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나는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멤버들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행동을 개시했다. 거대한 종이를 네 번 접어서 적당히 사이즈를 줄인 뒤 청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였다. 외벽에는 잘 안 붙을 테니까 떨어지지 않게 테이프를 아주 길게 빼놨다.
테이프끼리 서로 엉키지 않게 조심조심 잡고서 부엌에 나 있는 작은 창을 활짝 열고, 방충망까지 밀어낸 뒤 종이를 든 팔을 밖으로 뻗었다.
하지만 싱크대 때문에 반대편까지 제대로 붙이기가 어려웠다. 손으로 더듬어 보니까 외벽에 붙은 종이가 덜렁거리는 것 같았다. 제대로 붙이려면 몸을 좀 더 내밀어야 할 것 같아서 싱크대 위로 올라가려고 하자, 강현 형이 아서란 듯 내 어깨를 붙잡았다.
“창밖 벽에 붙이려는 거지?”
“네. 그런데 팔이 끝까지 잘 안 닿아요.”
“비켜 봐.”
강현 형이 긴 팔을 창밖으로 쭉, 내밀어 한참 더듬거리더니 테이프를 더 떼어 달라고 요구했다. 얼른 길게 찢은 테이프를 건네줬다.
“이건 너무 길어서 엉킬 것 같은데. 더 짧게 여러 개 찢어줘.”
“네!”
여러 번에 걸쳐 꼼꼼히 테이프를 덧붙인 후, 손에 느껴지는 감촉으로 잘 붙었는지 확인한 형이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안 떨어질 것 같아요?”
“어. 제대로 붙였어.”
“절대 못 찾겠죠?”
거의 답은 정해져 있고 형은 대답만 하면 돼, 수준으로 확신을 담아 물었다. 일부러 부엌의 작은 창을 노린 이유기도 했다. 방에 있는 큰 창은 몸을 빼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저기는 만져야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싱크대라는 장애물까지 있으니, 쉽게 찾긴 어려울걸!
“응. 그럴 것 같다.”
강현 형이 동의해주자 뿌듯한 마음에 얼굴 근육이 풀려버렸다. 머리를 흔들면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피디님의 휘슬 소리가 들렸다.
“수비팀, 타임 오버입니다!”
“네!”
피디님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시길래, 그냥 방긋방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펜션 밖으로 나가진 않았어요. 안에서 붙인 거니까 합격 맞죠?”
“네, 떨어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피디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현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멤버들을 향해 달려갔다.
***
공격팀이 수색하는 동안 우리는 내부를 볼 수 있는 모니터 앞에 쪼르륵 앉아 있었다. 이서호가 종이 이름표를 숨긴 침대 방은 봉재범 선배님이 맡아 수색하고 있었다.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진중한 탐색 끝에, 봉재범 선배님은 쿨하게 몸을 돌려 나갔다.
강현 형이 숨겨 둔 계단 틈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유찬 형의 화분도 몇 번 관심을 받았는데, 얹어둔 돌멩이를 치우려는 시도까지 하는 사람은 없어 안심하던 중이었다.
“어? 서호 거 들키겠다.”
“……그러게요.”
“악! 안 돼!”
이서호가 초조한 듯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면서 모니터에 집중했다.
“손톱 뜯지 마.”
손목을 잡아 내리며 제지하는데도, 이서호는 나를 보기는커녕 잔뜩 긴장한 채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도준 선배님이 바닥에 엎드린 채 침대 프레임 밑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덕수 형! 저희 이 침대 좀 들어봐요!]
[힘들게 뭐하러?]
[원래 있던 위치에서 미세하게 바뀐 것 같아요. 여기 다리 부분 절반만 반질반질한 거 보이죠?]
아. 우리가 들었다가 내리면서 원래 위치를 조금 벗어난 모양이었다. 침대 다리가 맞닿은 부분에만 먼지가 쌓여있지 않은 걸 예리하게 지적하는 강도준 선배님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 맞다! 맞다! 여! 강도준이! 한 건 했네!]
