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91화 (91/320)

91.

그래도 스칼렛 선배님들의 ‘mine’ 패러디로 화제를 모은 덕분에, 오프닝 대기하는 동안 선배님들이 먼저 패러디 영상을 언급하시며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무엇보다 열정적으로 우리 멤버들의 이름을 외워주려고 하셔서 감사했다.

선배님들은 전부 오랫동안 방송계에 적을 두고 있었고,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베테랑들인 만큼 서로서로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함께 촬영하는 예능이 따로 있는 전동진, 전재규 선배님들은 유독 더 친해 보였다.

유찬 형의 고개가 그런 전동진 선배님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는 선망의 빛이 어려 있었다.

“유찬 형, 혹시 블루스톤 팬이었어요?”

“응. 나 완전. 동경하던 선배님들이야…….”

아, 그러고 보니 블루스톤 소속사가 코어구나. 유찬 형이 연습생으로 오래 있었던 대형 소속사이기도 했다. 때마침 유찬 형의 열렬한 시선을 느낀 전동진 선배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능청스럽게 고개를 살살 저으면서 말했다.

“어우, 잘생겼다야. 요즘 시대에 태어났으면 난 절대 데뷔 못 했겠어.”

“헉! 아니에요. 선배님, 너무 멋있으세요!”

“에이, 난 이제 한물갔지. 요즘 우리 옐로들도 나더러 더 늦기 전에 얼른 결혼하라고 한다니까? 언제는 오빠 결혼하지 마요~ 그러더니.”

말은 그렇게 해도 막상 공식으로 연애나 결혼 발표가 뜨면 뒤집히는 게 남돌 팬덤이더라. 애초에 블루스톤이 롱런하는 이유도 스캔들 한번 없이 정상을 지키며 팬덤과 끈끈한 유대감을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팬분들도 막상 결혼한다고 하면 섭섭해하실걸요? 선배님은 영원한 우상이시잖아요!”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유찬 형이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연예계 후배들에게도 분명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어? 선배님 결혼하세요?”

뭘 어디서부터 잘못 들은 건지, 이서호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큰일 날 소리를 했다. 똥그랗게 커진 눈동자에 악의라고는 없었지만, 이 자식이! 그렇게 실례되는 지뢰 발언을 막 던지면 어떡해!

“이서호! 너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선배님, 죄송합니다. 저희 서호가 철이 없어서…….”

유찬 형이 이서호의 뒤통수를 움켜잡아서 억지로 허리를 숙이게 하며 같이 꾸벅꾸벅 사과했다. 혼자 멀뚱히 서 있을 순 없었기에 덩달아 나까지 허리를 접어댔다.

“으하하! 아냐 아냐. 결혼 안 합니다. 저 연애 안 해요. 후배님.”

“……아. 죄송합니닷!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선배님께서는 정말 다행히, 정말 정말 다행히도 기분 나빠 보이지 않으셨다. 호탕하고 호쾌한 성격이신 것 같아서 좀 마음이 놓였다. 이서호 때문에 깜짝 놀랐네, 진짜.

유찬 형은 다시금 선배님께 사과한 뒤 이서호의 귀를 쭉 잡아당겨서 매니저 형에게 데려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매니저 형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다가 이내 사색이 되어 이서호를 벤으로 데리고 갔다. 명복을 빈다.

***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게스트가 고정팀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컨셉이었기 때문에 오프닝멘트를 같이 한 뒤 곧장 게스트 소개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문제는 이 오프닝 멘트가…….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고정 패널들이 서로의 팔을 교차시켜 팔짱 낀 채 우리 쪽으로 발을 쭉쭉 뻗으면서 외쳤다. 우리도 연습한 대로 패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기세 좋게 외쳤다.

“팀원 뺏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그리고 동시에 정면의 메인 카메라를 보고 프로그램명을 외치면서 점프!

“팀팀!”

“와아아아!”

“우와아아악!”

뜀박질한 고정 패널들은 착지함과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가고, 뒤구르기를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멤버들은 아직 저 수준까지는 무리라서 제 자리에 얌전히 착지했다.

