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에이, 농담하지 마시라니까요. 녹음 어땠어요? 다시 할까요?”
“농담 아니었어. 계약으로 묶인 곡만 아니었다면 너한테 줬을 텐데……. 진짜 아쉽네.”
한탄 섞어서 하는 말이 진심으로 들려서 어쩐지 섬뜩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진심일 리 없지만, 정말 곡 주겠다고 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이미 저작권 계약이 끝난 곡이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황당한 실랑이할 뻔했네.
“음. 그러면 다음에 형이 우리 디아스 곡 하나 써주시면 되겠네요! 어때요?”
히트곡 제조기라고 불리던 세화 형이었다. 좋은 곡은 다다익선이지! 일단 던져봤는데,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응? 디아스 곡? 어휴, 내 곡을 디아스 선배님들이 불러주신다면야, 난 진짜 감사하지. 엎드려서 제발 받아 달라고 부탁해야 할 판인데~”
능청스럽게 하는 말에는 농담 끼가 다분했지만, 나는 그 농담을 붙잡고 늘어졌다.
“정말요? 곡 주실 거예요?”
“그럼~”
“약속했어요?”
“그래그래.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어주랴?”
“어린애 아니거든요.”
뾰로통한 척 대답했지만 마음 같아선 양손 새끼손가락 다 걸고 싶었다. 가계약서 하나 만들어서 지장이라도 찍어 두면 안 되나.
“그나저나 너무 완벽하게 불러서 더 손댈 게 없는데? 내가 상상한 느낌보다 더 좋게 나왔어.”
“어, 그러면 이번엔 목소리 톤만 좀 다르게 해서 같은 감정으로 불러볼까요?”
“가능해?”
“가능…… 하죠?”
왜 안 되지? 그냥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럼 들어보자.”
“네!”
나는 총 세 번을 더 불렀고, 그때마다 세화 형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 좋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뿌듯했다. 저런 고민은 행복한 거잖아.
마음에 들게 안 나와서 괴로워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
테스트 녹음을 하는 동안 세화 형과 유찬 형은 꽤 친해졌다. 피처링 하는 김에, 멤버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콩고물을 나눠 주려던 내 목적이 아주 잘 달성되고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정이한이 계속 신경 쓰인다. 아까부터 말도 별로 없고, 웃지도 않았다. 원래 조용한 편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화 형과 유찬 형이 작곡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는 게 좀 이상했다. 작곡에 대한 열정이면 정이한도 뒤지지 않잖아. 원래 저기에 정이한도 함께 껴 있어야 그림이 맞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겨울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힘없이 걸어가는 사람처럼 우울해 보였다.
녹음 부스에서 나온 나는 벽에 기대앉아 있는 정이한의 앞으로 갔다. 내 인기척을 느낀 정이한이 눈동자만 굴려서 나를 본다. 허리를 숙여 정이한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정이한은 조금 의아한 듯한 시선으로 나를 봤지만, 결국 나를 따라서 일어났다. 그 타이밍에 갑자기 유찬 형이 목소리를 키우면서 “세화 형! 저 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하고 소리 높였다. 유찬 형이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도와준 게 틀림없다.
덕분에 녹음 부스에서 정이한만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리얼리티 촬영이 다음 주 화요일까지인 터라, 숙소로 돌아가면 카메라가 잔뜩 깔려 있을 거였다. 그런 곳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하긴 좀 어려울 테니까, 지금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정이한을 이렇게까지 우울하게 만든 게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담아둬서 좋을 거 없다. 빨리빨리 풀어야지.
2층에는 정이한의 작업실도 있었기에 차라리 거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복도 끝, 이제는 익숙해진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작곡 기계들 앞에 놓인 긴 의자에 정이한을 앉힌 뒤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정이한은 고개 숙인 채 맞은편 벽만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의자를 양손으로 짚은 채 상체를 숙여 정이한의 얼굴을 올려봤다.
“이한 형.”
“미안.”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상태에서, 허공에 중얼거리듯 나온 사과였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대뜸 사과부터 받으니까 당혹스러웠다.
설마, 내가 아직도 화난 줄 아나? 우울해 보이는 게 신경 쓰여서 따로 데리고 나온 것뿐인데…….
“뭐가 미안한 거예요? 저 형한테 사과받으려고 데려온 거 아닌데.”
정이한을 향해 자세를 완전히 틀어 앉은 나는, 한쪽 다리를 접어서 의자 위로 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이한은 미동 없이 처음 자세 그대로 앉아서 집요하게 바닥만 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안 되겠다. 이 오해부터 풀어야겠어.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까 세화 형 의심한 거요?”
묻는 말에 정이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내 그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심했던 게 아니라…….”
나는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하지만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려주는 게 맞는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이한의 손가락이 쉼 없이 꼼지락거리며, 손톱끼리 맞부딪쳤다.
틱틱, 손톱 긁는 소리가 숨소리만 맴돌던 공간에 끼어들었다. 한참을 주저하던 정이한은 이윽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무서웠, 어.”
“뭐가 무서운데요?”
“그러게…….”
