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유찬 형의 얼굴에서 혈색이 쑥 빠져나갔다. 억지로 끔벅거리는 눈이 뻑뻑해 보였다.
“그,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고장 나서 더듬거리는 형을 본 순간 촉이 섰다. 이 형 처음부터 여장 걸리면 나 시키려고 작정한 거였네! 실망이야.
다른 멤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시간으로 핼쑥해지는 형들을 보다가 웃음을 빵 터트렸다. 역시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이 세상은 정의로워!
유일하게 정이한만 제삼자처럼 모두를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모두가 나를 몰아갈 때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준 정이한이 기특해, 괜스레 옆으로 가서 정이한의 어깨에 옆머리를 기대면서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형, 고마워요.”
“뭘. 결국 다 같이 하게 됐는데.”
“아아악! 맞다아, 단체 미션이었지! 어떻게 이 중요한 걸 깜박했지?”
이서호가 제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그거야 강현 형이 해외여행 썼다고 한순간 다들 눈이 뒤집혀서 그렇지.
절대 해외여행은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던 나조차 강현 형 말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고 잊었는데, 뭐. 여장 빼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건 흑역사 경험자여서였고. 그러게 내 말 듣지 그랬어.
“……유찬 형.”
강현 형의 음산한 중얼거림에 고장 나 있던 유찬 형이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천천히 옆으로 굴러가는 눈동자만 보면 궁지에 몰린 공포 영화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법했다.
“아, 하하, 하, 하…….”
유찬 형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강현 형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렇게 슬그머니 나와 정이한 뒤에 숨은 형이 우리 머리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말했다.
“가, 강현아. 괜찮아. 네가 뽑은 거잖아. 그렇지?”
“…….”
고요히 노려보는 눈빛에 유찬 형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강현 형은 슬로우 모션 촬영이라도 하는 양 천천히 한 발자국씩 떼었다. 최종 보스를 연상케 하는 강력한 포스에, “형님!”하고 허리 숙여 인사해야 할 것만 같아 배에 힘이 들어갔다.
“으악! 하온아!”
기겁한 유찬 형이 등 뒤에서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등에 이마를 묻었다. 그래서 나는 유찬 형의 깍지 낀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어 겹쳤다. 허리춤에 유찬 형의 팔을 단단히 고정하고 강현 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드득.
뼈마디 꺾는소리가 선연했다.
“하온아, 나, 나 안 버릴 거지?”
“그럼요. 꽉 붙잡고 있을게요.”
“……어?”
유찬 형이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우아하고 느긋하게 걸어오는 듯했던 강현 형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와 우리 앞에 무시무시한 그늘을 드리운 건.
“으악!”
외마디 비명을 지른 유찬 형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내가 꽉 쥐고 있어서 발이 묶여 버렸다. 이렇게 복수에 성공하는구나! 나를 몰아가려고 했던 유찬 형을 강현 형에게 내어주는 것으로 대리 만족을 얻으려던 순간이었다.
“와악!”
갑자기 발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유찬 형이 팔을 푸는 대신 허리를 감싼 자세 그대로 나를 들어 올린 채 우다다 달리기 시작했다. 키 차이 때문에 발이 땅에 닿지 않아서 덜렁덜렁 흔들리는 다리가 수치스럽다…….
“으햨햨햨! 진하온 개웃겨!”
시끄러워……. 나도 내 꼴 웃긴 거 알거든! 내 다리에 형이 걸려서 넘어질까 봐 다리를 접고 있어서 더 웃길 게 뻔했다.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이서호한테 복수의 기회가 오길 바랄 뿐이다.
덜렁덜렁 매달려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유찬 형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집채만 한 카메라 들고 우리를 쫓아 달려온 감독님도 아직 여유만만이신데, 유찬 형 체력 이래서야 쓰겠어. 물론 내가 카메라보다야 훨씬 무겁겠지만, 날 들고 뛴 건 유찬 형의 선택이었다.
결국, 얼마 가지도 못하고 내 발이 땅에 닿았다. 더는 뛸 힘이 없었는지 유찬 형은 날 놓자마자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헉, 허억, 헉.”
그 사이 강현 형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먹잇감을 향해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엎드린 유찬 형을 마주 보고 선 강현 형은 팔짱을 낀 채 시선만 내리깔아 유찬 형을 지그시 보았다.
“하, 하하, 강현아…….”