두 분은 침대를 들려고 이리저리 시도해보다가 영 힘에 부쳤는지 기장 팀 전원을 소집했다. 혼자서 쓸쓸히 떠돌던 정이한까지 강제로 끌려와서 침대를 들어 올려야만 했다.
[찾았다! 이서호! 침대!]
“으아아아아! 내 이름표!”
“저런.”
모니터 속, 서로를 얼싸안은 채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하는 선배님들을 보다가 거의 울 기세인 이서호의 어깨에 팔을 둘러 토닥거려줬다. 하지만 고작 하나만 찾았을 뿐이다. 더 못 찾겠지?
그런데 선배님들의 탐색은 의외로 기상천외했다. 그새 어디서 청소기를 들고 온 전재규 선배님이 틈새 여기저기에 주둥이를 밀어 넣고 있었다.
[뭐하냐?]
[코딱지만 한 거 뽑았을 수도 있잖아요. 빨아들이다 보면 나오겠죠!]
[……어, 열심히 해라,]
봉재범 선배님은 헛짓하는 사람을 보듯 한심하게 봤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전재규 선배님은 청소기로 창틀은 기본이고 몰딩까지 꼼꼼하게 쭉쭉 훑으면서 지나갔다. 그리고 결국 강현 형이 숨겨 둔 계단 틈새까지 닿았다.
하지만 빨아들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사이즈니까, 강현 형이 ‘어떤 물건’에 숨겼는지는 모르지 않을까? 이름표 찾기 게임이 아니라 숨긴 물건 찾기 게임이니까.
이거는 걸리더라도 좀 빡빡 우겨보면 어떻게 무효 처리될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그 순간, 모니터 속 정이한이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유찬 형이 숨겨 둔 화분 앞에 쪼그려 앉더니 강아지처럼 손끝으로 흙을 문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이한아, 안돼에…….”
유찬 형은 손등으로 입술을 틀어막은 채 정이한의 행동을 주시했다. 하는 행동을 보니까 열심히 찾는 게 아니라, 찾는 시늉만 하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그게 화분이다.
“아아, 이한이 꽃 좋아하는데 그걸 생각 못 했네…….”
유찬 형이 고개를 푹 꺾으면서 한숨 쉬었다. 쭈글쭈글하게 앉아서 흙을 건드리던 정이한은 결국 내가 올려둔 돌멩이를 치워버렸다. 들켰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행히 정이한은 돌멩이를 원위치로 옮겨 놓은 뒤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기서 가져온 건 어떻게 알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거냐……. 화분을 좋아하는 사람 눈에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이나? 저렇게 단박에 원래 위치로 돌려보낼 만큼?
“와, 들키는 줄 알았어요…….”
정말이지 예능은 만만치 않았다. 뭐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게…….”
[오! 그래! 여기 화분 흙에 묻었을 수도 있겠다!]
그때, 전재규 선배님이 화분이 올려진 가구 밑에 청소기를 밀어 넣으면서 정이한에게 조언했다.
[이한, 거기 좀 파봐!]
[여기요……?]
[어어! 파! 깊게는 안 묻었을 테니까 위에만 대충.]
[네.]
순순히 화분을 파던 정이한은 결국 유찬 형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전재규 선배님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우리의 탄식이 동시에 울렸다.
종료 3분 전.
전재규 선배님은 드디어 사방을 쓸고 다니던 청소기를 분해해 먼지 통을 살피기 시작했다. 뽀얀 먼지 뭉치 사이에 강현 형의 이름표가 섞여 나올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의외로 먼지 통에는 형의 이름표가 없었다.
“어? 강현 형 꺼 없어요!”
내가 외치자 강현 형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테이프 잘라서 같이 꾸겨 넣었거든.”
“진짜? 아까 왜 말 안 했어!”
이서호가 괜히 걱정했다면서 억울해했는데, 나도 공감이 가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형을 봤다.
“……말해줬어야 했나?”
아, 그래. 원래 이렇게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었지……. 강현 형은 목덜미를 긁으면서 “미안.”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나랑 서호는 걸렸고, 두 사람은 안 걸렸으니까 우리가 최소 4개는 찾아야 동점이네.”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게임이 끝나면 다음은 최종 라운드였다. 잘해야 할 텐데. 곧바로 공수가 전환되어 이번엔 우리 팀의 공격이었다. 모니터가 꺼진 뒤 우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각자 수색 구역을 나눴다.
