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예능 오프닝 촬영 장소로 가는 동안 이서호는 완전히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결국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소할 수 없었지만, 긁어 부스럼을 방지하기 위해 그냥 묻지 않고 넘어가는 걸 선택했다. 유찬 형 말대로 나중에 리얼리티 방영하면 봐야지…….
벤은 경기도 외곽 쪽으로 빠져서 한참을 더 달렸다. 멤버들은 하나, 둘 잠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조금 전, 1,500만을 돌파한 뮤비 조회수를 두 눈으로 확인한 탓이었다. ‘1,503만회’라는 숫자가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아, 신경 쓰인다. 계속 보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이렇게 초연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니!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해…….
이러다간 곧 있을 예능 촬영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꾸벅꾸벅 조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내 어깨에 기댄 채 잠든 정이한이 불편하지 않게 자세를 고정해주고, 미리 받은 촬영용 스크립트를 한 번 더 살폈다.
프로그램명: <팀팀>
고정 패널과 게스트의 대결 구도로 게임을 진행해, 승리한 팀이 패배팀의 팀원을 한 명 빼앗을 수 있었다.
마지막 라운드는 단체전으로 진행되는데, 무조건 이전 라운드에서 꾸려진 팀으로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극적으로 5vs5가 유지되면 모를까, 무조건 한쪽 팀이 불리할 테니 배신자도 나올 법했다.
나는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출연진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얼굴과 이름을 머릿속에 다시 주입했다. 다른 사람 이름을 왜 이렇게 못 외우는지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다.
계속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속이 울렁거려서 창밖으로 시선을 뒀다. 차는 어느덧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도심지의 우뚝 솟은 높은 건물 대신 나무와 논밭이 쭉 펼쳐졌다.
조회수…….
잠깐 잊었던 뮤비 조회수가 또다시 고개를 짓쳐 들었다. 나를 봐달라고 시끄럽게 외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나, 몰랐는데 이런 거에 엄청 휘둘리는 타입이었구나…….
하지만,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어? 이런 어마어마한 성적은 처음이란 말이야. 내 눈으로 봤는데도 몰래카메라 같았다. 차라리 멤버들처럼 몰래몰래 들여다보며 모니터링할걸 그랬다. 그럼 지금 이렇게 흔들리지 않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결심과 함께 우리 채널로 들어갔다. 자꾸만 조회수로 시선이 향하려는 걸 안간힘을 다해 참아내며 채널을 아예 차단해 버렸다.
나중에……. 내가 이런 숫자 하나에 휘둘리지 않을 때가 되면 그때 풀어야지. 지금은 더 큰 미래를 그리며 앞만 보고 계속 달려야 할 시기였다. 여기에 만족하고 퍼져버리면 어떡해.
의식적으로 우리 조회수를 머릿속에서 꾹꾹 밀어내며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좁은 폭의 흙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던 중, 계곡이 졸졸 흐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곡? 설마 오늘 게임에서 지면 계곡물 입수하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을 넘어 상당히 신빙성 있어 보였다. 나는 졸졸 흐르는 계곡을 한껏 경계하며 시선으로 물을 증발시켜 버릴 듯 집요하게 쳐다봤다.
“얘들아~ 거의 다 도착했다! 다들 일어나!”
매니저 형의 외침에 가장 먼저 내 오른쪽 팔을 저릿하게 만들고 있는 정이한부터 깨웠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스스한 얼굴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그사이 알아서 잠에서 깬 유찬 형이 앞쪽에 앉은 멤버들을 깨우자 매니저 형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포맷은 숙지했지?”
“……네!”
대답과 동시에 비포장도로로 접어든 차가 크게 한 번 덜컹거렸다. 비포장도로의 끝에는 꽤 예쁜 펜션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펜션 앞 넓은 공터에는 이미 제작진들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좋아! 출연자 중에는 우리가 1등인 것 같다.”
매니저 형이 벤을 주차 시킨 뒤 뿌듯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인의 자세지. 집합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벤에서 우르르 내리는 우리를 발견한 스태프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 디아스 일찍 왔네요.”
