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정이한은 율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일정한 박자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리고…….
“네가 너무 조아, 어또케 어또케~”
“아아아악!”
굵직한 저음으로 부르는 애교 섞인 노랫가락에 촬영장이 뒤집혔다. 혀짧은 소리에, 깜찍한 유치원생이나 할 법한 율동까지 곁들이는 걸 보고 있자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정이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버렸다. 다음 가사를 부르면서 정이한은 내 쪽으로 상체를 튼 다음 내게 사랑의 총을 쏘면서 양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모습이 꼭 아직 윙크를 못 배운 어린아이 같았다.
“네가 너무 예뻐, 어또케 어또케~”
“으어억! 억! 아악!”
선배님들은 닭살이 돋은 두 팔을 문지르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서로의 등을 두들기기도 하고, 팔을 퍽퍽 때리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조금 진심이 담긴 듯한 투닥거림으로 번져가는데도…….
정이한은 꿋꿋했다.
결국 마지막 가사인 “좋다구! 좋다구!”까지 앙큼하게 도리질 치며 소화해냈다. 와, 이거 진짜 충격적이야…….
어또케송을 끝낸 정이한은 입술을 말고 잠깐 먼 산을 응시하다가 쪼그려 앉아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드러난 귀와 목이 아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열정적인 애교 잘 봤습니다. 캬햐햐!”
“와, 진짜 제대로다.”
“이건 진짜 인정할 수밖에 없네.”
기꺼이 망가지길 자처한 정이한의 용기가 대단해서 나도 열렬히 박수를 보내줬다. 다들 신나게 웃는 와중 이서호 혼자만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할 정도로 가고 싶은 거야……?”
그 반응이 웃겨서 허파에 바람든 것마냥 실실 웃음이 새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강현 형은 도저히 못 이기겠다면서 포기했고, 이서호도 그냥 이한 형 데려가요, 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기대감을 잔뜩 품은 정이한의 시선이 내게 똑바로 닿았다. 안 데려오면 원한이라도 생길 것 같은 간절함에 떠밀리듯 “이한 형, 오세요!”하고 허겁지겁 말했다.
이렇게 7대3의 구도로 다음 미션을 진행하게 되었다. 우리가 밥 먹는 사이에 미리 세팅을 해뒀는지, 숙소 앞 공터에 라인기로 그린 듯한 두 개의 사각형이 나란히 있었다. 다음 경기는 아무래도 피구나 족구인 것 같았다.
인원수 차이가 있어서 이번 미션 게임도 기장 팀이 유리해 보였다. 디아스 팀의 미래가 보여서 애잔한 눈길로 벌칙을 수행할 형들을 봤다. 계곡물 되게 차가울 텐데 괜찮으려나.
“하온아.”
정이한이 방긋방긋 웃으며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금방 원 상태로 돌아온 걸 보니 아까 고민했던 건 디아스를 배신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던 모양이다. 쪼그려 있던 정이한이 귀엽게 느껴져서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동생이 형 머리를 쓰다듬으면 좀 그렇겠지. 내심 형으로 안 치고 있어서 무의식중에 자꾸 이런 행동이 나오는 건가?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슬그머니 팔을 내리려는데 정이한이 내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응?”
“어? 쓰다듬으려던 거 아니었어?”
“……해줘요?”
“응.”
본인이 원하면 해줘도 되지 않나? 나는 정이한의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겨 붙어 사락사락 간질이는 감각이 의외로 기분 좋았다.
“형, 머리카락 부드럽다.”
“너도 부드러워.”
“그래요?”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만지작거려 보는데, 커다란 손이 내 정수리를 덮어왔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슬슬 문지른다.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이한이, 막내 사랑이 엄청 나구나?”
전동진 선배님이 내가 부럽다는 듯한 투로 말을 걸어왔다. 블루스톤 형들은 자신을 심부름 로봇 정도로 취급한다며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긴 하셨지만, 멤버들을 말할 때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져서 전동진 선배님이 멤버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 게임은 피구입니다!”
피디님의 휘슬 소리와 함께 발밑으로 통통 튀는 빨간색 피구 공이 굴러왔다. 피구 공을 주워든 유찬 형이 공을 꾹꾹 눌러 보면서 내려봤다. 그러더니 강현 형에게 공을 넘겼는데, 강현 형도 공을 꾹꾹 눌러보고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뭘 확인하는 거지?
형들을 관찰하는 사이 봉재범 선배님이 너그러운 어조로 제안해왔다.
“우리가 인원 많으니까 선제권은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듣다가 멈칫했다. 기장 팀 선배님들이 그게 좋겠다면서 한 마디씩 보탰는데, 다들 뭔가 어마어마한 양보를 하는 것처럼 굴어서 웃음이 터졌다. 이서호가 뭔가 이상하다면서 어리둥절해 해서 더 웃겼다.
본 게임만큼이나 치열한 가위바위보 끝에, 유찬 형이 이겼다. 그러자 다들 자신들이 양보해 준 거라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유찬 형이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해오자 다들 큰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경기.
양쪽 끝에 강현 형과 유찬 형이 서고, 이서호가 중심에 선 채 우리를 봤다. 디아스 팀 내에서 공이 도는 동안 우리는 양치기 개에게 몰리는 양들처럼 하얀 네모 칸 안쪽에서 우글우글 몰려다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추덕수 선배님은 뛰어다닐 때마다 와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형! 시끄러워요! 아악! 악! 빨리 가요! 악!”
