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95화 (95/320)

95.

피디님의 탈락 선언과 동시에 현장은 웃느라 초토화가 되어 버렸다. 박장대소하는 출연진들 사이에서 나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모를 수도 있지.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꽤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그나마 빨리 진정된 전동진 선배님이 콧등을 손으로 훔치면서 나를 봤다. 하지만 진정한 것이 무색하게, 나와 눈 마주치자마자 다시 푸하핳!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온, 크흑, 흡, 표정이, 으하핳하히하히힣!”

웃다가 뒤로 넘어갈 기세인 전동진 선배님 덕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나는 망연자실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기장팀 선배님들에게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타이밍 좋게 계곡 쪽으로 빠지는 숲길 쪽에서 달려오는 우리 멤버들이 보였다.

전리품처럼 손에 꼭 쥔 하늘색 깃발을 흔들면서 뛰어오는 멤버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손을 마구마구 흔들었다. 역시 우리 형들이 최고지. 그런데 강현 형이 안 보이네?

가장 선두에서 달려온 유찬 형은 주변 분위기를 훑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시치미를 뚝 뗀 채 눈으로 강현 형을 찾으면서 대답했다.

“별일 없었어요…….”

“그래? 그런데 하온이 얼굴 왜 이렇게 빨개? 많이 뛰었어?”

유찬 형이 열 식혀 주겠다면서 내 오른쪽 뺨에 손바닥을 대줬는데, 엄청 서늘해서 깜짝 놀랐다.

“시원하지? 계곡물에 손 담갔거든.”

“시원해요.”

내 생각보다 얼굴에 열이 많이 올라 있던 모양이었다. 다들 나 보고 웃어젖히면서 몰아가려고 난린데, 안 부끄러운 게 이상하지…….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뺨의 열기를 식히고 있을 때였다.

“으앗!”

갑자기 목덜미에서 찬기가 올라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목덜미를 문지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정이한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형도 계곡에 손 담갔어요? 왜 그렇게 차요?”

“응. 더러워져서 씻고 왔거든.”

“……아.”

“시원하지?”

“깜짝 놀랐어요.”

짓궂은 장난을 친 것과 달리 정이한은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뭐라고 말도 못 하겠네. 형들한테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숙소로 돌아온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역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었다.

“으하하핳! 진하온! 스불재 몰라?”

깃발을 빼앗아 간 전동진 선배님께 달려들었던 이서호가 날 손가락질하면서 신나게 비웃었다. 휴대폰을 쥐고 사는 이서호는 당연히 알겠지. 기장팀 선배님들도 다 안다는 건 조금 의외지만…….

나만 모르냐. 정말 나만 몰라?

“응? 스불재?”

유찬 형이 궁금해하면서 묻길래, 내친김에 나는 두 형에게 스불재 아냐고 물었다. 형들도 인터넷 자주 안 하니까 모를지도 몰라!

“어, 알지. 그거 노래 가사도 있잖아.”

“응. 나도 알아. 스스로 불러온 재앙.”

나 빼고 모두가 정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제야 스불재의 의미가 뭔지 알았다. 훌륭한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는 신조어 공부도 해야 하는 거였나…….

그나저나 뜻을 알고 보니 전동진 선배님의 힌트가 도무지 이해 안 됐다. 자기 가슴에 총 쏘고 쓰러지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스불재가 되는 건데? 전동진 선배님의 괴상한 팬터마임과 스불재의 뜻을 비교해 보다가 의미 없는 짓인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나저나, 강현 형은 어디 갔어요?”

“모르겠어. 갑자기 없어졌던데.”

정이한이 갸웃거리면서 대답하자 유찬 형이 배턴을 이어받듯 말했다.

“아, 앞장서서 가더니 펜션 입구에서 나한테 깃발 찾은 거 다 넘겨주고 자기는 더 찾아보겠다면서 갔어. 마지막으로 미션 하겠다던데?”

설마 강현 형 나 피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만나면 잔뜩 투덜거려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도망쳐 버리다니!

“근데, 아까 스불재 뜻은 왜 물어본 거야?”

유찬 형의 물음에 이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내가 미션을 어떻게 실패했는지 떠벌렸다. 형들도 나 비웃겠지…….

“그랬어? 그럼 하온이 실패한 거야?”

“……네.”

유찬 형은 웃긴 것보다도 내가 미션 실패했다는 것에 더 안도하는 눈치였다.

“하온이는 평소에 휴대폰 잘 안 보니까, 모를 수 있지.”

정이한이 빙긋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 아늑하다. 역시 내가 실수해도 너그럽게 봐주는 건 우리 형들밖에 없어! 신나게 날 놀리려던 이서호를 흘겨보자, 이서호는 형들의 반응이 재미없다면서 칫, 혀를 차곤 피디님께 하늘색 깃발을 내밀었다. “이서호 씨, 미션은 부르마블입니다.”

동시에 제작진이 부지런히 움직이더니, 이번에는 부르마블 게임을 세팅했다.

“……네? 이거 농담 아니고 진짜예요?”

기장팀 선배님들이 젠가보다 더 하다면서 신나게 웃어젖혔다.

“부르마블? 부르마블이라고……?”

