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갑자기 현관 앞에 멈춰선 유찬 형의 뒤에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정이한이 찾아왔나?
“……저게 뭐예요?”
“그러게…….”
“아! 이한 형!”
뒤늦게 상황을 상황 파악한 이서호가 황당해하면서 현관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문에 붙어 있는 건 정이한의 이름표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정말이네…….
어쩐지 허무한 심정이 되어 터덜터덜 걸어 나왔더니 기장 팀 선배님들이 박장대소하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와! 진짜 끝까지 못 알아챘네?”
“이한이 작전 성공이다!”
“어, 네, 네에.”
정이한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어설프게 대답했다. 당황한 티가 역력한 게 아무래도 기장 팀을 위한 작전이었다기보단……. 디아스 팀이 이기게 해서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걸 아무도 발견 못 했다. 솔직히 현관문에 대놓고 붙여 놓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냐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실내부터 스캔하기 바빴는데.
어찌 됐든 양쪽 팀 전부 두 명씩 찾지 못해서 최종 라운드를 앞두고 동점인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최종 라운드에 앞서, 팀원 뺏기 보너스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기면 무려 두 명의 팀원을 빼앗아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보너스 라운드는 눈치 게임입니다. 시작!”
피디님의 외침으로 갑자기 시작된 게임에 화들짝 놀란 사이 1과 2가 연달아 불렸다. 전부 기장 팀 선배님들이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이서호가 3을, 이어서 전동진 선배님이 4를 불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도 지는 게임이라 재빠르게 5를 외쳤는데…….
“5!”
“5!”
“악!”
나와 유찬 형이 동시에 외쳐버렸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떨궜다. 열심히 찾은 보람 없이 또 져버렸네.
“하온아, 그래도 우리 잘했어…….”
“네, 잘했어요…….”
“헤어지고 나서도 나 잊으면 안 돼…….”
“형, 그건 너무 갔어요.”
“그런가?”
“네.”
유찬 형이 아하핫,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이서호가 우리를 흘겨보면서 고개 저었다.
“졌으면서 뭐가 그렇게 좋아?”
“아직 마지막 라운드는 남아 있잖아!”
나는 애써 경쾌하게 말했지만, 이서호는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입술이 삐죽 나온 걸 보니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라 언짢은 것 같은데.
“우리 팀 다 찢어지잖아…….”
“아.”
최종 라운드 전까지 디아스 완전체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예능일 뿐인데, 기특하기는. 이서호를 양껏 귀여워해 주려던 때였다.
“기장 팀, 멤버 정했습니다!”
봉재범 선배님이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자신감에 찬 어조를 보니 최종 라운드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정이한이 무척 아쉬워하는 시선을 보내온 탓에, 내가 뽑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현이! 서호! 기장 팀으로 영입합니다!”
이렇게 디아스 팀에는 나와 유찬 형만 남게 되었다.
“유찬 형…….”
“하온아…….”
서로를 와락 끌어안은 채 슬픔을 달래는 사이 강현 형과 이서호는 하늘색 조끼를 벗어들었다. 아쉬운 듯 조끼를 만지작거리던 강현 형은 내 머리를 꾹 누르듯이 쓰다듬어주곤 피디님께 조끼를 반납했다.
이서호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꾸 나와 유찬 형을 돌아보면서 질질 끌려가듯 멀어졌다. 의외로 디아스 팀에 가장 진심인 건 이서호였나 보네.
팀별로 나누어 서고 보니 디아스 팀이 더욱 단출해 보였다. 남은 체력이 얼마 없어 유찬 형한테 딱 달라붙자, 형도 내 손을 꼭 잡아줘서 얼떨결에 서로에게 의지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뭐, 의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마지막 라운드는 ‘우리 마을 이어달리기’입니다.”
아, 망했다. 코스를 설명하려는 건지 스태프분들이 거대한 지도가 붙은 화이트보드를 끌고 나왔는데, 알록달록 예쁘게도 그려놨다. 3km라는 총 거리와 코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펜션에서 출발해 인근의 작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펜션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이번에는 스태프분들이 총동원되어 자전거 열 대를 끌고 오셨는데,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각 팀이 하기에 달려 있다고 하셨다. 기장 팀은 무조건 이겼다면서 만세를 부르고, 난리가 났다. 물론, 우리를 약 올리듯 도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쩐다……. 펜션으로 오는 내내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랐던 걸 생각하면, 절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게임은 체력전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체력 제한만 없으면 잘 뛸 수 있을 텐데, 아쉽네. 어쨌든 지금 내 조건에서 최대한 잘할 수 있을 만한 방향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물약 드링킹부터 하고 와야지.
“형,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응. 갔다 와. 나는 고민 좀 해볼게.”
유찬 형은 팔짱 낀 채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대꾸했다. 그 길로 곧장 화장실로 향한 나는 문을 꼭꼭 잠그고, 소지품 창에서 물약 두 개를 다 꺼내 들었다.
먼저 체력을 20% 회복해 주는 미미한 박카스를 먹고, 체력이 24 회복된 걸 확인한 뒤 체력 20을 올려주는 미미한 비타300까지 다 먹어 치웠다. 60까지 올랐네.
사실 좀 많이 채운 것 같기도 했지만,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게 나으니까. 촬영 중에 체력이 부족해지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카메라가 계속 따라다니는 데다 녹화 도중 화장실에 갈 시간이 없을 건 분명하니까.
“형, 저 왔어요.”
