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2! 1! 디아스 성공!”
성공을 알리는 봉재범 선배님의 멘트와 함께, 내게 달라붙어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서로에게 무게 중심을 의지하고 있던 이서호와 정이한은 벌러덩 넘어졌고, 그나마 유찬 형은 몇 걸음 뒤로 밀려나는 거로 끝났다. 무게 중심에 서서 엄청난 무게를 버텨낸 강현 형은 힘들었는지 나를 안은 채로 주저앉아 버렸다.
“……큰일 날 뻔했네.”
강현 형이 품 안에 가두고 있던 나를 풀어주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일어난 이서호가 “다음에는 이거 하지 말자. 위험해 보인다.”라면서 나를 봤다. 좋은 생각이야. 뭉친 채로 넘어졌으면 가장 높이 떠 있던 나는 그야말로 대참사에 휘말렸을 것이다.
“조금만 더 매달렸으면 다 같이 넘어질 뻔했어.”
“그럴 것 같아서 바로 풀었지.”
“어쩐지, 이한 형이 내 손을 가차 없이 뿌리치더라니…….”
“미안……. 넘어지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아니야! 잘했어! 내 엉덩이는 멀쩡해!”
“우리 서호가 얌전히만 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
유찬 형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뼈 때리는 말을 하자 이서호가 아하하, 하고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유찬 형도 이내 여러 가지를 고려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미안하긴요. 우리 다 생각 못 한 건데.”
“하온이는 듣고 있지도 않았잖아.”
아, 강현 형. 여기서 이렇게 내 비밀을 밝히다니.
“……기장팀 선배님들 염탐했다니까요.”
“기장팀, 준비! 시! 작!”
기장팀의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에 대화가 뚝 끊겼다. 기장팀까지 성공하면 면적이 더 좁아질 텐데, 어떻게 우리 모두 올라갈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머리 굴릴 필요도 없이, 기마 자세로 승부를 보려고 하던 기장팀이 얼마 못 가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그 때문에 선배님들은 서로의 하체가 부실한 탓이라면서 한참 떠들썩했다.
“아! 이거 보라고요! 평균 연령 21살을 어떻게 이깁니까~”
“말 잘했다! 게다가 체력 좋은 아이돌인데!”
“아이고~ 요즘은 노인공경이 아니라 노인공격이라더니 그 말이 맞네~”
기장팀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나왔다. 예능 초보자인 우리는 적당한 멘트를 치며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서로 시선만 교환하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피디님은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원래 그런 거라면서 해맑게 웃은 뒤 우리에게 말했다.
“몸풀기 게임이어도 보상이 있는 게 좋겠죠? 디아스 팀!”
“넵!”
기합이 바짝 들어간 우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당연히 기장팀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이 팀 컬러 선택권이라는 걸 알자마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색은 아무래도 좋은가 봐.
초록색과 하늘색이 주어졌는데, 우리 데뷔 무대 의상이 하늘색 교복인 만큼 멤버들 모두 만장일치로 하늘색을 골랐다. 그렇게 팀팀이라는 로고가 박힌 조끼를 나눠 받고,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됐다.
첫 번째 게임은 나라 이름 대기. 각 팀이 정한 순서대로 번갈아 가면서 3초 안에 떠오르는 국가명을 대는 건데, 최종 우승자가 속한 팀이 승리하는 형식이었다.
“뇌세포도 다 늙어가는 할배들이랑~ 파릇파릇한 애들이랑 게임이 되겠어?”
“게임이 될진 해보면 알겠죠? 나라 이름 대기, 시! 작!”
하지만 피디님은 가차 없었다. 손가락 모양의 긴 작대기가 곧장 첫 번째 순서인 기장팀 전재규 선배님을 가리켰다.
“어? 미국!”
그리고 우리 쪽의 첫 번째 타자는 이서호.
“중국!”
이어서 떠올리기 쉬운 국가 이름이 하나씩 동난 뒤 내 차례가 되었다.
“호주!”
“호주? 호주 맞습니까?”