그리고 우리 팀의 수색 시간. 펜션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다 같이 움직였다. 혼자 들기 어려운 가구 바닥부터 먼저 체크했지만, 이서호가 침대 프레임 밑에 붙였다가 한 번 걸렸기 때문인지 전부 꽝이었다.
3분 정도 경과 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수색 구역으로 흩어지기로 했다. 나는 부엌, 이서호는 첫 번째 방, 유찬 형은 두 번째 방, 강현 형은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실은 다 같이 탐색하기로 했다.
선배님들도 나랑 비슷한 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창밖을 체크했지만, 손에 걸리는 걸 잡아 뜯으니 내 것뿐이었다. 냉장고도 샅샅이 뒤져보고, 심지어는 반찬통도 하나하나 다 열어봤다.
싱크대 하부장에 들어있는 조리도구며 그릇을 죄다 꺼내서 뚜껑까지 다 열어보고, 싱크대 안쪽까지 샅샅이 뒤졌는데도 영 수확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부장을 통과하는 싱크대 배수관이 눈에 들어왔다. 톡톡 건드려서 확인해 보니 돌려서 뺄 수 있는 구조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배수관을 돌돌 돌려서 안을 확인했더니…….
“찾았다!”
포스터 사이즈의 종이가 돌돌 말린 채 들어가 있었다. 펼쳐서 확인해 보니 ‘강도준’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선명했다. 자랑스러운 전리품을 옆구리에 끼고, 곧바로 추가 수색에 나섰다.
상부장도 샅샅이 살피기 위해서 의자를 끌어와 딛고 올라갔다. 하지만 상부장에서는 별다른 수확물을 찾지 못했다.
이 정도면 부엌은 다 살핀 것 같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일단 거실로 나갔다. 욕실을 맡았던 강현 형이 먼저 거실을 살피고 있었다.
나도 곧바로 합류해서 장식장을 열어보고, 바닥에 깔린 카페트를 뒤집었다.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어서 카페트를 다시 내려놓으려는데 하얀 먼지 같은 게 갑자기 시선을 잡아끌었다.
다시 카페트를 뒤집어 확인해 보니 바닥 나무 장판 틈새에 뭔가가 끼어 있었다. 종이인 것 같아서 손톱으로 긁어보니 조금씩 긁혀 나왔다.
“전동진 선배님 것도 찾았어요!”
벌써 두 개나 찾았다. 유찬 형과 이서호도 거실로 나왔는데, 강현 형과 이서호는 못 찾았고, 유찬 형이 추덕수 선배님 이름표를 찾았다고 했다. 이제 세 개. 앞으로 하나를 더 찾아야 겨우 동점이다.
전부 거실에 숨겼을 리는 없을 텐데…….
정이한은 어디에 숨겼으려나. 큰 종이는 몰라도 작은 게 걸렸다면 아마도, 정이한 성격상 화분의 이파리 밑에 붙이지 않았을까? 혹은 화분 바닥이나.
유찬 형이 흙 속에 숨겼다가 딱 걸렸었으니까, 똑같이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예상이 맞아떨어지길 기대하며 거대한 활엽수 잎을 하나하나 뒤집어 보던 중이었다. 청테이프로 조심스럽게 붙여 놓은 이름표가 발견됐다.
“또 찾았어요!”
“아니, 진하온 무슨 일? 너 혼자 CCTV 달아놓고 봤냐?”
“내가 촉이 좀 좋아.”
“어, 이건 좀 인정이다.”
“역시 우리 하온이! 우리 막내가 최고다!”
“잘했어.”
형들의 칭찬 세례를 듬뿍 안고 꾸깃꾸깃 접어 둔 종이를 펼쳤다. 정이한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봉재범 선배님의 이름이 나왔다.
결국, 끝내 전재규 선배님과 정이한의 것은 찾아내지 못한 채 수색이 종료되었다. 피디님의 휘슬 소리를 듣고 펜션을 나가려는데…….
“정이한……?”
유찬 형이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