자랑했다. 밸런스가 워낙 좋아서 적당히 늘씬해 보일 뿐이지, 사실 신장만 놓고 보면 키 크다고 자부하는 아이돌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할걸?
“제일 큰 사람은 이한이, 제일 작은 사람은 하온이. 가운데는 고만고만한 것 같은데.”
……아. 나, 나도 그렇게 작은 키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작은 건 맞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재 보자!”
이서호가 소파를 뛰어넘을 듯이 껑충 일어섰다. 나는 잴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앉아 있었는데, 형들이 내게 손짓했다.
“이한이랑 하온이가 심판해주면 되겠네!”
그냥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심판까지 세워야 하나? 그냥 멀뚱멀뚱 앉아 있으면 이상해서 그런가? 군말 없이 벌써 손대중으로 재보면서 내가 크네, 네가 크네 하던 형들한테 갔다.
“유찬 형이랑 서호 형이 비슷해 보이니까 두 사람이 먼저 재봐요!”
“어어!”
두 사람이 등을 맞댔는데, 이서호가 아주 조금 커 보였다. 혹시 몰라 손바닥을 쫙 펼쳐서 기울기를 재봤는데, 역시나 이서호가 조금 더 컸다.
“서호 형이 조금 커요.”
“뭐? 그럴 리가! 다시 재봐! 정확하게!”
유찬 형이 기겁하면서 소리 질렀고, 콧대가 잔뜩 높아진 이서호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으하하!”하고 신나게 웃어젖혔다.
매니저 형이 어디에서 공수해 온 건지 카메라 밖에서 줄자를 흔들어 보이길래, 그걸 받아 재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이, 이럴 수가……. 몇 달 전에만 해도 내가 더 컸는데?”
“나는 자라나는 청소년이라고, 형.”
“너 스물이잖아…….”
“내 성장판이 열일했나 봐!”
사실은 이서호도 모르고 있었는지, 키 컸다면서 세상 해맑게 웃으면서 좋아하는 중이었다. 강현 형은 대보지 않아도 유찬 형보다 컸고, 이서호랑 비교해 봤는데 강현 형이 미세하게 컸다.
이 형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는지 더 크다는 소리에 후우, 하고 들릴 듯 말 듯 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키 순서대로 하면 이한이, 강현이, 서호, 저, 하온이네요.”
깔끔하게 정리해 보인 유찬 형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디어리는 의외로 소소한 걸 궁금해했는데, 그래서 오늘 기억에 남은 일이라거나, 최근 즐거웠던 일, 좋아하는 음식, 음악 같은 자잘한 취향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열심히 대답해주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어느덧 마지막으로 리얼리티 예고편을 함께 볼 차례가 되었다. 예고편은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 W라이브 채널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스크린 모서리에 검은색 네모가 뿅 하니 떠올랐다. 검은색을 꽉 채운 하얀색 숫자가 카운트다운 되었고, 마침내 1이 된 이후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둑어둑한 화면을 보며 방송사고는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을 무렵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어……! 이거, 그날 거실……!”
제일 먼저 알아차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자고 일어났더니 우리 숙소의 짐이 모두 빠지고 없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래, 이거 궁금했다고!
화면 가득 채우고 있던 창이 줄어들더니 왼쪽 아래에 고정되었다. 이내 세 개의 장면이 더 추가되었는데, 보안용 CCTV 여러 대를 비추는 모니터처럼 네 분할 된 화면 중 두 개는 어두컴컴했고, 나머지 두 개의 화면은 흐릿한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을 포착하고 있었다.
“왼쪽 위가 나랑 하온이 방인가?”
“네, 그런 거 같아요. 와, 저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살금살금…….”
그 타이밍에 소파를 빼내다가 현관문에 살짝 찍으면서 쿵, 소리가 나는 장면이 송출되었다. 동시에 거실에서 짐을 나르던 모든 사람이 일시 정지했다.
[헉! 애들 깨면 망한다……!]
자막 끝에는 짧은 직선이 여러 겹 그려져 있었다. 동시에 우리 방을 비추는 카메라가 적외선 모드로 바뀌었다. 다섯 명의 멤버들이 모두 곤히 자고 있음을 확인한 스태프분들이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빨리 감기라도 하듯 짐이 모두 빠져나간 뒤 밝아온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난 내가 부스스 눈을 비비면서 기지개를 켰다.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 아래 자막으로 [아침부터 열일하는 미모]라고 적혀 있어서 쿨럭, 마른기침을 해버렸다. 부, 부끄럽다…….
“우리 잘 때 저걸 다 뺐구나…….”
민망함에 일부러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자, 유찬 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말을 받았다.
“진짜, 어떻게 아무도 안 깼지? 저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
“그러니까요. 저도 그게 신기해요.”
다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속닥거리는 사이 화면 속의 나는 유찬 형을 확인한 뒤, 방문을 열자마자 굳어버렸다.
휑한 거실을 보면서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이 잡히고…….
[미션지 발견!]
미션지로 향하는 내 시선을 따라 화살표 효과가 지이익 그어졌다. 내가 저렇게 멀뚱멀뚱 미션지만 보고 있었단 말이야?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미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으하하! 하온이 저랬구나.”
유찬 형이 웃으면서 화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나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주체 못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정말이야? 내가 저랬어? 왜 저래 진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