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자연스럽게 세화 형의 어깨동무가 풀리면서 몸이 돌려 세워졌다. 정이한은 내 양팔을 붙잡은 채 등을 조금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상대가 오해하게끔 말하면 어떡해.”
바닥에 흘린 과자를 주워 먹는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라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내가 오해 살 뻔한 건 맞는데…….
정이한의 평소 성격과 전혀 다른 반응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얼떨떨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혀버리네.
“하온아, 설명해야지.”
정이한이 세화 형을 향해 턱짓하면서 채근했다. 그러면서 다시 세화 형 쪽으로 나를 돌려세우는데…….
뭐지? 이 꼭두각시가 된 기분은? 내 몸에 주렁주렁 달린 보이지 않는 실을 정이한이 꽉 쥐고 조종하는 것 같았다.
세화 형과 눈이 마주치자 의미 모를 눈웃음이 내게 꽂혔다. 아주 크게 소리 내 웃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수치스럽지? 정이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수치스러움은 내 몫인 거야? 이런 분위기에 오해였어요, 하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이한아, 하온이가 곤란해하잖아. 크게 말실수한 것도 아닌걸.”
“하지만 형도 들었잖아. 또 이상한 사람이 들러붙으면 어떡해.”
정이한은 제 목소리가 세화 형한테도 들린다는 걸 잊은 모양이다. 아무리 정이한이 그룹 막내인 나를 아낀다고 하더라도 이건 선을 넘은 거였다.
세화 형은, 여러 의미로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다. 가장 애정하는 가수, 정신적으로 바닥까지 내몰려 있던 날 노래를 통해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려준 사람이다.
같은 기획사 식구까지 된 마당에, 우리 멤버한테 수상한 사람 취급받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좀 화가 날 정도였다.
“이상한 사람? 들러붙어?”
약간의 정적 끝에, 세화 형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나는 내 어깨에 얹어진 정이한의 손을 떼어 내면서 형에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이한 형이 좀 무례했죠.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세화 형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가타부타 말이 없길래 슬쩍 고개를 들어 형을 올려다보자, 그제야 형이 가볍게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아주면서 “아니야, 그건 괜찮아.”하고 대답했다.
누가 들어도 기분 상한 티가 역력한 목소리였다. 속상해 죽겠다. 날 지켜주겠답시고 남한테 무례하게 굴면, 정이한 네 이미지까지 엉망이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거야?
“……하, 온아…….”
내 이름을 부르는 정이한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져 마지막 음절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보지 않아도 잔뜩 고개를 떨구고 있을 정이한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지금 보인 태도는 정말 아니야.
뒤를 돌아 달래주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보다 하온아, 무슨 일 있었어?”
“네? 뭐가요?”
“이상한 사람이 들러붙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
괜히 신경 쓰이게 했나 보다. 굳이 형한테 말할 필요 없는 내용이라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별일 아니었어요. 형이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비밀이야?”
그건 아니지만, 굳이 세화 형한테까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건 내 문제고, 우리 그룹의 일이지 세화 형이랑은 상관없으니까. 물론, 소파남이랑 되지도 않는 이상한 루머에 휩싸이면 피처링한 나 때문에 피해가 갈 수도 있지만…….
아, 혹시 나 때문에 곡에 피해갈까 봐 신경 쓰이는 건가?
“그건 아닌데 형 곡에 피해 갈 일은 아니에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나는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최대한 가벼운 어투로 말하려고 의식하며 담백하게 대꾸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저 괜찮으니까, 라는 뜻을 열심히 강조했는데 세화 형은 조금 서운한 눈치였다.
“그래……. 우리가 아직 그렇게 친한 건 아니니까.”
“어……. 그건,”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제 딱 세 번 만난 사이다. 세화 형이 유독 친근하게 대해주는 것뿐이지 따지고 보면 친하다고 할 순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어쩔 수 없이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긴 하죠.”
“아, 비수가 꽂힌다……!”
세화 형이 왼쪽 가슴을 움켜잡으면서 상체를 푹 수그렸다.
……이런 건 어떻게 반응해야 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더니 과장되게 앓는 소리가 커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문 세화 형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이런 농담 안 통하나? 영 안 웃네.”
세화 형은 검지로 뺨을 긁적이면서 민망한 듯 웃었다. 아, 분위기 풀어주려고 한 장난이었구나! 지금이라도 웃어주려 입꼬리를 열심히 당기는데, 형이 내 양 뺨을 쭉 잡아당기면서 뾰족하게 말했다.
“엎드려 절받기는 취미에 없거든?”
“으, 아파여…….”
“응? 뭐야? 잠깐! 너 볼이 왜 이렇게 몰랑몰랑해? 찹쌀떡 같네. 촉감 너무 좋은데?”
“하디 마요…….”
입술이 벌어져 있어서 자꾸 혀짧은 소리가 나왔다. 다행히 세화 형은 금방 내 뺨을 놓아주었다.
“계속 만지고 싶어. 중독성 있다.”
나는 두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얼른 “저는 싫어요.”하고 대꾸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세화 형이 내 뒤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이한 때문인가? 형이 정이한한테 뭐라고 할까 봐 괜히 불안해져서 세화 형의 옷깃을 잡아당겨 주의를 끌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형은 짧게 한숨 쉬고는 내게 웃어줬다.
“그럼, 일 이야기 하기 전에.”
세화 형이 내 어깨를 툭, 짚은 뒤 나를 지나쳤다. 정이한 앞에 선 형은 허리에 한쪽 손을 짚고, 뒤통수를 긁적거린 뒤 운을 뗐다.