“어어, 이리 와봐.”
부르는 말에 얼른 유찬 형 옆에 쪼그려 앉아서 지도를 들여다봤다. 그 사이 형은 파란색 매직으로 몇 군데에 동그라미를 그려서 코스를 표시해 놨다.
“저희 선수 교체하는 지점이에요?”
“응. 난이도에 따라서 팔 등분 해 봤거든. 이쪽은 오르막길이니까 조금 더 짧게 하고, 여기는 평지니까 길게 주는 식으로 밸런스 고려해서 나눴어.”
“아아, 그럼 전 어디 어디 뛰면 될까요?”
계속 지도를 들여다보던 유찬 형이 그 말에 불쑥, 내 쪽을 보더니 귀 좀 빌려달라는 듯 손을 까딱거렸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손날을 세워 뺨에 대고는 목소리를 확 낮춰서 속살거렸다.
“너 체력 괜찮아?”
“아마도요.”
“내가 여섯 코스 돌까 했는데…….”
유찬 형은 말을 늘이면서 내 눈치를 살피다가 야트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표정 풀어.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자.”
그러면서 어르고 달래듯 내 뺨을 살살 문질렀다. 그제야 만족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딱딱하게 굳힌 표정을 풀었다. 열심히 뛰려고 체력 약까지 먹고 왔다. 형한테 전부 부담 지우고 싶진 않았다.
“강현이만 있었어도 문제없는데…….”
“……그건 그래요.”
우리는 동시에 기장 팀 사이에 있는 강현 형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강현 형이라면 전력 질주는 무리여도 3km 러닝 정도는 동네 산책하듯 할 수 있을 텐데.
“뭐! 강현이 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믿고 맡기라는 듯, 유찬 형이 해사하게 웃으며 가슴을 쫙 폈다. 당연히 믿죠, 그렇게 대답하면서 형의 가슴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우리는 파이팅을 외친 뒤 형의 주도하에 코스를 반으로 나눴는데, 내게 달리기 쉬운 코스가 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오르막길 두 개는 내가 다 할게. 뛰다가 자전거 타면 더 힘들 것 같아. 하온이는 힘들면 자전거 끌고 올라오고.”
“너무 저한테만 편한 거 같은데요.”
“내가 형이잖아.”
“제가 더 어리잖아요.”
“하지만 우리 하온이 체력이…….”
“……아, 그래도요.”
“체력이…….”
유찬 형은 다른 말 않고 딱 ‘체력’ 이야기만 반복했다. 평소에 체력 때문에 혼자 나가떨어졌던 기억들이 속속 떠올라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나 같은 멤버 있으면 형처럼 감싸고 봤을 테니까.
“져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 바꿔줄게. 나도 러닝 3km 정도는 할 수 있어. 속도는 느려도 완주하는 거야 문제없으니까. 알았지?”
걱정 끼치지 말고 부탁이야, 하온아.
덧붙인 말에 할 수 있다고 반박하려던 마음이 쏙 들어가서 “알겠어요.”하고 한발 물러나 줄 수밖에 없었다. 계곡 입수는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만약 지게 되면 웃는 얼굴로 입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위해 노력해 준 유찬 형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하온아.”
그때,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개만 들어 확인해 보니 정이한이 위에서 날 내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정이한은 곧장 내 옆으로 와서 쪼그려 앉더니 날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거랑 오른쪽에서 네 번째 거 전기 자전거야. 이따가 자전거 가져가라고 하면 빨리 뛰어서 챙겨.”
기장 팀 선배님들 중에서도 알아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꼭 먼저 뛰어서 챙기라고 신신당부까지 해 온다. 이거 마이크 타고 다 들어갈 텐데 나한테 알려줘도 되는 걸까? 나중에 괜히 이상하게 편집되면 어떡하지?
조금 걱정됐지만, 촬영 내내 예능 병아리들이라며 우리를 예뻐해주시던 제작팀이 악마의 편집을 하진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미 말해버렸으니 어쩌겠어.
“알았지?”
“네. 그럴게요.”
“나도 같이 뛸게.”
유찬 형이 눈을 빛내면서 우리의 먹잇감을 살폈다. 우리는 둘이서 하나의 자전거만 쓰기로 했으므로 한 대만 있으면 충분했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나중에 아…….”
정이한이 더 말하기 전에 허겁지겁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열심히 하지 마, 그다음에 붙을 말은 ‘나중에 아플지도 모르니까.’ 일 게 뻔해서였다. 몸 쓰는 예능에서 언급해봤자 득 될 거 없는 말이라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정이한이 눈치 챙길 수 있도록 눈짓으로 가슴께에 달린 마이크를 가리켰다. 그제야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면서 당황해하는 게, 진짜 몰랐나 보다. 내가 뭘 주의시키는 건지 아직도 영 못 알아차리는 눈치라, 상체를 가까이 붙여서 마이크에 음성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발언 신경 써요. 마이크에 들어가잖아요.”
그러자 그렇게 덥지도 않은데 한증막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귀까지 시뻘게져서는 내 손을 밀쳐냈다. 쪼그려 앉아 있었던 탓에 균형이 무너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헉, 하온아……!”
“아야…….”
“괜찮아? 미안…….”
정이한이 허겁지겁 나를 일으키더니 급기야는 엉덩이까지 툭툭 털어줬다. 넘어지는 바람에 아까운 체력이 무려 5나 빠졌지만, 그보다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정이한부터 챙겨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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