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시스템: 상태 이상 ‘근육통’에 걸렸습니다.>
다행히 도박에 성공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와서 무척 흡족했다. 근육통 30분 정도는 껌이지. 굳이 자는 척할 필요도 없겠다 싶어 답답한 담요를 끌어 내렸다.
상태 이상이 언제 끝나는지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벌써 9시가 넘었네. 잠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잤나 봐.
지금은 근육통 때문인지 잠기운이 싹 달아나서 욱신욱신한 통증을 입 안으로 삼켜내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종료까지 10분 정도 남았을 때였다.
차량이 휴게소로 진입하면서 방지턱을 넘었다. 그리 센 충격이 아니었는데도 전신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통증에 억, 하고 앓는 소리가 나왔다. 평소라면 별 느낌 없었을 텐데, 상태 이상의 힘은 대단했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네…….
그때였다. 곤히 잠든 줄 알았던 정이한이 눈을 번쩍 뜨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하온아, 어디 아파?”
“아니요?”
“방금 ‘윽’ 소리 냈잖아.”
정이한이 아예 내 쪽으로 방향을 틀어 앉아 진중한 손길로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조금이라도 아파하는 낌새가 보이면 내 체온부터 확인하는 게 트라우마가 크게 남았구나 싶어 미안해졌다.
“그냥 근육통이 조금 있어서요.”
“근육통?”
“네. 아까 계곡에서 물 먹었을 때 몸이 좀 놀랐나 봐요.”
“아. 근육이완제 사다 줄까? 휴게소에 약국 있겠지? 지금 문 열었으려나.”
정이한이 창밖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그 사이 매니저 형은 주차를 끝낸 뒤 글러브 박스를 부스럭거렸다. 깊게 잠든 형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뭔가를 찾더니 운전석에서 내려 벤 문을 열었다.
“하온아, 자! 근육이완제. 물은 남았어?”
작게 말한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궁금해하면서 근육이완제를 받아들었다.
“오구, 우리 하온이. 궁금해요?”
“……형.”
매니저 형이 숨죽이고 웃었다.
“나도 신기한데, 주차 자리 찾는데 갑자기 ‘근육통’ 소리가 귀에 콱 박히더라고.”
“아하.”
오, 진짜 신기하다.
“나 화장실 가려고 세웠는데 너희도 가려면 같이 움직이자.”
“전 안 가도 돼요.”
상태 이상 끝나면 체력 0인데 어딜 움직여. 벤에서 꼼짝 않고 있다가 바로 정이한한테 기대서 체력 회복할 계획인데.
“화장실은 괜찮은데, 물이 없어요. 물만 사 올게요.”
정이한이 빈 물통을 흔들어 보이며 일어나려고 하자, 매니저 형이 손바닥을 정이한의 앞으로 쫙 펼쳐 들고 제지했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이 강아지한테 ‘기다려.’하고 명령하는 제스처 같았다. 그 덕에 정이한은 일어나려다 말고 어설프게 엉덩이를 뗀 채 매니저 형을 봤다.
“그럼 내가 사 올게.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애들 깨면 화장실 갈 건지 물어봐 주고.”
“네.”
매니저 형이 살금살금 벤에서 물러나며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많이 아파?”
“참을만해요.”
참을만하긴 무슨,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고작 근육통으로 앓는 소리를 낼 순 없었다.
“하온이 근육통이야?”
……강현 형까지 깨워버렸네. 유찬 형과 이서호는 여전히 꿈나라에 잠겨있었기에 형은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 쪽으로 왔다. 한쪽 손으로 벤 천장에 달린 보조 손잡이를 잡은 채 상체를 숙여 나를 관찰하듯 지그시 바라봤다.
“응. 매니저 형이 물 사러 갔어. 근육이완제는 있더라고.”
“마사지 좀 해줄까?”
강현 형의 말에 정이한이 나보다 더 빨리 대답했다.
“할 줄 알아?”
“어. 춤 오래 추려면 근육 관리해야 하니까.”
과연. 강현 형다운 이유기는 한데…….
“괜찮아요.”