“이한 씨.”
“……네.”
잔뜩 시무룩해져 있던 정이한이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나마 유찬 형이 조용히 정이한의 곁을 지켜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 이한 씨 입장 이해해요.”
“……네?”
“걱정돼서 하신 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멤버분들만의 비밀인 것 같지만.”
예상과 달리 세화 형은 정이한에게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저한테 하온이는, 제 고민과 방황을 끝내준 소중한 친구거든요. 은인이나 마찬가지라서 절대 해 끼치지 않을 거예요.”
“……아.”
정이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마 내 얼굴도 정이한 만큼이나 빨개지지 않았을까? 은인이라니. 전생에서는, 오히려 형이 내 은인이었는데…….
버스킹 중이던 형에게 다가가 한 일이라고는 이성을 잃고 호들갑 떤 게 다였다. 은인 같은 거창한 칭호는 내게 너무 과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어요.”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원래 아이돌 멤버들은 서로 엄청 끈끈하다고 들었거든요. 가족처럼. 저라도 우리 집 막내가 저러면 불안할 것 같아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러면’이라는 단어가 내 귀를 콕콕 쑤셔 댔다. 내가 뭘 어쨌는데……. 억울하네.
“하지만 저를 수상한 사람 취급하신 건, 역시 조금 서운하네요. 대신 앞으로는 저를 좀 믿어주시면 좋겠는데. 안될까요?”
세화 형은 그렇게 말하며 정이한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을 물끄러미 보던 정이한이 이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좋은, 분이시네요. 저랑 다르게.”
“네? 이한 씨도 좋은 사람이잖아요.”
“……전 아니에요.”
씁쓸하게 고개 저어 보이는 정이한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유찬 형이 “이한아…….”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좋은 사람 맞아요. 소중한 동생을 지키려는 형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도 먼저 손 내민 건데.”
세화 형이 “하온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하고 물으면서 나를 끌어들였다. 안 보면 모를까 눈앞에서 축 처져 있는 정이한 때문에 내심 끌탕 하던 내가 덥석 형의 말을 받아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정이한에게 다가가 웃으면서 눈을 마주쳤다. 내 시선을 피해서 도망치는 얼굴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형, 나 때문에 애쓰는 거 알아요. 고마워요.”
당사자들이 화해했으니, 나까지 타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이한도 내가 화났었다는 걸 충분히 눈치챈 것 같으니까.
“으응…….”
하지만 정이한은 여전히 우울감에 휩싸여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자! 그러면 일하자! 피처링 할 하온이 목소리에 맞춰서 곡을 조금 수정했는데, 원곡이랑 한번씩 비교해서 들어보고 피드백해줄 수 있을까? 유찬 씨랑 이한 씨도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도움이 될지 잘…….”
유찬 형이 쭈뼛쭈뼛 다가오며 말했다. 물론이죠! 호쾌한 대답에 유찬 형의 얼굴에도 비로소 미소가 가득 드리워졌다. 정이한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그래도 선뜻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작업실로 들어왔다. 아, 은근 신경 쓰이네. 계속 우울해하면 이따 정이한이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어.
***
‘겨울 바다’가 이보다 더 좋아질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세화 형이 새롭게 편곡한 겨울 바다는 멜로디 라인이 훨씬 짙어졌고, 그만큼 브릿지 이후의 변주도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다.
이 노래가 만들어지기까지, 나도 조금은 영향을 미친 거잖아……. 믿을 수가 없었다.
세화 형은 의견을 달라고 했는데, 나는 그저 어디가 어떻게 왜 좋은지 주절주절 감상을 읊는 것밖엔 못 했다. 나쁜 점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데 어떡해!
반복해 듣다 보니 머릿속에서 슬슬 어떤 느낌으로 녹음하면 좋을지 감이 왔다. 빨리 부르고 싶어서 몸이 달아올랐다. 내 나름대로 해석한 피처링 파트의 감정선을 말했더니 세화 형이 눈을 빛내면서 즉흥으로 곡을 수정했다.
어떻게 점점 더 좋아지지? 이게 가능한 거야? 유찬 형, 보고 있어? 배울 수 있는 거 다 배워가라고!
청음에 푹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2시가 되어, 레코딩을 총괄할 엔지니어님이 도착하셨다. 갑자기 전문 영역으로 들어가서 대화하는 내용을 귀동냥으로 듣고 있다가 수신호에 맞춰 녹음 부스로 들어갔다.
헤드셋을 끼고,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들으며 천천히 감정을 잡았다. 감정 잡기는 무척 쉬웠다. 내가 전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표현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피처링 파트는 끝났지만, 불현듯 가느다란 멜로디 라인이 이어지는 구간까지 호흡을 이어나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즉흥적으로 음 끝을 길게 끌면서 목소리의 볼륨을 낮췄다. 숨을 잃어 가는 것처럼, 폐를 쥐어 짜내듯 소리를 냈다. 이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해봤는데…….
마음대로 했다고 혼나려나?
때마침 노래가 끊겨 눈치 보듯 녹음 부스 밖을 살폈는데,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잘한 것 같다!
노래 스탯 올리기 진짜 잘했다. A+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느낌을 지금처럼 잘 살릴 수 없었을 테니까.
“……허.”
세화 형이 탄식을 내뱉었다.
“하온아.”
“네!”
“이 곡 너 줄 테니까 네가 부를래?”
“형, 그런 농담은 안 통해요.”
“아니, 농담 아니고. 나보다 네가 훨씬 더 잘 살릴 것 같아. 내가 피처링하고, 가수는 진하온하자.”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 형이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