왜 저러지? 아직 앞에서 나온 적 없는 나라 맞다. 이런 거에 낚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마치 틀린 것처럼 몰아가는 피디님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네, 호주요!”
“디아스 팀, 진하온 탈락!”
“……네?”
어째서……?
“으햐햐햐햐! 진하온! 호주가 뭐냐? 호주가! 허주겠지!”
허주가 뭔데. 그게 어느 나라 이름인데? 처음 들어 보……. 아, 잠깐. 설마 다른 차원이라 호주가 아니라 허주인 거야? 호주라는 나라 없어? 그래서 피디님이 재확인한 거야?
이서호가 바로 알아듣고 비웃을 정도면, 국가 인지도는 호주랑 비슷한……건가? 그럼 내가 뭐가 돼? 뇌청순 아이돌행 우주선에 올라 순식간에 대기권 뚫게 생겼다. 우겨보자.
“……허주라고 했는데.”
“진하온, 저 헛똑똑이. 헝주라니까!”
네가 허주라며! 발음 좀 똑바로 해줘! 아, 미치겠네. 그냥 입 다물자. 긁어 부스럼만 잔뜩 만든 것 같아…….
“괜찮아, 하온아. 하온이는 나라 이름 몰라도 돼.”
정이한이 나를 위로했지만……. 하나도 위로가 안 돼. 흑.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 채 터벅터벅 뒤로 빠졌다. 내가 첫 번째 탈락이라니…….
그것도 호주가 없어서! 너무 억울한데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더 억울했다. 이번 촬영 끝나면 국가 이름 다른 것들 싹 다 외워둔다, 내가. 혹시 모르니까 수도도 같이 외울 거야. 제발 이 장면이 편집되길 속으로 싹싹 빌면서 괜히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만 툭툭 건드렸다.
“야! 진하온! 뭘 또 그렇게 시무룩해 하냐! 형아가 이겨 줄게!”
이서호가 나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 믿음이라는 게 하나도 안 생기는걸.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이번에는 믿어줄까? 가만 생각해보니 유독 이서호에 대한 내 신뢰도가 바닥인 것 같긴 했다. 그래, 속는 셈 치고 믿어보자.
하지만 바로 다음에 돌아온 본인의 턴에서 이서호는 장렬하게 탈락했다.
“어! 캐, 캐나, 아아악!”
바로 앞에서 캐나다가 나와 버리는 바람에 어리바리하게 굴다가 탈락한 이서호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이것으로 최초 두 명의 탈락자는 모두 디아스가 되었다. 우리 그룹 이미지 괜찮을까…….
이후 게임에서는 꼭 좋은 성적을 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이서호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멋쩍어했다. 저도 바로 떨어진 게 민망하긴 한가 봐. 눈에 보이지 않는 강아지 귀와 꼬리가 추욱 처진 채 안으로 말려들어 가 있을 것만 같아 웃음이 나왔다.
“다음엔 이겨 주나?”
그 말에 이서호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곤 왕방울만 한 눈동자가 눈꺼풀에 묻힐 정도로 휘어지게 눈웃음 지어 보였다.
“어! 나만 믿어!”
귀여운 자식. 우리가 속닥거리는 것과 별개로 게임은 착착 진행됐고 어느새 아나운서 출신의 강도준 선배님과 우리 유찬 형의 1:1 대결 구도가 되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으아, 얘들아, 미안해……!”
유찬 형이 졌다. 강도준 선배님은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라며 환호했다. 그래, 아나운서 아무나 하나? 원래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직업이 아나운서다. 우리 유찬 형 기죽을까 봐 열심히 잘했다고, 이 정도로 버틴 게 어디냐면서 치켜세워줬다.
“윽윽, 하온아…….”
유찬 형이 내게 매달리면서 커다란 몸을 구기다시피 해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제 우리 멤버 한 명을 뺏길 테지만…….
어떤 멤버를 데려갈지 속닥속닥 논의하느라 바쁜 기장팀을 힐끔 봤다. 이게 뭐라고 괜히 입이 바짝 마른다. 역시 강현 형을 데려가겠지?
