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98화 (98/320)

98.

“이한 형은 기장 팀 원했으니까 괜찮지?”

이서호가 약 올리듯 말하자 정이한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나 때문에 온 것 같은데 버리고 가자니 미안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한 형, 미안해요. 파이팅!”

정이한의 어깨를 두들겨주고는 조끼를 반납하고 디아스 팀의 하늘색 조끼를 받아 들었다. 덩그러니 서 있는 정이한을 보고 이서호가 낄낄거렸다.

“이한 형, 지금 완전 솜씻너야! 우하하!”

“어, 맞아! 뭔가 닮았다 했더니 그거네!”

유찬 형이 박수까지 치면서 맞장구쳤다. 솜씻너? 저건 또 뭘 줄인 말이야.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멀뚱거리고 있자 유찬 형이 친절하게 솜씻너의 유래를 귀띔해줬다.

아……! 듣고 보니 확실히……. 솜사탕 씻어 먹으려고 물에 넣었다가 사라져서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짓는 너구리 같긴 했다. 되게 적절한 비유라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디아스를 배신하려고 한 죗값을 받는 거야.”

유찬 형이 팔짱 낀 채 고개를 주억거리자 이서호가 옆에서 콧방귀 뀌었다.

“그런 말 할 자격 있어요? 두 번째로 배신하려고 했던 리더님?”

“사람은 때때로 영악할 줄도 알아야지.”

“형, 그거 완전 내로남불임.”

유찬 형의 두 눈이 곱게 접혔다. “아니야.”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는데 저렇게 감미롭고 예쁜 목소리로 말할 필요가 있는 내용인가 싶어 혼란스럽다.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게임은 ‘물건 숨바꼭질’입니다.”

물건 숨바꼭질? 처음 듣는 게임에 바짝 긴장한 우리는 피디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피디님은 스태프분들로부터 불투명한 상자를 건네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설명을 이으셨다.

“경기는 팀별로 진행되며, 룰은 간단합니다. 수비팀이 먼저 펜션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숨긴 다음, 그 물건에 이름표를 부착하고 나오시면 됩니다.”

물건은 펜션 내에 있는 것 중 아무거나 자유롭게 지정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물건에 부착하는 이름표의 크기가 천차만별이라는 점이었다. 손톱 크기만 한 사이즈부터 전지까지 다양했다. 이름을 적을 종이 크기는 뽑기 상자에서 랜덤으로 뽑는데…….

“전지를 어떻게 숨기라고!”

여기저기서 당연한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런 복불복 게임에서 항의한다고 룰이 바뀌는 경우는 못 본 것 같아…….

“잘 뽑으시면 되겠죠?”

결국 물건을 고르고 이름표를 부착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이름표를 들키지 않게 잘 숨길만 한 물건을 찾느냐가 관건인 게임 같았다.

“수비팀, 제한 시간은 10분입니다. 10분이 지나면 제 자리에 이름표를 떨군 채 나오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첫 경기는 공격팀인 게 유리할 것 같았다. 수비팀 물건 찾으면서 내 물건 숨길만 한 장소들도 겸사겸사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 공격팀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말에 잠시 생각하던 유찬 형이 “그러네.”하고 맞장구쳤다. 하지만 기장 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첫 게임은 공격팀을 노릴 게 분명했다.

“이럴 땐 역시 가위바위보인가.”

전재규 선배님이 양손을 허공에 털면서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나오기가 무섭게 뒷덜미를 잡혀서 끌려 들어갔다. 가위바위보 제일 못하는 사람이 어딜 대표로 나가냐면서 한참 실랑이한 뒤에 강도준 선배님이 대표로 뽑혔다.

우리 쪽은 유찬 형! 아까도 이겼으니까 이번에도 이기겠지?

“하온아, 네가 할래?”

“아뇨. 형이 해주세요.”

“……또?”

“아까는 제가 없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럼 저는 처음인데요!”

“……그것도 그렇지?”

“화이팅!”

“어, 어! 파이팅!”

내 말에 제대로 감긴 유찬 형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러다 중간쯤 서서 뒤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쥔 뒤 머리 높이까지 올려 파이팅 넘치게 마구 흔들었다.

“유찬 형, 뽜이팅! 이겨요!”

“어? 어! 맡겨둬!”

있지도 않은 소매를 걷어 올리는 듯한 행동을 취한 유찬 형이 이내 강도준 선배님과 마주 섰다. 강도준 선배님은 시합 전 하얀 가루를 바르는 운동선수처럼 손을 비비 꼬아대면서 하늘이 점지해주는 대로 내겠다고 했다.

“좋았어. 가위다. 나는 가위를 낼 거야, 유찬아.”

“그러면 저는 주먹 낼게요.”

강도준 선배님의 심리전에 유찬 형도 심리전으로 응수했다.

“어허, 그럴 땐 보를 낸다고 해야지.”

“아이돌은 주먹이죠!”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하듯 대화를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가위바위보가 으레 그렇듯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던 탐색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기장 팀의 승리. 우리는 시무룩하게 돌아오는 유찬 형에게로 달려가 잘했다고 마구 칭찬해줬다.

기장 팀이 예상대로 공격팀을 고른 덕에, 우리가 먼저 들어가서 물건을 숨겨야만 했다. 10분의 시간은 그리 넉넉한 게 아니라서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수비팀은 펜션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우리는 피디님을 따라서 펜션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에 서서 신발을 벗자마자 피디님이 들고 있는 뽑기 통에서 이름표를 뽑은 다음, 그걸 숨기러 들어가면 된다.