지금은 누가 내 몸을 만져서 좋을 게 없다. 마사지 좀 받는다고 근육통이 나아질 것도 아니고. 상태 이상은 나만 아는 비밀이었기에 그냥 괜찮다고 내뺐다. 정이한이 영 걱정되는지 나를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일 더 아프면 어떡해.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 지금 근육통 진짜 장난 아니라서……. 만지면 꽥꽥 소리 지를지도 몰라요. 형들 깨면 어떡해요.”
잠든 두 사람을 방패로 삼았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렇게 아파? 그럼 더 받아야지. 두 사람 깨울까? 어차피 휴게소니까 깨워도 되잖아. 화장실 가고 싶어 할 수도 있고.”
“하온아, 어디가 제일 아픈데? 말해 봐.”
지금은 온몸이 다 아프지만 앞으로 5분 뒤면 싹 나을 예정인데요……. 우물쭈물 버티다가 상태 이상 끝나자마자 마사지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체력이 좀 빨리 차려나, 아니면 반대로 마이너스? 전자면 쌍수 들고 환영이지만, 후자면 위험했다.
상태 이상이 끝나면 체력 0부터 시작인데, 강현 형의 마사지를 공격으로 인식해서 마이너스 되면 연달아 상태 이상이잖아. 위험한 길은 피해 가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형들은 나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심해서 괜찮다고 거절해도 도통 들어먹질 않았다.
“강현이가 옆에 앉을래?”
아예 자리까지 바꿔주려는 듯 일어나려고 하는 정이한의 팔을 잡아 끌어당겨서 다시 앉혀버렸다. 힘 조금 썼다고 악,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삼켜냈다.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이따 숙소 가서 해주시면 안 돼요? 여기는 불편할 것 같은데…….”
근육통 때문에 기절했다는 사람 이야긴 들어본 적 없으니까. 일단 이렇게 미뤄두면 숙소 도착할 즈음엔 형도 잊어버리겠지! 물끄러미 나를 보는 강현 형에게 진짜 괜찮다는 듯 웃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강현 형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방에 오일 있으니까 제대로 해줄게.”
“……네?”
오, 일……? 그렇게까지 본격적이라고? 강현 형은 날 향해 웃어 보인 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좌석 위로 빼꼼히 나온 형의 뒤통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어째 상태 이상 걸리는 빈도수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내 상태를 신경 쓰던 정이한도 내가 방긋방긋 웃자, 나를 보고 웃어줬다.
“웃는 거 보니 괜찮은 것 같긴 하네.”
“그럼요. 근육통 때문에 입원한 사람은 못 봤거든요.”
“그건 그렇지.”
우리는 업어가도 모르게 잠든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곤조곤 대화했다. 슬슬 상태 이상 끝나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제 1분 정도 남아 있었다.
삭신이 쑤신다……. 조금만 움직여도 욱신욱신 난리였다.
“형, 저 좀 기대도 돼요?”
“물론이지.”
나는 정이한 옆으로 바짝 붙어 기대는 동시에, 팔이 불편해 자세를 고쳐 앉는 척하며 슬쩍 옆구리 사이로 팔을 꿰어 넣었다. 어깨에 뺨을 기대고 정이한의 허벅지 위에 손등을 올려놨더니, 내 손을 꼭 잡아온다.
아주 좋은 습관이 들었어. 좋아, 좋아.
***
근육이완제를 먹을 즈음에는 이미 상태 이상이 말끔하게 끝난 상태였다. 심지어 정이한의 도움으로 체력도 조금 차 있었다. 이제 와서 안 먹겠다고는 할 수 없어서 근육이완제를 받아먹고, 정이한한테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피곤하긴 했는지 그 잠깐 새에 선잠이 들었다가, 숙소에 도착했다는 매니저 형의 목소리에 깼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서 그런지 온몸이 뻐근했다. 특히 허리가 쑤셔서 벤에서 내리자마자 상체를 좌우로 돌리며 스트레칭했다.
“상태 좋아 보이네.”
“약발 잘 듣는 체질인가 봐요.”