“자, 우리 정했습니다. 기장팀으로 데려올 새로운 팀원은……!”
기장팀은 예능 베테랑들답게 자체적으로 ‘두구두구두구’하면서 BGM까지 깔았다. 우리의 시선이 전부 발표를 맡은 봉재범 선배님께 쏠렸다.
“진! 하! 온!”
“하온아~ 이리온~”
“커몽커몽!”
“헉!”
“안 돼요!”
정이한이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은 채 절대 안 된다면서 도리질 쳤다. 그럴수록 기장팀 선배님들의 미소가 한층 짓궂게 변해갔다.
“아~ 막내 데려갑니다~”
성큼성큼 우리 쪽으로 다가온 전동진 선배님이 손수 정이한을 떼 내고 나를 질질 끌고 갔다. 어째서 나야? 나라 이름 대기 게임에서도 제일 먼저 탈락했고, 딱 봐도 체력 없어 보이지 않나?
“하온아…….”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봤더니 멤버들이 하나같이 축 처져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비 오는 날 주인을 잃어버리고 거리로 내몰린 어린 강아지들 같았다.
“……형들! 나 다시 데려가야 해요!”
“진하온! 딱 기다려! 다음 판에 무조건 이길 거야!”
“어! 데리러 갈게!”
“하온이…….”
그런 우리 모습이 웃겨 죽겠는지, 기장팀 선배님들이 박장대소했다.
“아니, 너희 무슨, 흐흐, 이산가족도 아니고, 그렇게 절절할 일이야?”
그러고 보니 좀 그랬나? 기운 없어진 형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그만…….
“그런데 선배님들, 왜 저 뽑으신 거예요?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도움이 왜 안 돼? 완전 도움 되지!”
“우리 평균 연령 낮춰줄 젊은 피!”
“이제 우리 기장팀 평균 나이 35살!”
“회춘이다아아!”
그런 하찮은 이유로 나를 형들한테서 떼어 놓다니……. 됐다, 누굴 탓하겠어. 전생과 다른 세계인 만큼, 내 상식과 다른 국가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예상했으면서도 안일했던 내 잘못이다.
내 속마음이야 어쨌든 간에 촬영은 계속됐다. 두 번째 게임은 예상한 대로 체력을 요구하는 게임이었다. 펜션을 기준으로 숲 곳곳에 각각 20개씩 숨겨둔 초록색과 하늘색 깃발 중, 팀 색에 맞는 깃발을 찾아서 마당으로 돌아와 미니 게임을 진행한다.
게임에서 승리하면 통과, 패배하면 다시 깃발을 찾으러 가야 했다. 물론, 깃발 중에는 꽝도 있었다. 그렇게 먼저 팀원 전원이 통과하는 팀이 이기는 스피드 게임이었다.
만약 깃발을 전부 찾았음에도 미니 게임에 져서 통과하지 못했다면, 통과한 팀원의 수로 우열을 가린다고 했다. 무승부가 되면 다음 게임에서 빼앗을 수 있는 팀원의 수가 두 배가 된다고…….
“제한 시간은 두 시간입니다. 두 시간이 끝나면 그 즉시 게임이 종료됩니다. 작전타임 시간은 10분! 10분 뒤에 바로 시작합니다!”
맑은 휘슬 소리와 함께 기장팀 선배님들이 나를 중심으로 빽빽하게 둘러쌌다. 선배님들 중 장신 축에 속하는 분이 없다 보니, 내 머리가 가운데 빼꼼 솟아 있는 꼴이 됐다. 하긴. 멤버들이랑만 붙어 다니다 보니 평소엔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굽이 좀 있는 신발을 신으면 180cm에 가까운 신장이니 나도 작은 편은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실례일지 모르지만, 나를 둘러싼 선배님들이 귀여웠다.
“막내야.”
“네, 선배님.”
“잘 생각해봐.”
뭐를? 나를 올려보며 말씀하시던 봉재범 선배님이 내게 손을 까딱거렸다. 고개를 숙여서 머리를 가까이 가져대자, 선배님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