넋 나간 듯이 중얼거리는 이서호의 등을 팡팡 두들기면서 생글생글 웃어줬다.

“서호 형, 힘내.”

“…….”

이서호의 동공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잘게 흔들리며 녹색의 게임판을 응시했다. 그대로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허공에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거 찐이야? 몰카 아니고?”

“이서호 씨, 부르마블 시작해 주세요.”

“포기하면 안 돼요?”

“안 됩니다.”

피디님이 쐐기를 박자 이서호가 터덜터덜 테이블 앞으로 가서 주사위를 주워들었다. 주사위를 던지면서도 “이게 리얼이라니…….”라는 말 따위를 중얼거렸다.

그 허탈한 모습이 웃겨서 낄낄거리면서 웃는데, 큰 목소리로 호쾌하게 웃던 전재규 선배님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희들 괜히 같은 그룹이 아니네. 아까 하온이 스불재 실패했을 때 딱 서호 같았거든.”

내가 이서호랑 비슷했다고? 이서호는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로 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일, 이, 삼……. 땅 살게요…….”

***

디아스 팀의 미션 도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두 번의 시도가 무색하게 모두 꽝을 뽑은 정이한의 뒤를 이어, 유찬 형이 하늘색 깃발 세 개 중 첫 번째 깃발을 내밀었을 때였다.

“하온아.”

“넵.”

강도준 선배님이 나를 살살 불러냈다. 아무 생각 없이 정이한 옆에 서 있던 나는 그제야 기장팀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후다닥 뛰어가려는데 옷이 어딘가에 걸린 것처럼 쭉 늘어나며 상체가 붙들렸다.

“이한 형?”

“……아, 미안.”

정이한이 습관처럼 내 조끼를 꽉 움켜쥐고 있던 탓이었다. 손에 힘을 풀면서 희미하게 웃는데 왜 저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이따 봐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도준 선배님 옆으로 가 서며 재차 뒤를 돌아봤더니 시무룩한 정이한이 날 보고 있다가 화들짝 표정을 바꿔 웃었다.

강도준 선배님은 내가 합류한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운을 뗐다.

“서호는 기적적인 대 역전이 없는 한 질 것 같거든? 주사위 운이 안 좋아.”

“아아악! 서울! 아악! 면제권 있었는데! 왜 로마에 썼어!”

때마침 들려온 이서호의 절규가 강도준 선배님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해적 룰렛 게임에 도전 중인 유찬 형이 칼을 뽑자, 해적이 뿅 떠오르면서 피디님의 “탈락!” 멘트가 상큼하게 울렸다. 우리 진짜 게임 못 한다.

“일단 우리는 깃발 다 썼으니까 게임 종료 20분 전까지 깃발 더 찾아서 모이자.”

“네.”

부르마블처럼 오래 걸리는 게임이 또 나오면 어떡하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시간 안에 미션을 시작하기만 하면 계속할 수 있으니 그럴 경우 남은 깃발을 다른 팀원에게 넘기면 된다고 하셨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깔끔한 작전에, 우리는 곧장 깃발을 찾으러 움직였다.

아까와는 반대쪽 길로 갔는데, 이번에는 계곡을 따라 움직여볼 생각이었다. 촬영 시작하기 전에 멤버들과 함께 산책했던 길을 따라 쭉 걸어가는데, 나무로 가려진 폭포 계단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서 나도 모르게 왁! 하고 소리쳤다.

“가, 강현 형?”

“어, 하온아.”

무덤덤한 척 대꾸하는 목소리와 달리, 강현 형은 답지 않게 내 시선을 회피하면서 다른 곳을 두리번거렸다. 심지어 “어디 깃발 또 없나.”하고 혼잣말까지 한다. 뺨을 긁적이는 손이 새빨갰다.

“아까 제 깃발 뺏어가서 좋았어요?”

일부러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면서 투덜거리자 형이 헛기침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래도 너 데리고 와야지.”

“알아요. 농담이에요. 형, 빨리 가 봐요. 가서 미션 성공해야죠. 기장 팀은 한 명 통과했어요.

“어, 그래.”

빠르게 펜션을 향하는 강현 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멤버들은 모두 계곡에 손을 씻었다. 그것도 더러워져서. 그런데 강현 형도 계곡물에 손을 씻은 것처럼 빨갰다.

장소가 이쪽이 맞으려나아.

나는 백야 싸비 부분을 흥얼거리면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넓게 펼쳐진 자갈밭에 다다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수색하기 시작했다.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있겠다 싶은 크기의 바위들도 발로 툭툭, 건드려가며 땅을 살폈다.

내가 찾는 건 인위적으로 건드린 흔적이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펴서일까, 얼마 안 가 돌멩이를 쌓아 올린 흔적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커다란 바위 밑, 언뜻 보면 위화감 없이 지나칠 정도였지만…….

“찾았다.”

겹겹이 쌓인 돌멩이를 치우니 땅을 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찬 형이라면 나중에 찾기 쉽게 표식을 만들어 놔야 한다고 말했을 것 같았거든. 자연은 소중하니까.

“미안해요, 형들.”

아니나 다를까, 땅에는 기장 팀의 초록색 깃발이 잔뜩 파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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