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01화 (101/320)

101.

“형, 미안해요. 놀랐어요?”

“어? 아니, 네가 왜 미안해…….”

“얼굴 만져서 놀란 거 아니에요?”

“어, 그, 그렇기는 한데.”

정이한은 양쪽 눈썹 끝을 축 늘어트린 채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봤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아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제가 잘못한 거 맞네요, 뭐!”

“……아니야, 내가. 갑자기, 그. 가……어서.”

“네?”

뒷말이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달라는 뜻을 담아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자,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른 채 나를 보던 정이한이 입을 꾹 다물고는 마구 도리질 쳤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더니 도망치듯 기장 팀으로 뛰어가 버렸다. 정이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유찬 형을 봤다. 정이한이 왜 저러는지 해석 좀 해달라는 눈빛을 담았더니, 유찬 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하온이는 유죄남이야.”

“……저 범죄 저지른 적 없는데.”

“우리 막내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뜻이지!”

해석은커녕 괜히 민망한 말만 들었다. 얼굴에 열기가 확 몰려든 탓에 헛기침하면서 시선을 피하자 유찬 형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우, 우리 막내는 진짜 귀엽고 예쁘고 혼자 다 한다니까!”

“야야, 디아스 팀! 너네 둘이 연애하냐? 왜 그렇게 알콩달콩해?”

추덕수 선배님의 놀림에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유찬 형이 서로의 뺨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붙이면서 장난스레 말했다.

“그래요? 저희 그렇게 알콩달콩해 보여요?”

“어우! 너희들 원래 저러고 노냐? 디아스 애들아?”

“저 형은 항상 저래요.”

이서호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색하며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보다는 유찬 형에게 맞춰주는 게 나은 것 같아서 얌전히 형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겸사겸사 체력 회복도 되고 좋지, 뭐.

“아~ 아무래도 들킨 것 같은데, 하온아. 우리 그냥 사귄다고 발표할까?”

장난스레 묻는 말에 내가 웃으면서 “그럴까요?”하고 대답한 순간이었다.

“안 돼!”

정이한과 이서호가 동시에 외쳤다. 출연진의 시선이 모두 두 사람에게 향했다.

“뭐야? 이거 이 분위기 뭔가요~”

전재규 선배님이 의뭉스럽게 물었다. 장난기로 똘똘 뭉친 눈동자가 새로운 놀림감을 찾았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우, 우리는 아이돌이라 연애는 안 돼요…….”

정이한이 시선을 바닥에 깔면서 우물우물 둘러댔다. 이서호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정이한의 말을 이어받았다.

“신인이 벌써 추문에 휩싸이면 안 되죠!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진하온!”

뭐야, 왜 나만? 장난은 유찬 형이 먼저 했는데? 아니, 그보다 애초에 장난인데. 다른 여자 아이돌이랑 그런 것도 아니고 멤버끼리 장난 좀 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쨌든 상황은 수습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유찬 형의 가슴팍을 밀면서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반대쪽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는 이어질 수 없는 사이인가 봐요.”

“……이럴 수가! 이 정도 시련은 극복할 수 있어! 포기하지 마!”

“미안해요, 형!”

“으아아아!”

유찬 형이 나를 붙잡는 척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렸다. 나는 그런 형에게서 도망치는 듯 제자리에서 살랑살랑 뜀박질했다. 덕분에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꽁트가 탄생했다.

“으하하! 아니, 너희 와중에 팬터마임 왜 그렇게 잘하냐? 이거 하려고 연습해 왔지!”

전동진 선배님이 우리를 손가락질하면서 배를 붙잡고 웃으셨다. 다행이다! 한 명이라도 웃겼어!

“저런 게 바로 재능 낭비인가.”

출연진들이 우리의 꽁트를 놓고 열심히 떠들 때였다.

“자, 여러분! ‘마을 이어달리기’ 순서는 모두 정하셨습니까?”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되려는지 피디님이 우리를 집중시켰다. 지방방송이 모두 끊긴 건 피디님이 들고 오신 새로운 지도 때문이었다. 알록달록한 건 마찬가지였는데, 맨 처음 지도와 달리 총 열 군데에 새빨간 동그라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정확하게 우리 코스 위에 붙어 있어서 직감적으로 ‘저 지점에 미니 미션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빨간 점과 점 사이 코스를 달리는 구간에서는 미션이 주어진다는 피디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9대1 상황이 되었을 때 시청자들의 긴장감을 유지 시켜 줄 장치인 것 같았다.

승리 팀이 확정되면 재미가 반감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즉, 나와 유찬 형이 기적의 대역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기장 팀이 미션에 실패해서 발이 묶인 사이에 열심히 달려서 따돌리는 식으로 말이지.

나와 유찬 형은 서로 손을 꽈악 맞잡은 채 의지를 다잡았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이길 거야!

***

정이한의 조언에 따라 무사히 전기 자전거를 획득한 우리는 기장 팀이 하나 남은 전기 자전거를 두고 싸우는 걸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했다. 두 명뿐이었기에 한 명은 달리고, 한 명은 타면 되는 우리와 달리 기장팀은 한 명이 달릴 때 네 명이 자전거를 타야 했다.

디아스 멤버들은 모두 일반 자전거를 타겠다며 양보했고, 기장 팀 선배님들 사이에서 치열한 접전이 일어났다. 먼저 타는 사람이 임자라며 냅다 자전거를 타고 도망쳐 버린 추덕수 선배님 때문에 때아닌 추격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결국, 전기 자전거는 제일 연장자인 봉재범 선배님께 돌아갔고, 선배님이 달릴 때는 추덕수 선배님이 물려받기로 결정되었다.