“똥밟았군 재밌게 봤어요~”
“헉! 루비!”
나를 손가락질하며 “루비, 루비!”를 연호하던 스태프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스태프분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시더니, 날 가리켜 보이던 검지를 슬그머니 접으시곤 멋쩍게 뒤통수를 문지르면서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셨다.
우리 미션 영상이……. 유명해지긴 했나 봐. 아니면 출연진이 올린 거라서 예의상 한 번씩 봐주신 걸까?
“이야, 우리 디아스 친구들! 어서 와요, 어서 와.”
“김서준 피디님, 안녕하세요.”
매니저 형이 모범을 보이듯 먼저 인사하며 우리에게 힌트를 줬다. 저분이 피디님이시구나. 우리는 동시에 “안녕하세요, 디아스입니다!”하고 허리를 구십 도로 접으면서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피디님은 우릴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한 명씩 악수를 청하셨다.
“오늘 촬영 잘 부탁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이고, 풋풋하기도 하지.”
흐뭇하게 웃는 피디님의 얼굴이 환했다.
“이번에 우리 프로 잘되면 나중에 또 한 번 출연해 주기입니다? 그때 가서 빵 떴다고 러브콜 거부하면 안 돼요. 아셨죠?”
“아하하, 저희야 언제든지 불러주시기만 하면 감사하죠!”
유찬 형이 쾌활하게 대답하자 피디님이 약속한 거라면서 웃는 낯으로 눈을 흘겼다.
“집합 시간까지 편하게 대기하시면서 시간 보내시면 될 것 같아요. 펜션 3층으로 올라가면 디아스 대기실 있으니까 거기서 쉬셔도 되고, 경치 좋으니까 주변 구경해도 돼요.”
“피디님!”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피디님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계곡이 신경 쓰였기에, 근처에 입수할 만한 계곡이 있는지부터 살펴보고 싶었다.
“형, 저 근처 둘러봐도 돼요?”
묻는 말에, 스타일리스트 팀과 분주히 얘기를 나누던 매니저 형이 고개만 뒤로해 우리 쪽을 봤다. 뒤차에서 짐을 꺼내던 코디와 메이크업 누나들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응. 그래 20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너희는?”
다들 방에 콕 박히기보다는 잠도 깰 겸 산책하고 오는 걸 선택했다. 우리는 나란히 펜션 주변을 둘러봤다. 새 소리도 청량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제 5월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이른 시간임에도 햇볕이 부쩍 따뜻했다. 화창하고 포근한 날씨였지만……. 그래도 계곡은 좀 아니잖아. 들어갔다간 추워서 죽을지도 몰라.
“얘들아!”
우리를 부르는 매니저 형의 목소리에, 다들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찰칵찰칵 셔터음이 연달아 들렸다.
“화보 같네! 고마워요!”
카메라를 든 여성 스태프분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매니저 형한테 카메라를 보여줬다. 형과 몇 마디 주고받는 걸 멀뚱멀뚱 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걸었다. 사진 찍는 게 목적이었군.
펜션 옆으로 난 숲길을 따라 걷던 중, 갈림길에 박힌 이정표에 <천천 폭포-500m>라고 적힌 게 똑똑히 보였다. 아래쪽으로 가면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더 올라가면 폭포가 있는 모양이었다.
“천천 폭포! 우리 여기 가보자!”
이서호가 제일 먼저 뛰쳐나가면서 말했다. 멤버들을 보며 말하느라 경보하는 것처럼 뒷걸음질로 걷는 게, 저러다가 넘어질 것 같아서 불안해 보였다.
“그러다 넘어져. 똑바로 걸어.”
같은 생각을 한 듯한 유찬 형이 주의 주자, 볼을 잔뜩 부풀렸다가 이내 “알았어!”하고 해맑게 웃는다. 이서호는 우리가 폭포 길로 방향을 트는 걸 확인하고는 성큼성큼 앞장섰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희미했던 폭포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 나온 이정표를 따라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나무 계단이 쭉 이어져 있었다.