“카운트다운 기준은, 첫 번째 팀원이 뽑는 순간부터 10분입니다.”

“나 먼저!”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면서 나섰다. 우리 중 이런 순서에 연연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기에 다들 이서호에게 첫 번째 순서를 양보했다. 몇 번째로 뽑는지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억! 이게 뭐야!”

피디님 옆에 서 계시던 제작진이 이서호를 말아도 될 법한 크기의 종이를 건네주셨다. 작은 네임펜을 손에 쥔 채 대형 붓글씨를 쓰듯 큼지막하게 팔을 돌리는 내내, 이서호는 계속 허무한 신음을 흘렸다.

“이거 숨길 수 있는 건가…….”

“……일단 서두르자.”

유찬 형은 학 종이 크기의 종이를 뽑아서 그나마 한시름 놓았고,

“어.”

강현 형은 손톱만 한 종이를 받아서 우리 모두 환호했다. 이름 쓰기도 어려워 보이는 크기의 작은 종이라 대놓고 보이는 곳에 두지 않는 이상 찾기 힘들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 손가락에 걸리는 여러 장의 종이 중에 한 장을 뽑아 올렸다. A2라고 쓰여 있어서 처음엔 어느 정도 크기인지 짐작이 잘 안 됐는데, 받고 나니 참담했다. A4 용지의 여덟 배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종이였다.

“…….”

내 이름을 적을 거대한 종이 끝을 손으로 쥐고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이서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동질감을 느끼면서 서로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다가 동시에 한숨 쉬었다.

이걸 숨길만 한 곳이…….

침대 시트 밑 정도려나. 무조건 뒤집어 볼 것 같은데……. 커다란 종이를 붙일 용도로 제공 받은 청테이프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폭 나왔다.

“종이는 접어도 되나요?”

“접는 건 되지만 찢으면 안 됩니다.”

“아하, 네. 고맙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에 일단 내 이름을 적은 뒤 펜션 내부를 휙 둘러봤다. 우리가 종이를 숨길 수 있는 공간은 1층으로 한정되었으니 이 중에 골라야 하는데…….

이 거대한 종이를 숨길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마땅한 물건이 없어 보였다. 침대 밑에 대충이라도 숨겨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제일 큰 방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망했다…….”

이제 보니 침대 프레임이 바닥과 거의 붙어 있는 구조라, 프레임을 아예 들어 올리지 않는 이상 저 밑에 종이를 숨기긴 어려워 보였다. 그때,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이 울상이 된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흔들거리는 커튼을 보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피디님!”

“네, 하온 씨.”

“펜션에 이름표 붙이면 제 물건은 펜션이 되는 건가요?”

피디님은 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시다가 그렇다고 대답해주셨다. 좋아. 그렇다면 최적의 장소가 있지.

점 찍어 둔 장소로 향하다가 방에서 이서호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을 들여다보니 이서호가 침대 시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프레임을 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설마 프레임 밑에 붙이려고?

“진하온, 나 좀 도와줘!”

“뭐, 뭘 도와주면 되는데?”

“이거 들 거야.”

“……이거?”

“어.”

이서호가 침대를 가리키면서 짓궂게 웃었다. 아주 완벽하다면서 자화자찬하는 이서호의 콧대가 높게 솟아올랐다.

나무 프레임으로 만든 침대는 보기에도 무척 무거워 보였는데, 역시나 나와 이서호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목이 터지라고 형들을 부르자, 우리의 목소리를 들은 두 형이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왔다.

“야, 나랑 형들이 이거 들 테니까 너는 잽싸게 붙이고 나와. 알았지?”

“형이 붙이는 게 좋지 않아?”

“너보단 내가 힘 쎔.”

“무시하지 마라. 나도 힘세거든?”

이서호는 눈짓으로 조용히 내 손목과 제 손목을 비교하듯 번갈아 보며 코웃음 쳤다. 아무 말 안 했는데도 기분 나빠!

“하온이가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서호가 들어가면 힘 빠질 것 같아서.”

유찬 형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이서호가 “아! 형 너무하네!”하고 빼액 고함을 질렀다. 그러면서 내게 종이를 넘겨줘서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괜히 힘 빼는 것보다는 낫겠지.

세 사람이 동시에 침대를 들어 올린 순간, 나는 빠릿빠릿하게 그 밑으로 기어들어 가 침대 프레임 밑에 이서호의 이름표를 붙였다. 청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서 떨어지지 않게끔 확실하게 고정한 뒤 다시 기어 나왔다.

침대 밑에 들어갔다 나오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어깨를 툭툭 털고 있으니, 유찬 형이 합세해 내 등을 털어줬다.

“형들은 다 숨겼어요?”

“응. 숨겼지.”

“나도 숨겼어.”

오오. 어디인지 궁금해!

“나는 화분 파서 그 속에 숨겨놨어.”

유찬 형은 종이가 작아서 티 안 나게 잘 숨겼다면서 내게 숨긴 위치를 가르쳐 줬다. 확실히 완벽하지만…….

자세히 보면 파낸 듯한 흔적이 있어서 가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옆에 있는 화분에서 돌멩이 몇 개를 주워서 위에 올려놨다.

“오! 완벽해졌어.”

“헤헤.”

강현 형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난간 사이의 틈새에 숨겼는데, 여기 있다고 가르쳐줘도 안 보일 정도라서 철두철미함에 엄지를 척 치켜세워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온이는 어디에다가 숨기려고?”

강현 형의 물음에 나는 씨익 웃으면서 부엌의 창문을 가리켰다.

“저는 펜션에 이름 붙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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