우리 팀은 내가 먼저 달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상대는 추덕수 선배님이었다. 우리는 출발점에 나란히 선 채 시작 지점에서 주어지는 미션을 받았다.

“달리면서 노래방 점수 90점 이상 달성 시 통과!”

나는 미션을 듣자마자 뛰어나갔고, 추덕수 선배님은 “악! 선수 교체!”를 외쳤다. 하지만 단호한 피디님이 “선수 교체는 안 됩니다.”하고 선을 그었다.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나와 달리는 속도를 맞춰오는 유찬 형이 “하온아, 파이팅!”하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비트가 빠른 노래를 선곡하자 제작진이 곡을 세팅해 전주가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넘겨줬다.

하지만 여긴 음방이 아니라 예능이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내내 옆에서 기장팀 선배님들이 “악악!” 고라니 소리를 내면서 추임새를 넣었다. 덕분에 엉망진창이 되어 90점 근처에도 못 가고 노래가 끝나 버렸다.

바로 재도전할까 하다가, 괜히 힘 뺄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도전을 멈췄다. 추덕수 선배님도 도전은 해야 할 테니까 그때 같이하면 방해받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도 거리가 벌어지면 시작해도 될 것 같았고.

기회는 얼마 가지 않아 찾아왔다. 주변에서 빨리 도전하라는 소리와 함께 추덕수 선배님이 도전을 외쳤다. 질세라 나도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는데, 문제는…….

“빛! 나-아는! 태! 양처럼-! 너는-내게! 와아았-어어어!”

“푸, 푸하학!”

“으하핳하하하하!”

선배님의 노래 실력은 말 그대로 끔찍한 수준이었다. 선곡은 감수성이 풍부한 발라드였는데, 군가를 부르듯 음의 높낮이라곤 없는 힘찬 가창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는 최대한 귀를 틀어막고 감정을 다잡으며, 재도전하기 위해 노래를 틀었다. 하지만 도저히 너무 웃겨서 부를 수가 없어서 결국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안 되겠어, 따돌리고 불러야지.

“어어! 막내 달린다! 덕수 형님! 달려요!”

“헉, 헉, 아, 잠깐. 헉헉, 잠깐. 헉.”

“우리가 먼저 가서 막을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 기장 팀 선배님들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자전거는 라인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었으므로, 나는 휴대폰 스피커 부분을 손으로 말아 쥔 채 최대한 주변의 소음이 흘러 들어가지 않게끔 입을 바짝 붙여서 노래 불렀다. 그 결과…….

“98점이요!”

따라오는 제작진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제작진은 “진하온, 통과!”하고 청명한 목소리로 외쳤다. 뿌듯하게 웃으면서 기장 팀을 한 번 쳐다봐주고 열심히 다음 포인트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미션.

“잰말놀이입니다. ‘경찰청 창살 쇠창살’”

이것도 쉽네. 전생에서 발음 교정하려고 열심히 입에 달고 살던 것 중 하나였다. 나는 아주 여유롭게 건네준 쪽지도 보지 않고 “쌍 철창살이다!”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하온아, 여기서 교대.”

“네!”

유찬 형과 내가 바통 터치할 동안, 추덕수 선배님은 여전히 90점을 통과하지 못해서 헤매고 있었다. 유찬 형이 앞서 달리는 사이 기장 팀의 동태를 잠깐 확인했는데, 결국 모두 다 같이 불러서 추덕수 선배님의 목소리를 묻어 버리는 꼼수를 써서 간신히 미션을 통과했다.

미션에 도전할 때 조용해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으므로 성공 판정을 받았고, 두 번째 미션 포인트 앞에서 정이한으로 선수가 교체되었다. 아, 잘하면 추월당하겠는데. 정이한만큼 딕션 좋은 래퍼를 본 적 없어서 뒤도 보지 않고 유찬 형을 향해 자전거를 굴렸다.

“형, 창살 미션 이한 형이에요.”

“악, 오겠네.”

“네.”

“페이스 조절 좀 할까 했는데.”

유찬 형은 호흡을 고르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속도를 높였다.

“쉬는 건 죽어서 하면 되지!”

“무리하지 마요.”

“걱정 마!”

속도를 높이는 유찬 형을 따라가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기장 팀 선배님들의 우레와 같은 채찍질에 정이한이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유찬 형과의 거리가 좁혀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유찬 형의 힘이 빠지는 게 문제였다. 교대로 계속 달려야 하는 우리와 달리, 기장 팀은 선수를 교체해가며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꽤 박빙의 게임이 이어지고 있는 건 전부 미션 덕분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마지막 오르막길 코스. 디아스 팀 유찬 형과 기장 팀 강현 형의 싸움이 되었다. 미션으로 제시된 구구단 게임을 두 형 모두 가뿐히 통과해, 결승선까지, 오직 달리기만으로 승부를 결정짓게 되었다.

이미 힘이 빠진 유찬 형과 체력이 충분한 강현 형의 시합은 너무도 쉽게 끝나 버렸다. 기적의 대역전극은 없었다.

“유찬 형, 잘했어요.”

가쁜 숨을 헐떡거리는 형에게 재빠르게 물병을 찾아와 건네줬다. 형은 물병을 절반 가까이 빠르게 비워내곤, 나머지는 머리에 쏟아부었다.

“최종 스코어, 기장 팀 승리!”

승리를 확정 지은 기장 팀이 방방 뛰면서 환호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벌칙뿐이었다.

“디아스 팀의 벌칙은…….”

피디님이 나와 유찬 형을 보면서 즐겁다는 듯 눈꼬리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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