계단 중간쯤 내려가니 시야를 가리던 나뭇가지들이 걷히면서 뻥 뚫린 풍경이 펼쳐졌다. 청량하게 떨어지는 물소리가 훨씬 더 시원하게 고막을 두들겼다. 동시에 미스트처럼 분사된 폭포의 물방울들이 바람을 타고 우리한테 날아왔다.
“와!”
“오……!”
경치 진짜 좋다. 폭포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는데, 자갈들이 가득한 넓은 부지를 끼고 있기까지 했다. 그걸 본 순간 강력한 촉이 섰다. 오늘 벌칙 장소는 무조건 여기다. 아니면 게임 장소거나. 이걸 활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와 동시에 싸한 예감이 엄습했다. 오늘 게임이 뭔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체력을 요할 것 같다는 거였다. 어쩌면 내 체력 회복약 다 먹어야 할지도……. 서브 미션 하나쯤 더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두 개는 조금 불안하긴 했다.
그래도 오늘만 어떻게 잘 버티면, 내 포인트 투자 방향을 정할 수 있을 테니까. 가장 최악인 건 스킬을 쓰는 상황이 오는 건데, 그것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예능 한 번 찍었다가 뻗으면 다음에 나 빼버릴지도 모르잖아.
형들한테 잘 붙어 있어야겠다. 나만 다른 팀이 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내가 다른 팀으로 뽑혀 나갈 확률은 좀 낮아 보였다. 상대 팀에서 가장 눈독 들일 멤버는 아마 강현 형 아닐까. 딱 봐도 우리 중에 제일 든든하잖아.
“으아! 엄청 차갑!”
이서호가 물에 손가락을 담그자마자 놀라서 진저리쳤다. 내심 수온이 궁금했던 나도 슬그머니 쪼그려 앉아서 손을 담가봤다. 손가락이 찌릿할 정도로 찬 기운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여기 들어가면 바로 그냥 체력 마이너스 찍고 상태 이상 터질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차가웠다. 절대 지면 안 돼. 생존을 위한 승부욕이 차올랐다.
“우리 이제 돌아가야겠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유찬 형이 말했다. 여기서 하겠구나 90%쯤 확신하는 벌칙 장소를 뒤로하고 우리는 촬영지인 펜션으로 돌아갔다.
본격적인 오프닝 촬영 시작 전까지 메이크업과 코디를 끝내야 했기 때문에 매니저 형의 인도에 따라 우리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기실로 쓰라고 펜션에서 가장 넓은 방 하나를 통째로 내어주신 듯했다. 제작진분들의 배려에 감동한 것도 잠시, 코디 누나가 이동식 피팅룸에 우리를 밀어 넣으면서 옷을 건네줬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아주 베이직한 기본 아이템이었다.
옷과 메이크업까지 끝내고 나와서 오프닝 촬영 장소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였다. 집합 시간 10분 전에 국민 MC 탑 쓰리 중 한 명인 봉재범 선배님이 촬영장에 도착하셨다.
“안녕하십니까! 디아스입니다!”
“어이쿠, 깜짝이야.”
봉재범 선배님이 눈썹을 크게 치켜올렸다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면서 웃었다.
“아이돌이라더니 인물들이 훤하네.”
“감사합니다!”
이서호가 평소에 팬이었다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4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봉재범 선배님께서는 조카 보는 듯 푸근한 눈으로 우리를 봐주셨다.
선배님과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출연진이 모두 모였다. 개그맨 추덕수, 장수돌 블루스톤의 막내 멤버 전동진, 개그맨 계의 라이징스타 전재규, 아나운서 출신 예능인인 강도준까지.
봉재범 선배님은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다른 분들은 촬영장에 집합할 때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나를 가리키며 “루비!”하고 외쳤다…….
이쯤 되니까 기분이 이상해진다. 다 같이 했는데 유독 나만 언급되는 것 같은데? 이거 혹시 내 흑역사 갱신된 거 아니야? 나 왜 자꾸 흑역사만 적립하는 느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