“형, 도망가도 소용없어.”
“너, 너도! 찬성했잖아…….”
우물쭈물 건넨 말에 강현 형의 동공이 일시적으로 흔들렸다. 그러더니 날 힐끔 보고는 크흐흠, 목을 가다듬는다.
와, 배신감 느껴! 강현 형도 나 시키려고 그랬네, 그랬어! 어떻게 이럴 수가? 내 편은 정이한밖에 없어!
“아, 형들. 진짜 너무하네. 다 나 몰아주려고 한 거였어요?”
내가 뾰로통하게 투덜거리자 형들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에 기가 찼다.
“너 예쁘잖아.”
강현 형의 한마디에 기가 살아난 유찬 형이 “맞아, 우리 하온이가 제일 예쁘잖아. 그러니까 진짜 잘 어울리겠다! 생각했지.”
분명 뱀과 개구리 사이였는데 갑자기 둘이 손을 잡았다.
“……됐어요.”
나는 빙그르르, 몸을 돌려세워 내 서러움을 달래줄 정이한에게로 쪼르륵 달려갔다.
“하온아아아아……!”
뒤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정이한의 등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이한 형, 다들 배신자예요! 내 편은 형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난 언제나 하온이 편이야.”
오구오구, 기특하기도 하지. 말도 참 예쁘게 한다니까. 등 뒤에서 정이한을 꼭 끌어안자 토닥토닥 내 손등을 두들겨준다.
***
뽑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성별 반전 미션으로 인한 소동이 한바탕 지나간 뒤, 이번엔 이서호와 내가 뽑기를 진행했다. 그렇게 뽑은 미션은 ‘청혼’과 ‘똥밟았군’이었다.
나는 우리 곡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다. 하지만 똥밟았군은 확실히 웃길 것 같았고, 청혼 컨셉은 좀 이상해 보였지만 뽑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세 가지 촬영 콘셉트를 놓고 어떻게 촬영할지 아이디어 회의가 시작됐다. 우리는 체육관 바닥에 동그랗게 둘러앉은 채 머리를 맞댔다. 촬영이 가능한 장소의 범위는 이 체육관과, 체육관 바로 옆에 있는 공원까지였다.
“일단 하기 싫은 것부터 해치우자.”
“……여장?”
“응.”
다들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발의한 유찬 형마저도 입맛만 다시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뭐. 자승자박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겠지. 나도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완벽하게 찍고 싶었다.
“형들.”
네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게 꽂혔다.
“다 같이 해야 하는 거면 이런 건 어때요?”
“뭔데?”
나는 얼른 휴대폰으로 너튜브에 접속해 걸그룹 ‘스칼렛’의 ‘mine'을 재생했다. mine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집요할 정도로 무겁고 진득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곡이다. 그런 만큼 안무도 끈적하고 유혹적인 느낌을 물씬 드러냈다. 스칼렛의 데뷔곡으로 단숨에 팬덤을 끌어모으게 해준 유명한 곡이기도 했다.
나는 내 생각을 쭉 말한 뒤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걸 30초, 30초 나누는 거죠.”
“오! 좋다!”
“근데 여기 이거, 꿀렁거리는 거 이거 나 되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서호는 곧장 골반과 가슴을 튕겨대면서 꿈틀거렸다. 나 저거 많이 봤어! 비 오는 날 좋다고 뛰쳐나온 지렁이!
“정답! 지렁이 댄스야?”
“아! 아니거든! 우 씨, 나 이거 안되나?”
“돼.”
강현 형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이서호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하지만 뒤늦게 말뜻을 알아차린 건지 순식간에 혈색이 싹 빠져나갔다.
“될 때까지 굴리겠단 거지?”
조심스러운 질문에 강현 형은 대답 없이 미세하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이서호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바람 빠지는 풍선마냥 푸시시, 소리를 내면서 상체를 푹 수그렸다.
“……해야지. 하자! 할 수 있다! 아자!”
“그, 어. 나도 열심히 할게.”
각오를 다진 정이한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하온이 의견대로 하자. 그나저나, 하온이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생각했어? 역시 우리 막냉이!”
유찬 형은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면서 과하다 싶게 칭찬해줬다. 기분 좋다!
“헤헤.”