어쩐지 대화의 주제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뭐 때문에 겁먹었지? 몇 가지 이유를 열심히 떠올려 봤는데 ‘이건가?’ 싶은 게 없었다.
수 분을 고민한 끝에, 이유를 짐작하지도 못한 채 괜히 꼬치꼬치 캐묻기보다는 그냥 무서웠다는 말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따금 감정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기도 하니까.
“실망시켜서 미안해…….”
깍지 낀 정이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손등 위로 힘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 예전처럼 바닥에 눌어붙게 생겼다. 일단 고개를 내 쪽으로 들게 해서 눈을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정신 좀 차리라고 뺨을 세게 붙잡아볼까……. 하다가 방향을 틀었다.
겁먹은 사람은 윽박지르는 게 아니라,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렇게 판단한 나는 오른쪽 팔을 길게 뻗어 정이한의 왼손 뺨을 감쌌다.
살짝 힘을 줘서 내 쪽으로 들게 하자 일렁이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잔뜩 흔들리는 동공이 정이한의 심정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 같았다. 왼쪽 손으로 나머지 뺨을 감싼 채, 정이한이 안심할 수 있도록 최대한 유순하게 표정을 풀었다.
“일단 확실히 말해 둘게요. 저는 형한테 실망하지 않았어요.”
정이한은 내 말을 부정하면서 고개 저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감정을 앞세워서 못된 말, 한 건데도?”
“그만큼 형이 절 좋아한다는 거잖아요.”
“응. 그건 자신 있어.”
내내 불안하게 떨리던 눈매에 힘을 꽉 주더니 확신에 찬 대답을 해온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정이한이 멤버들 중에서 유독 날 편애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이만큼?’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이마아아아안큼’이었나 보다.
“저도 형 좋아해요.”
“……내가 못된 짓 했는데도?”
“네. 이제 안 그럴 거잖아요. 실수할 수도 있죠. 저 그렇게 냉정한 사람 아니에요.”
그러자 정이한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응. 안 해. 절대.”
“그럼 됐어요.”
안도하는 정이한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미소라고 봐도 될 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속으로 안도하고 있는데 정이한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거리감에 놀라 뺨에 대고 있던 손을 떨어트리자, 곧장 내 어깨에 이마를 툭 떨궜다.
“너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
가느다랗고 애처로운 목소리는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어린애를 달래듯 정이한을 안아 준 채 등을 토닥거려줬다. 예상하지 못했는지 몸을 움찔거린 정이한이 이내 나를 마주 안았다.
“제가 어떻게 형을 미워해요.”
“……고마워.”
“별게 다 고맙네.”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하자, 정이한은 숨이 막힐 정도로 팔에 힘을 줬다. 나를 단단하게 끌어안은 채 가늘게 떨리는 몸을 느끼고 있자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릴 때 종종 무서운 꿈을 꾼 적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쫓기다가 막다른 곳까지 내몰리는 꿈.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울다가 잠에서 깨곤 했다.
어둑한 새벽, 내 방의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무언가로 변해 나를 공격할 것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옹송그렸다.
눈앞에 있는 정이한이 꼭, 그때의 내 모습 같았다. 잔뜩 겁에 질린 채, 어둠이 나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따스한 온기를 나눠줄 누군가의 품을 간절히 필요로 하던 때. 그래서 나는 정이한의 등을 천천히 쓸어 내려주면서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줄게요.”
그러니까 겁먹지 마. 뭐가 너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든지 나한테 와. 내가 지켜줄게.
이런 내 마음이 전달된 걸까. 정이한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꿀렁거리더니, 뒤이어 “응…….”하고 사라질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록 목소리는 작았지만 불안한 기색은 걷혀 있었다. 나를 믿는, 안도하는 목소리.
다행이다.
***
한참 뒤에야 품에서 떨어져 나간 정이한은, 얼굴을 붉힌 채 머쓱하게 웃으면서 “미안, 꼴불견이었다.”하고 부끄러워했다.
“괜찮아요, 아주 귀여웠으니까.”
“귀, 귀엽…….”
충격받은 듯 얼빠진 목소리를 내는 정이한을 보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큰 소리를 내며 웃자, 정이한도 나를 보며 슬며시 따라 웃었다.
분위기도 좋아졌고, 유찬 형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니까 슬슬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이한이 묻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뭐든 괜찮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의외의 질문이 나왔다.
“하온아, 그 세화 형……, 한테 정말 곡 받을 거야?”
“곡이요? 그럼요. 주시면 무조건 받아야죠. 세화 형 곡 진짜 좋거든요.”
말해봤자 안 믿겠지만, 그 형 전생에서 엄청난 히트곡 메이커였다고! 세화 형 노래로 단숨에 인기를 얻은 아이돌 그룹도 있었을 정도다. 그만큼 형의 노래는 대중픽으로 인기몰이가 가능하거든.
“……그럼, 나 이거.”
정이한이 기계를 켜더니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마우스 커서가 ‘백야(白夜)’라는 제목의 파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곡인가? 최근에는 바빠서 작업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언제 이런 걸 또 만들었지?
“내 욕심이긴 한데…….”
정이한은 차마 마우스 커서를 클릭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문지르기만 하며 무척 부끄러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