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노래 들어줄래?”
항상 들어줬는데 새삼스럽기는. 평소에도 조심조심 묻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더 긴장했는지 마우스를 쥔 정이한의 손이 잘게 떨고 있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네, 그럼요!”
부담가지지 말라는 의미로 목소리 톤을 높였다. 내가 모니터 쪽으로 완전히 돌아앉자,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파일을 클릭했다.
지금까지 정이한이 만든 작업물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곡이 흘러나왔다. 힙합 느낌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고, 고요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달빛 아래에서 쓸쓸히 걷는 어떤 인물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단조로웠던 음에 화음이 더해지고,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겹겹이 쌓였다. 그러면서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된 듯 따스하고 포근한 선율로 바뀌었다.
밝고 희망찬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폭발하는 브릿지 파트, 그리고 이어지는 2절은 화려하고 풍성한 멜로디로 희망에 부푼 누군가의 설렘이 느껴졌다.
“……어때?”
잔뜩 긴장한 정이한이 바싹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축였다.
“뭐하러 물어봐요. 형은 언제나 최고지.”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미지를 가감 없이 말해줬다. 솔직히 이 노래 우리 다음 앨범 타이틀곡으로 밀어도 손색없을 것 같았다. 데뷔곡과 비슷한 흐름인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노래하는 초반부, 그 이후 밝고 희망차게 바뀌는 선율.
그래도 우리 데뷔곡이 현실 고등학생들 같은 풋풋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쪽은 동화 속 이야기 같다는 점이 확실히 다르긴 했다.
“가, 가사도 있어. 한 번 불러봐 줄 수 있을까?”
“가이드 녹음 필요해요? 그럼 녹음실 갈까요?”
“아니, 가이드 녹음은 아니고……. 여기서 가볍게 불러주면 안 돼? 그냥 들어보고 싶어서 그래.”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내미는 악보를 받았다. 음계 밑에 쓰인 가사는 내가 느낀 감상과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었다. 딱 하나, 곡의 모티브만 제외하고 말이다.
달빛을 모티브로 삼은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인 건 의외였다.
화자는 밤이 계속되는 세계에서 웅크린 채 태양이 뜨지 않는 하늘을 원망한다. 무기력함과 절망에 묶여 스스로 움직이는 것조차 포기하고, 고립되어 있던 화자에게 어느 날 태양을 찾으러 가자는 인물이 등장한다.
화자는 에너지 넘치고 밝은 인물에게 홀린 듯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함께 태양을 찾는 여정 속에서 화자가 잃어버린 꿈을 되찾는 순간, 흑야가 사라지고 낮과 밤이 되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인물은 화자에게 또 다른 태양이자 길잡이였다. 그렇기에 화자는 해가 지지 않는 현상인 ‘백야(白夜)’의 사전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그에게 ‘백야’라고 이름 붙인다. 곡의 제목이 백야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사마저도 한 편의 동화 같았다.
“너는 나의 하얀 밤이야…….”
마지막 한 소절을 부른 뒤 일렁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던 정이한에게 물었다.
“형 마음에 들게 불렀으려나?”
“응, 아주!”
정이한이 환하게 웃으면서 기립 박수를 쳤다. 저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내 입꼬리까지 덩달아 씰룩씰룩 올라갔다.
“하온아, 폰 줘봐.”
“휴대폰이요?”
갑자기 왜? 의아하긴 했지만 착실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건네줬다. 작곡 기계와 내 휴대폰을 연결한 정이한은 곧 ‘백야(白夜)’ 음원을 내 휴대폰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왜요?”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자, 정이한은 내 휴대폰 모서리를 검지로 문지르면서 쑥스러워했다. 한참 만에 흘러나온 소심한 목소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온이 노래야…….”
“네? 제 노래요?”
솔로곡을 발매하기엔 너무너무 이른 시기였으니 그런 의미는 아닐 테고, 그럼 어떤 의미의 내 노래라는 건데? 내 휴대폰에 담아주는 걸 보니까 나 들으라고 주는 건가?
“제 선물이에요?”
“응.”
“아! 난 또, 고마워요. 잘 들을게요! 저 이 곡 되게 마음에 들었는데 기뻐요!”
정이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가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인데? 칭찬을 더 해줘야 하나 싶어 정이한을 따라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아! 내가 중요한 말을 안 했구나.”
“……?”