솔직히, 촬영 전 스크립트에 적힌 오프닝 인사말을 봤을 땐 그냥 임시로 써둔 건 줄 알았다. 일단 대충 끄적여두고, 실제 촬영할 때는 적당히 바꿔서 할 줄 알았지.

그런데 진짜 이걸 한다. 최선을 다해서 얼굴에 철판 깔아봤는데도 화르륵 타오르는 열감을 극복할 순 없었다.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면 안 좋을 것 같아서 슬쩍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온 씨, 부끄러워요? 우리 팀팀이 부끄러워?”

딱 걸렸다. 네, 부끄럽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요. 세상이 이렇게 구린 오프닝 멘트가 어디 있냐고. 지금 나를 열렬하게 타박하는 전동진 선배님 역시 아까는 멘트 구리다면서 카메라가 돌기 직전까지 투덜댔었다.

하지만 신인 아이돌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세를 바로 한 채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안 부끄러워요.”

“에이, 얼굴색이 완전 루비인데? 어? 루비?!”

짓궂은 눈빛과 능글맞은 미소로 나를 보시던 선배님이 큼직한 팔짓을 곁들여 옆에 있던 전재규 선배님께 부비부비 댄스를 시도했다.

“악! 더러워!”

전재규 선배님이 웩 소리를 내면서 밀치자, “너는 내가 더럽냐?! 어?”하고 성을 낸다.

“형이 한 번 당해봐요. 더럽지.”

절대 기죽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던 전재규 선배님이 대뜸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왁왁거렸다.

“저기, 저 파릇파릇한 애랑 형이랑 같아요? 형 연차를 생각해~ 팬들이 싫어해!”

“호오, 전 세계에 포진한 우리 옐로들한테 도전장을 내밀겠다 이거야?”

그 말에 흠칫 놀란 전재규 선배님이 태도를 싹 바꿔 정중하고 예의 바른 어조로 메인 카메라를 보면서 말했다.

“전국의, 그리고 각국의 옐로 분들. 저는 절대 도전장을 내민 적 없습니다. 이것은 블루스톤 전동진 형님의 모함입니다. 저는, 저는, 저는, 억울합니다아아아!”

선배님은 한술 더 떠 땅에 무릎 꿇더니 두 손을 번쩍 들었다가 절을 하듯 엎어졌다. 언뜻 임금님께 통촉해달라고 비는 신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으하하하!”

이서호가 신나게 웃어대자 전재규 선배님이 이서호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개그맨은 개그 보고 웃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봐. 이서호, 이번에는 잘했다.

“아~ 나는 서호처럼 웃음장벽 낮은 친구들이 좋더라. 서호야.”

“네! 선배님!”

“편하게 형이라고 해, 형이라고. 선배님이 뭐야? 우리 사이에.”

“너희가 어떤 사인데?”

추덕수 선배님이 끼어들자, 전재규 선배님이 가슴을 쫙 펴면서 말했다.

“조금 전에 처음 본 사이요.”

“엌! 맞아요. 흐히히힣!”

“아, 이 친구 진짜 마음에 드네. 서호야. 재규 형아, 해봐. 재규 형아!”

전재규 선배님이 이서호에게 어깨동무하며 손바닥으로 녀석의 명치를 팡팡 두들겼다.

“재규 형아!”

“아이고오! 잘했어요!”

텐션이 장난 아니네……. 선배님들은 이게 바로 토크다! 라는 것을 보여줄 작정인 듯 끊임없이 티키타카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말이 많은데 오디오가 겹치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런 게 바로 프로의 오프닝 토크인가. 완전히 산으로 가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대본에 적혀 있었던 ‘디아스 소개’까지 척척 진행된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내 입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더라…….

심지어 우리는 스칼렛 마인 재현까지 했다. 특히 나는 강현 형 역할 해보고 싶다고 와글와글 분위기를 몰고 가는 선배님들 덕에 루비 파트를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해야 했다.

선배님들은 강현 형 표정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솔직히 다들 우스꽝스러워서 나도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져서 긴장이 많이 풀렸을 때였다.

출연진을 일동 주목시킨 피디님이 시청자를 위한 포맷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들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처음 들은 것처럼 열심히 연기했다.

