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초록색 깃발은 모두 8개였다. 그 뒤로 새로운 깃발은 하나도 찾지 못했지만, 선배님들은 다 해서 추가로 하나의 깃발만 찾았기에 나는 거의 영웅 취급을 받았다.
기장 팀 전원이 펜션 앞마당에 모였을 즈음에도, 디아스 팀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스코어를 알 수 없어서 서둘러 미션에 도전했다.
8개의 깃발 중 꽝 2개를 제외한 6개의 깃발로 도전한 결과, 전재규, 전동진 선배님과 나까지 총 네 명이 미션을 통과했다.
우리가 미션에 임하는 도중 추가로 깃발을 회수해 온 디아스 팀은 4개의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기장 팀 인원이 한 명씩 통과할 때마다 애타는 탄성이 들렸다.
우리의 도전이 끝난 직후 디아스 팀의 도전이 시작됐다. 4개의 깃발 중 꽝은 하나였지만, 미션 운이 따라주지 않아 통과한 사람은 유찬 형뿐이었다. 이렇게 또 기장 팀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새로운 팀원 섭외는 점심 식사 종료 후 진행하겠다는 피디님의 말에, 통과한 사람들은 곧바로 배고픔에 울부짖는 탈락자들을 놀려대며 바비큐장으로 향했다. 시무룩한 얼굴의 정이한이 아련한 눈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신경 쓰이네…….
“탈락한 분들 식사 받아 가세요!”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가 쫑긋거렸다. 아예 굶기는 건 아닌가 봐! 한시름 놓는데 컵라면 크기가 너무 작다는 추덕수 선배님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이 조금 주어졌다. 남은 체력이 40%뿐이었기에 주저 없이 기장 팀을 버리고 디아스 팀 멤버들 사이에 꼼지락거리면서 끼어들었다. 그래도 꽤 뛰어다닌 것 치고는 남은 체력이 든든했다.
체력 감소 폭이 이대로 유지된다면 물약 하나 정도만 더 먹어도 녹화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게임이 너무 재밌으니까!
“하온이가 부족해…….”
유찬 형이 나를 끌어안으면서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형을 토닥거려주느라 바쁘다는 듯 옆에 착 달라붙어 체력 회복을 도모하고 있는데, 어쩐 일로 정이한이 안 보였다. 이럴 때 항상 끼어드는데 왜 없지?
정이한은 한쪽 벽에 붙어서 꽤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두 다리를 굽혀 가슴에 붙이고 양팔로 끌어안은 채 무릎 사이만 노려보는 중이었다.
“유찬 형.”
“응?”
“이한 형, 왜 저러고 있어요?”
“글쎄?”
정이한과 나를 번갈아 보던 유찬 형이 갸웃거리면서 어깨를 기울였다.
“확실히 이상하네. 하온이가 여기 있는데 이한이가 왜 저기 혼자 있지?”
잠시 고민하던 유찬 형의 얼굴에 곧 장난기가 떠오르더니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유찬 형은 정이한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는 조금 큰 목소리로 혼잣말인 것처럼 말했다.
“아~ 하온이 독점하니까 너무 좋다아~”
“어휴, 저 형 또 저런다.”
이서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정이한은 여전히 잠잠했다. 뭔가 고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곡 아이디어라도 떠올랐나? 뭔가 됐던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유찬 형도 영 반응이 없자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이곤 장난을 관뒀다.
***
다시 시작된 촬영, 디아스 팀에서 데려올 멤버를 논의하기 위해 둥글게 둥글게 모여들었을 때였다.
“……선배님들.”
정이한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정이한을 제외한 모든 출연진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정이한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이리저리 배회하는 동공이 당황한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어~ 이한이 왜?”
봉재범 선배님이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하자, 그에 용기를 얻은 듯 정이한의 입술이 벌어졌다.
“저를 데려가 주신다면…….”
“이한 형? 지금 디아스를 배신하려는 거야?”
정이한이 운을 떼자마자 이서호가 서슬 퍼런 눈을 뜨며 끼어들었다. 눈꺼풀을 내리깐 정이한의 목소리가 더듬더듬 기어들어 갔다.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긴! 이건 배신이지! 와, 이렇게 우릴 버린다고?”
입술이 댓 발 나온 이서호가 툴툴거리면서 정이한의 등을 밀었다.
“가! 가버렷!”
“미, 미안.”
이서호에게 사과하면서도 정이한은 마음을 굳힌 듯 꿋꿋하게 기장 팀 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제일 빠르게 반응한 건 전재규 선배님이셨다. 선배님은 손바닥을 넓게 펼쳐 정면을 향해 밀어내는 동작을 취하며 굵고 짧게 외치셨다.
“동작 그만! 우리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어? 아…….”
제 자리에서 멈춰선 정이한은 기장 팀과 디아스 팀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게 되었다. 불안을 담은 눈동자가 계속 배회하다가 나와 딱 마주쳤다. 일렁거리는 눈을 보니까 꼭 내가 주워와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마구 치솟았다.
그때였다.
“선배님들.”