“이거, 으음, 그러니까…. 하온이, 널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야.”
“……저요?”
정이한이 계속 부끄러워해서 내 얼굴도 덩달아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왜, 뭔데! 얼굴이 화끈거려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괜히 한 번 헛기침을 하곤 작업실 여기저기를 향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사실 만든 지는 꽤 됐어. 내년 생일에 주려고 했었는데…….”
“아.”
생일 선물 가불이었나! 그런데 왜 지금? 내 생일이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는데.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든 건 처음이었거든. 그리고, 네가 처음 곡을 받는다면 그건 내 곡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 형님한테 곡 받는대서……. 그래서, 욕심나서…….”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가는 것과 달리, 정이한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형한테 저는 이런 이미지였구나.”
나를 생각해서, 나를 떠올리면서 만든 곡이었다니.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니. 그건, 어, 그러니까.”
붉은색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홍조가 번져나가 정이한의 얼굴 전체를 빨갛게 물들였다. 또 무슨 민망한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야……. 이번에도 같이 부끄러워하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했을 때였다.
정이한이 내가 들고 있던 악보의 끝을 잡아 내렸다. 종이가 힘없이 펄럭거리면서 누웠다. 악보를 따라 미끄러진 손가락이 가장 커다랗게 쓰여 있는 곡명을 가리켰다.
‘백야(白夜)’
“……제가 백야에요?”
“응. 나한테 너는 그런 사람이야.”
“그럼, 화자는 혹시……. 형이에요?”
“응.”
그렇게 대답하는 정이한의 미소야말로 백야에 어울리는 태양 같았다. 다시 한번 가사를 곱씹어 보니 비유가 아닌 게 하나도 없었다.
흑야가 드리워진 세상의 화자는 혼자 작업실에 웅크리고 있던 정이한이었다. 태양을 찾으러 가자고 나타나 잡아끌고 가는 사람이 나였고, 태양, 그러니까 꿈을 되찾은 정이한의 곁을 지키는 것도 나…….
아, 미치겠네.
코끝이 찡해지다 못 해 눈이 시큰거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따뜻한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어?
“사실 내가 녹음까지 해서 주고 싶었는데, 나랑은 음역대가 안 맞아서 느낌이 안 살더라고……. 하지만 이 곡은 꼭 이 멜로디여야만 했어. 하온이 널 생각하면서 만든 거였으니까.”
민망한 듯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긴장을 놓는 순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꾹 삼켰다. 갑자기 울면 이상하잖아. 입술을 말아 물고 한참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을 내리누른 뒤에야 입을 뗄 수 있었다.
“형, 고마워요. 전 이런 거 받을 자격 없다고 생각…….”
“왜 없어?”
정이한이 내 말을 툭 끊고 끼어 들어왔다.
“네?”
“왜 자격이 없어. 이건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 내가 느낀 그대로를 표현한 것뿐인걸. 내 감정의 주인은 나야. 네가 내게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판단해. 그런 말 하지 마…….”
매번 수동적인 모습만 보이던 정이한이 이 정도로 강하게 내 말을 반박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게 전부 날 위한 말이었다.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마워요, 형. 정말, 진심으로요.”
“응. 웃는 얼굴 보니까 좋다.”
정이한이 나를 따라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방긋방긋 웃다가 똑똑, 작업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동시에 문을 바라봤다.
“나 들어가도 돼?”
유찬 형이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있었다.
“그럼요!”
“응.”
“뭐야? 걱정했는데 표정 보니까 잘 해결됐나 보네.”
나와 정이한의 시선이 한 번 더 얽혔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우리를 흐뭇하게 보던 유찬 형이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아까부터 서호 난리더라. 언제 오냐고 계속 톡 보내. 연습실 같이 가자.”
“아! 그래요. 연습하러 가요.”
휴대폰을 챙겨 든 뒤 주머니에 넣으면서 대답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이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든든한 보호구를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세화 형이 알면 좀 섭섭해하겠지만, 나 최애곡 바뀔지도 모르겠어. 겨울 바다는 나를 구원해준 노래였고, 백야는 내게 가능성을 보여준 노래였다.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하온아, 제발, 제발……. 엄마 눈앞에 보이지 마. 방에 좀 들어가 있어. 응?」
「형. 학교에서 아는 척 좀 하지 마, 형 때문에 나까지 왕따 당하면 나 학교 안 다닐 거야!」
전생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부끄러운 사람,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나란히 걸어가는 유찬 형과 정이한 사이로 뛰어들었다. 양팔에 두 사람을 꿰차고 헤실헤실 웃었다.