강현 형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으어, 11시네? 길 겁나 막혔나 보다. 우리 형 피곤하겠다!”
이서호가 정곤 형 어깨를 조물조물하면서 피로를 풀어주겠다고 나섰다. 매니저 형이 극구 사양하는데도 이서호는 집요했다. 그래도 형들한테 살갑게 예쁜 짓 하는 건 역시 이서호밖에 없어.
“이제 괜찮아. 너희 피곤할 텐데 빨리 올라가자.”
매니저 형이 서호의 등을 팡팡 두들기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피로가 씻겼을 리 없는데도 아주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유찬 형이 매니저 형도 피곤할 테니까 데려다줄 필요 없다고 거절했지만, 매니저 형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우리를 숙소 앞까지 무사히 배달한 뒤, 형은 신발도 벗지 않고 엄포를 놓았다.
“얘들아.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알지?”
“네!”
“다들 피곤했을 테니까 어여 씻고 자. 오늘 새벽엔 진짜 연습 금지야. 너희 회사와도 들여 보내주지 말라고 말해 놓을 거야.”
“넵!”
“좋아. 그럼 내일 7시에 데리러 올게. 푹 쉬어 얘들아!”
다들 현관 앞에 둥글게 모여 서서 매니저 형을 배웅한 뒤에 문을 닫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강현 형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하온이는 내 방으로.”
“응? 하온이 왜?”
“얘 근육마사지 좀 해주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뭐야! 전에 내가 해 달랬을 땐 안 해주더니!”
유찬 형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강현 형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마사지 한 번 해주고 나면 피곤해. 기 빨려.”
“그런데 하온이는 왜?”
“근육통 있대서.”
“어? 그래?”
유찬 형이 소파에 앉으면서 날 걱정스럽게 봤다.
“지금은 괜찮아요. 아까 잠깐 그랬어요.”
“강현이가 해준다고 할 때 받아. 그거 되게 시원해.”
“그래, 하온아. 마사지 받자.”
정이한까지 옆에서 부추겼다. 오는 내내 푹 잔 덕분에 체력은 20까지 올라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일단 체력 빠지는지 맛만 좀 볼까……. 체력 떨어지면 아프니까 그만해 달라고 해야지.
“그럼 우리 방 내어줄게. 하온이 편하게 마사지 받아야지. 오늘은 거실 화장실에서 씻어야겠다. 얘들아, 순서 정하자!”
나는 샤워 순번을 정하자고 나서는 유찬 형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강현 형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강현 형, 피곤하지 않아요?”
“너보단 멀쩡해.”
“……저도 꽤 멀쩡해요.”
“가자.”
가볍게 웃어 보인 형이 날 데리고 큰 방으로 갔다. 이 형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 웃지? 신나게 몸 써서 컨디션이 좋은가?
안방 화장실에서 바디타올 두 장을 꺼내온 강현 형은 침대 위에 타올을 겹겹이 깐 뒤, 서랍 안을 부스럭부스럭 뒤지며 말했다.
“일단 벗고, 엎드려.”
벗……. 아, 오일 발라야 하니까 그런가?
“반팔이랑 반바지로 갈아입을까요?”
“아니. 등도 해야지.”
“……아. 어디까지 벗어요?”
“다.”
“……다요? 소, 속옷도요?”
“아니. 옷만 벗으면 돼.”
“아하.”
옷을 벗으려다가 지금 상황이 묘하게 민망하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남의 방에 들어와서 나 혼자만 옷을 벗고 누우려니까 이게 좀, 그림이……. 아니! 좀 이상하지 않아? 나만 신경 쓰여?
“형. 저 좀 부끄러운데요…….”
“왜?”
“그러게요…….”
다 벗고 공용 샤워실에 들어가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바람에 옷을 벗으려다 말고 셔츠 끝을 쥔 채 우물쭈물했다.
“하온아.”
“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
아니,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데. 당혹스러운 요구에 사정없이 동공 지진만 일으키고 있었는데…….
“괜히 나도.”
하 씨, 한숨을 내뱉은 강현 형이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 미치겠네. 왜 그런 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분위기 이상해졌잖아.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