빽 소리 지르던 강도준 선배님은 공이 강현 형 쪽으로 가자마자 질겁했다. 겁먹은 추덕수 선배님이 강도준 선배님을 붙잡고 벌벌 떠는 사이 쒜에엑,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팡!
피구 공이 내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도준 선배님이 등을 부여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선배님을 맞추고 튕겨 나와 데굴데굴 굴러온 공을 다시 집어 든 강현 형이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별로 안 아플 텐데…….”
그러면서 한 손으로 공을 움켜쥐고 우리를 보는데……. 사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음산하게 느껴졌다. 이거 나 잘못 생각한 거 아닐까? 인원수가 많은 팀이 이기는 게 아니라 강현 형이 있는 팀이 이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기장 팀이 우수수 탈락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 쪽 인원은 나와 정이한, 그리고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추덕수 선배님만 남아 있었다.
반면 디아스 팀은 전원 생존. 공을 잡아야 반격할 수 있을 텐데. 정이한이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 탓에 나는 공 구경도 못 하고 있었다.
“이한 형.”
“응?”
정이한이 나를 돌아보면서 웃은 순간 강현 형 손을 떠난 공이 날아왔다. 나는 정이한을 밀치고 앞으로 달려나가 두 손으로 공을 받아 들었다.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의 충격이 찾아왔다.
놀라서 남은 체력을 확인했는데 무려 10%나 쑥 빠져있었다. 공 잡는 거 조심해야겠어. 피구공 가지고 이런 위력이라니…….
“헉, 하온아!”
큰 소리에 놀라 나를 부르는 정이한에게, 품에 고스란히 받아 안은 공을 자랑스럽게 내밀어 보였다.
“잡았어요.”
“어, 어어…….”
멀뚱멀뚱 보고 있는 정이한에게 다시 공을 내밀었다. 한발 늦게 공을 받아든 정이한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봤다.
“형이 던져요.”
나는 공을 잘 못 던져서 위력이 약할 게 뻔했다. 나보다는 정이한이 잘하겠지. 정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얀 선 앞까지 가서 먹잇감을 살피듯 멤버들을 봤다. 중앙에 버티고 서 있는 강현 형 뒤로, 유찬 형과 이서호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정이한은 힘껏 던질 것처럼 할리우드 액션을 취하다가 선회하여 왼쪽 바깥에 있는 봉재범 선배님께 패스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쐐애액, 하는 소리에 놀란 봉재범 선배님이 공을 피해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을 열심히 쫓아가 집어 든 선배님은 땀이 범벅인 채로 돌아왔다.
“후, 이한아……. 패스할 땐 살살 부탁할게.”
“네…….”
정이한이 머쓱하게 대답하자 봉재범 선배님이 공을 들고 이리저리 와다다다 뛰어다녔다. 하지만 강현 형만 방향을 틀었을 뿐, 나머지 두 사람은 무척 안전해 보였다.
“형! 들고 뛰어다니지만 말고 공을 돌려요!”
전동진 선배님이 반대쪽에서 크게 소리쳤다.
“어! 패스할게!”
봉재범 선배님이 크게 외치면서 공을 던졌는데, 패스가 아니었다. 강현 형의 방심을 유도한 모양이었는데 위력이 약해서 형이 재빠르게 잡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 쪽으로 공이 날아왔다. 나와는 거리가 먼 쪽으로 날아간 공은 정확하게 추덕수 선배님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아아아악!”
추덕수 선배님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빠르게 날아간 공이 선배님의 머리를 맞고 튕겨 올랐다. 그 반동에 뒤로 벌러덩 넘어진 추덕수 선배님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서 끙끙대셨다.
“헉, 괜찮으세요?”
강현 형이 놀라서 묻자 추덕수 선배님이 허공으로 팔을 들어 자긴 틀렸다는 듯, 까딱까딱 흔들어 보이셨다. 그사이 나는 공이 다시 넘어갈까 봐 잽싸게 뛰어가서 굴러가는 공을 주워들었다. 공이 넘어오길 기다리던 이서호가 아쉬워하면서 혀를 찼다.
우리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기에 나는 공을 줍자마자 이서호에게 던져서 맞춰버렸다. 이 기세를 몰아 이서호의 팔을 맞고 돌아온 공을 다시 유찬 형 쪽으로 던졌는데, 유찬 형이 내가 던진 공을 너끈히 받아내 버렸다.
“하온아, 미안.”
형은 내 쪽으로 냅다 공을 집어 던졌다. 공을 받아 내려고 팔을 뻗었는데, 하필이면 어깨 쪽으로 날아와 정확히 내 어깨를 가격하고 튕겨 올랐다.
안돼! 아웃될 땐 되더라도 공은 지켜내자고 생각하며 뛰어오른 순간, 누군가와 부딪혀 뒤로 벌러덩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보니 정이한이 내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이한도 공만 보고 뛰다가 나와 부딪힌 모양이었다.
문제는 정확히 우리가 부딪힌 타이밍에 떠오른 공이, 내 어깨를 잡은 정이한의 팔을 스치고 옆으로 튕겨 나가듯이 떨어졌다는 거다. 그 바람에 우리는 동시에 아웃되었고, 우리 쪽 생존자는 순식간에 추덕수 선배님 한 명만 남았다.
아, 이건 좀…….
외야로 나가서 어떻게든 강현 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추덕수 선배님이 아웃 되는 게 더 빨랐다. 7대 3의 피구 경기에서 디아스 팀은 단 한 명의 아웃으로 깔끔하게 승리했다.
“하온아! 이쪽으로 와!”
유찬 형이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