내 가족은 우리 멤버들이야.
“아니? 우리 하온이가 어리광부려주니까 갑자기 심장이 너무 뛰는데? 어떡하지? 하온이가 책임질 거야?”
“어? 그러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심장 CT라도 찍으러 갈까요?”
“아, 그럴 땐 ‘물론이죠, 유찬 형! 제가 책임질게요!’하고 대답해야지. CT가 뭐야? 삭막하게.”
유찬 형은 하나도 서운하지 않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하핫.”
웃음을 터트리는 내 머리 위로 내려앉은 유찬 형의 손에서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형들의 체온이 좋다. 언제까지나 내게 닿아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
리얼리티 풀 촬영이 있는 날. 오늘 촬영이 진행되는 장소는 숙소 인근의 작은 체육관이었다. 운동회처럼 체력을 요하는 촬영일까 봐 긴장한 것과 달리, 실제로 한 건 인간 제로 게임, 훈민정음, 이심전심 같은 가벼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대차게 말아먹었다.
5개의 게임 중 우리가 이긴 게임은 딱 한 판뿐. 기본으로 주어지는 한 개를 포함해도 우리 손에 남은 뽑기권은 달랑 두 장뿐이었다.
“아, 피디님 한 번만 더요!”
이서호가 두 손을 짝, 소리 나게 맞부딪히며 피디님께 싹싹 빌었다. 영상 두 개로는 50만 뷰는커녕 10만 뷰도 힘들 게 분명했다. 지금, 이서호가 설득을 빙자해 갖은 애교를 부리며 피디님에게 매달리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흠. 그러면 강현 씨.”
갑자기 지목당한 강현 형이 눈썹을 추켜 올렸다. 피디님의 지목과 동시에 여러 대의 카메라가 강현 형을 잡았다.
“강현 씨 애교 보여주시면 뽑기권 하나 쏩니다.”
“…….”
눈썹을 꿈틀거리는 형의 표정에서 두 개의 상반된 자아가 맹렬히 싸우는 게 느껴졌다. 멤버들의 기대감 어린 눈동자가 강현 형에게 몰렸다. 우리들의 눈치를 보던 형은 결국…….
“……뿌잉, 뿌잉.”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했다. 모두가 배꼽 잡고 웃었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왜 내 흑역사를 이렇게 꺼내는 건데…….
흑흑. 너무해, 진짜.
다들 방방 뛰며 기뻐하는 와중에, 강현 형과 나만 처참하게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뽑기권은 얻었으니까 다행이야…….
“자, 그럼 여러분 총 세 개의 미션을 뽑고, 오늘 안으로 촬영까지 마치시면 됩니다. 메이크업, 의상, 영상 편집은 빵빵하게 지원해 드립니다!”
“네!”
뽑기는 강현 형, 이서호, 그리고 내가 하게 되었다. 강현 형은 절대 안 뽑는다고 했지만, 뿌잉뿌잉……의 공로자로서 무조건 뽑아야 한다고 다들 밀어붙여 어쩔 수 없이 나섰다.
“강현 형, 첫 타자! 좋은 거 뽑아줘!”
“…….”
강현 형은 묵묵히 박스 안에 팔을 넣어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굳은 채 쪽지에 시선을 고정한 강현 형을 향해 피디님이 큰 목소리로 읽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고도 한참 뒤에야 더듬거리면서 형의 입술이 열렸다.
“……성별 반전.”
아.
아…….
아아…….
결국 저걸 뽑아버렸네. 흑역사를 만들 유찬 형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봤다.
“유찬 형, 힘내요.”
“응? 무슨 소리야. 저거 하온이가 하는 건데?”
“……네?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하온이가 제일 잘 어울려.”
유찬 형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멤버들이 전부 내가 어울린다면서 몰아가기 시작했다. 아, 다들 본인만 아니면 된다 이거야? 진짜 너무하네!
“하온이 싫으면 내가 할까?”
정이한이 나를 위해 유일하게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려 했을 때였다.
“여러분, 영상엔 무조건 다섯 명 전원이 다 나와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모든 미션은 다 같이 하시는 겁니다.”
피디님의 설명에 우리는 모두 사색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