“헐! 아니 너무하잖아. 우리 평균 나이 38.2세인데? 디아스 멤버들은 몇 살이지?”

“저희는…….”

유찬 형이 빠르게 계산하고는 “21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배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배째!’를 선언했다.

“진정하세요. 몸 쓰는 게임만 하는 거 아니고요, 무엇보다 이기면 젊은 피를 수혈할 수 있죠!”

“오, 그렇지. 팀원 뺏기 게임이랬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마지막에 한쪽 팀이 일방적으로 모든 게임을 다~ 이겨서 반대쪽에 팀원이 한 명도 안 남으면 어떡합니까?”

“한쪽 팀에 인원이 한 명만 남는 경우 9명인 팀은 방어만 할 수 있고, 한 명인 팀은 이겼을 때 상대 팀원을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와우! 운 나쁘면 9대1 되는 거네요?”

다들 듣기만 해도 불리함의 끝을 달리는 ‘1’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까 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디님이 “여러분이 왜 1이 될 거로 생각하시죠?”하고 운을 띄우자 다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라서 “맞아! 나는 아니겠지~”하고 풀어졌다. 피디님의 조교 기술이 뛰어난 건지, 선배님들이 찰떡같이 맞춰주는 건지 모르겠네.

게임이 시작되기 전, 제일 먼저 각각 팀명을 정했다. 우리는 끝까지 함께 가자는 각오를 담아 그룹명인 ‘디아스’를 팀명으로 정했다. 선배님들은 파일럿 예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팀 이름을 ‘기장’으로 정했다. 그래야 고정이 진짜 고정 된다면서.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하기 전, 몸풀기 게임으로 신문지 게임이 제시되었다. 종이 위에 다섯 명 전원이 올라간 뒤 10초를 버티면 종이를 반씩 접고, 또 접는 식으로 점점 면적을 좁혀 나가는 게임이었다.

첫 판은 당연히 양쪽 팀 모두 손쉽게 성공했다. 면적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지금부터가 진짜 전략이 필요한 때였다.

이건 의외로 상대 팀의 능력을 파악하기 좋은 게임이었다. 버티는 상대로 지목당한 사람은 힘이 좋고, 계획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거나,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첫 게임에서 우리가 이기면 데려올 사람을 미리 봐 놓기 위해 우리 팀보다는 기장팀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유찬 형을 믿었으니까.

“디아스 팀 시작!”

“진하온, 뭐해?”

“응?”

“강현 형한테 가서 준비해.”

“어? 응.”

강현 형 앞으로 가서 형의 어깨를 짚은 채 신문지에 발을 하나 올렸다. 그런데 형이 갑자기 내 무릎 안쪽에 팔을 넣더니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순간 몸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기우뚱했던 나는 형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뭐, 뭐야? 뭐에요?”

“뭐가. 내가 너 들기로 했잖아. 못 들었어?”

기장 팀 염탐하느라 못 들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강현 형이 야트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잘 매달려 있기만 하라니……. 이건 그냥 안겨있는 거잖아요?

“좋았어! 그럼 다음! 유찬 형!”

……이 계획 이서호가 범인이었군. 유찬 형은 내 등 뒤에서 나를 덮치듯 안고서는 긴 팔을 쭉 뻗어서 강현 형의 양쪽 어깨를 단단히 짚었다. 덕분에 나만 형들 사이에서 짜부라져 있었다.

“이한 형!”

정이한과 이서호가 한쪽 손을 마주 잡고서는 신문지 뒤쪽에 한쪽 발만 걸친 채 서로의 무게에 의지하면서 V자 모양으로 갈라졌다. 흔들거리는 균형을 잡기 위해 정이한은 내 발목을, 이서호는 내 팔을 꽉 붙들어왔다.

“……5! 4! 3!”

“된다! 된다! 어, 어어어어!”

설레발치던 이서호가 들떠서 흥분한 순간, 중심축이 되는 강현 형의 몸이 크게 기우뚱거렸다. 팔이 쭉 땅겨진 와중에도 강현 형은 어떻게든 힘을 줘서 이서호를 잡아주려고 애썼다.

“헉! 강현아! 버텨!”

“윽!”

하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불안정하게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땅바닥 위에 나뒹굴 우리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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