세상 싹싹해 보이는 미소를 장착한 유찬 형이 저벅저벅 걸어 나와 정이한의 어깨를 짚더니,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가 더 쓸모 있을 겁니다.”
“유찬 형까지!”
거기에 가세해 강현 형까지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이서호가 “허, 참. 허어, 참나!”하는 소리를 내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기장 팀을 보면서 외쳤다.
“형아들! 제가 제일 쓸모 있어요! 일단 귀엽잖아요. 그렇죠?”
이서호가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면서 귀여운 척 애교를 떨었다.
“이서호 탈락!”
강도준 선배님이 손날을 세워 허공을 내리그으며 가차 없이 외쳤다.
“아! 왜요~”
이서호가 귀여움으로 무장한 채 칭얼거렸지만, 선배님들께는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두의 외면을 받은 이서호는 급기야 무릎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우는 소리를 냈다. 그에 사람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막내야.”
“넵.”
봉재범 선배님이 한쪽 팔을 등허리에 대고, 다른 손으로는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는 척하면서 거만하게 말했다.
“제일 쓸모 있는 놈으로 하나 주워 오너라.”
“오, 좋다. 하온이가 데려오자.”
“……제가요?”
양쪽 팀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특히 디아스 팀의 눈빛들은 ‘나를 데려가라.’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들 가라앉는 배에 올라타는 취미는 없는 모양이다. 디아스 팀이 질 것 같으니 너도나도 탈출하려는 거 보니.
좋은 자세라고 해야 할지, 그룹 버리고 도망치는 거냐고 화를 내야 할지 알쏭달쏭했다. 일단 나부터도 배신하려고 했으니 할 말 없고 말이지.
어쨌든,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으니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정이한이나 데리고 와야겠다. 제일 먼저 오고 싶다고 피력하기도 했고, 표정이 절실해 보이거든.
“그러면…….”
곧바로 발표하려는데 추덕수 선배님께 태클이 걸렸다.
“잠깐! 자암깐 그냥 뽑으면 재미없지. 우리 막내가 아직 방송을 모르네~”
“맞아, 이럴 땐 형들한테 재롱부려보라고 요구해도 돼.”
“그렇지! 지금 아니면 언제 시켜보겠어? 평소에 시키고 싶었던 거 시켜봐.”
기장 팀 선배님들이 쉽게 갈 생각 말라며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딱히 형들의 재롱을 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추덕수 선배님의 조언대로 방송을 위해 뭔가를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 멤버들 분량 확보할 수 있을 만한 게…….
장기자랑은 뭔가 좀 애매해 보이고, 시합 같은 것도 재미있을지 모르겠고, 애교는……. 나는 보기 싫지만 팬분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팬분들을 위해서 애교로 해야겠다.
“그러면 형들 애교 보고 결정할게요!”
내가 선언하자 기장 팀 선배님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갈렸다. 물개박수를 치면서 좋아하는 분과 남자의 애교 따위 관심 없다면서 진저리치는 분들로.
반면 디아스 팀 멤버들은 강현 형과 정이한만 심각하게 굳었고, 유찬 형과 이서호는 ‘애교쯤이야.’ 하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강현 형과 눈이 마주쳤는데, 아주 중요한 사실이 번뜩 떠올라서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뿌잉뿌잉 금지!”
방송 분량 확보하겠다고 내 흑역사를 또 끄집어내게 둘 순 없지.
“응? 그건 왜 금지야?”
전동진 선배님이 궁금해하면서 나를 봤다. 어쩐지 느낌이 싸해서 우물쭈물하자 기장팀 선배님들은 뭔가를 눈치챈 듯 심술궂게 웃으면서 집요하게 뿌잉뿌잉이 왜 금지인지 물었다.
“그, 저희 그룹 흑역사예요…….”
힘겹게 대답하자 이서호가 발표하는 초등학생처럼 “진하온 버전 애교요!”하고 아주 큰 목소리로 또랑또랑 말했다. 저 녀석……!
이서호의 말을 들은 선배님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내 뿌잉뿌잉을 보고 싶다면서 몰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버팅겨봤지만, 결국엔 울며 겨자 먹기로 소심하게 뿌잉뿌잉을 해야만 했다. 똥 피하려다가 빅 똥을 밟은 느낌이야…….
이렇게 흑역사를 셀프 갱신한 나는 우울하게 멤버들의 애교를 지켜봤다. 첫 타자로 나선 유찬 형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리면서 ‘유차니는 기여웡!’하고 혀짧은 소리를 냈다.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졌다.
오, 유찬 형!
그냥 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애교를 골랐을 뿐인데, 다 같이 흑역사를 적립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렇게 되면 내 뿌잉뿌잉이 희석되지 않을까? 갑자기 형들의 애교에 기대심이 차올랐다.
그때였다. 딱딱한 얼굴로 굳어 있던 정이한이 슬그머니 손을 올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로 선 정이한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뱉으면서 호흡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고개를 돌린 뒤 아르르, 푸르르, 하면서 얼굴 근육과 입술을 풀었다. 이쯤 되면 뭘 하려는 건지 진심 궁금해지는데?
기대감을 잔뜩 품고 정이한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새로운 흑역사 탄생의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