이번에는 이서호가 똥밟았군을 어떻게 찍을지 아이디어를 마구마구 보탰다. 점점 디벨롭되다보니 어느 순간 똥밟았군을 아카펠라로 녹음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어째 점점 난이도가 올라가는 느낌인데?
무엇보다 똥밟았군도 통으로 안무였고, 청혼 콘셉트 영상에도 골반 돌리는 안무가 들어가는 부분이 있어 곧장 춤 연습부터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안무 습득이 빠른 건 나와 유찬 형이고, 강현 형은 한 번만 봐도 즉흥으로 안무를 따는 게 가능한 수준이라 아무 문제 없을 테니, 남은 건 두 사람인가.
“군무 들어가는 부분 몇 군데 있잖아. 일단 두 곡 동시에 연습하면서 이한 형이랑 이서호가 소화 가능한 파트를 먼저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강현 형이 진지하게 플랜을 짜줬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던 유찬 형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쭉 정리해서 읊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자, 그럼! 바로 안무부터 따자!”
이제부터 연습의 시간이다.
***
디아스 입덕 2주 차, 하모아는 최근 일상이 되어버린 디아스 뮤직비디오를 나노 단위로 샅샅이 핥으며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뮤직비디오 스토리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해석이 많았지만, 가장 하모아의 가슴에 와닿은 해석은 ’꽃의 요정 세계관‘이었다. 멤버들의 무대 의상은 매번 바뀌었지만, 가슴 포켓 주머니에 그려진 꽃 로고는 매번 똑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뮤비 내 각 멤버들의 방에 깔린 꽃과도 매칭되었고, 그게 멤버들의 탄생화라는 것까지 밝혀졌다.
멤버들이 고립되어 있던 방에는 각각의 탄생화가 흐드러지게 깔려 있었는데, 하모아를 비롯한 ‘꽃의 요정 세계관’ 지지자들은 그 꽃의 주인, 즉. 요정이라고 해석했다.
그들에 따르면 고립된 멤버들을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 들판, 바다, 산, 강을 보여주는 진하온은 꽃의 요정 중에서도 가장 자연의 총애를 받는 요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장면이 전환될 때, 멤버들의 뒷모습이 줌아웃 되면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다섯 종류의 탄생화 역시 ‘꽃의 요정 세계관’에 힘을 실어 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해석이 갈리는 아이템이 있었으니.
바로 멤버들의 방에 아주 작게 붙어 있는 진하온의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팬덤에서는 사진 떡밥의 최초 발견자에게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보내줬었다. 그리고 곧, 세계관 해석 전쟁의 막이 열렸다.
진하온이 멤버들을 끌어내기 전 방에 붙은 사진은 모두 우울하거나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뮤직비디오 마지막 장면에서 멤버들이 사라지고 남은 방을 쭉 훑을 때는 환하게 웃는 사진으로 바뀐다.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폴라로이드 사진 떡밥에만 집중해 진하온이 루프를 반복 중인 시간 여행자라는 해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었지만, 하모아는 꽃의 요정 세계관이 곧 진리라고 믿었다.
일단 얼굴이 요정이잖아. 개연성이 충분하다. 내 새끼……. 차원 찢고 나올 때 힘들지 않았을까.
“흑흑, 얘들아, 우리 애기들 진짜 존예롭다, 쓰읍, 하아…….”
뮤직비디오를 과장 좀 보태서 백만스물다섯 번쯤 보고 난 뒤에 이번에는 데뷔 쇼케이스 풀 영상을 재탕하기 위해 메인 페이지로 이동했다. 그런데 새로고침 하자마자 짧은 1분짜리 영상이 주르륵 떠 올랐다. 그것도, 무려 세 개나.
뭐야, 걸그룹이랑 콜라보한 건가? 하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던 하모아는 이내 썸네일 속 아이돌이 제 새끼들임을 알아봤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모를 수가 없지! 여장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여장……!”
황홀하게 감상하던 하모아는 30초가 지나는 시점에서 박장대소했다.
“아니, 얘네, 아니, 이게 뭐야, 캬하하하학!”
반복 재생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이번에는 다른 영상도 순차적으로 감상했다.
끅끅대며 너튜브에 댓글을 달던 하모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짹짹이로 달려갔다.
이건 된다! 영업 각이 떴어!
이 갈고 쓴 영업 멘트와 함께 영상을 짹짹이에 공유하고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배터리가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의 반응이 폭발했다. 하모아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타래에 애들이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올리면서 영업에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